[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지] <어느 날 하굣길이었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뭐지, 하고 계속 가는데 이게 한두 번이 아닌 거다. 요만한 돌이 어설프게 날아와 팔을 맞히고 떨어졌다. 나는 우뚝 섰다. 저쪽에서 달아나는 발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다리병신, 다리병신 하는 메아리만은 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음악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나성인(42)은 서울대에서 아동가족학을 공부했지만, 문학에 더 끌려 독일시를 복수전공했다. 그리고는 음악에 목이 말라 혼자 독일가곡을 연구했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지금은 인문학과 클래식을 오가며 강의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최근 펴낸 ‘어른이 먼저 읽는 어린이 클래식’(풍월당·344쪽·2만9000원)은 첫 부분부터 콧등을 찡하게 만든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툭하면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그것이 차별과 혐오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때 돌팔매를 당한 것.
클래식은 바로 그때 아홉 살의 아픈 마음을 말없이 위로해준 친구가 됐다. 하루는 외삼촌이 멋진 선물을 줬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싱싱함이 샘솟는 그 보물은 외삼촌이 건네준 작은 녹음테이프 안에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삼촌이 내게 낡은 워크맨―가지고 다니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과 테이프 하나를 주신 것이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한번 들어봐. 엄청 멋있어.” 삼촌의 추천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나였지만 왠지 낯설어 책상에 그냥 놓아두었다. 우람한 산맥이 그려져 있고 파랗고 빨간 딱지에 알파벳이 적혀 있는 그 테이프는 딱 봐도 어른용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테이프가 덩그러니 놓여 있자, 삼촌이 다음에 주신 게 바로 그 녹음테이프였다. 받고 보니 케이스 종이 위로 삼촌의 반듯한 손글씨가 빼곡하다. 처음 듣는 이름, 들어본 이름, 긴 이름, 짧은 이름, 우리말 이름, 외국 이름들······ 한 면 가득 이름 천지였다.>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
베토벤 미뉴에트 사장조
글린카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2막 장면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4막 피날레 장면
그 녹음테이프에 적혀있던 곡들이다. 나성인의 ‘아이 러브 클래식’을 이끈 출밤점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딱딱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과 친해진 경험을 녹여낸 음악 수필집이자 클래식 안내서다. 무엇보다 ‘클래식 스승’ 삼촌과의 실제 경험담에 바탕을 두고 있어 쉽게 읽힌다.
저자는 클래식이 주는 ‘말없는 위로’에 주목한다. 클래식 음악은 ‘많은 고통을 통과하여’ 나온 음악이기 때문에 귀를 활짝 열기만 하면 저절로 힐링을 선사한다. 음악을 통해 시간을 버텨내는 힘을 배운 저자는 한 걸음 더 성장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시간 일찍 학교에 가 음악을 들으며 운동을 해 고등학교 때는 체육대회에서 5㎞를 달리는 오래달리기 코스도 완주할 수 있게 됐다.
클래식과 친해지는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과 똑같다. 이름을 알고, 친밀함을 느끼고, 힘께 시간을 보내면서 넓어지고 깊어지면 비로소 한 사람의 인격을 사귀게 된다. 클래식을 비롯한 예술 작품도 그렇게 사귈 수 있다. 인생을 뛰어넘어 오래 살아남는 예술 작품에는 다 그만한 인격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성인은 “클래식과의 사귐이 오랜 코로나 시기를 겪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서적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클래식과의 만남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이름 알기’ ‘친해지기’ ‘넓어지기’ ‘깊어지기’다. 그는 알고 보면 우리는 무척 많은 클래식 음악을 만났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결혼식에서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을 듣고, 피아노 학원을 지나다 ‘작은 별 변주곡’을 듣고, 골목길에서 후진하는 포터 트럭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고, 동네 오락실 테트리스에서 러시아 민요 ‘칼린카’를 들었던 경험은 클래식에 문외한이라도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결국 네 단계의 스토리텔링을 착실히 수행하면 누구나 ‘클래식 도사’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저자는 클래식을 처음 전수해 준 삼촌의 비법을 소개한다. 정말 유용한 팁이다. 작곡가·작품·연주자의 이름에 관심을 가질 것, 짤막한 청후감을 써볼 것, 내용을 보기에 앞서 음악을 먼저 접할 것 등 실용적인 조언이 가득하다.
스토리텔링이 책 자체를 끌어가는 힘이라면 음악 감상은 이 책의 집필 목적을 완성시키는 활동이다. 아무리 읽더라도 클래식을 실제로 듣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음악과의 사귐은 불가능하다. 이 책의 별책 부록인 QR북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졌다.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소개된 클래식 음악을 빠짐없이 만나볼 수 있도록 141개의 QR코드 음원을 수록했다. 모든 음원은 도이치 그라모폰, 데카, 필립스 등 그동안 무수한 클래식 명반을 만들어왔던 유니버설 뮤직 산하의 유명 레이블에서 가려 뽑았다. 이처럼 이 책은 스토리텔링과 음악 감상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클래식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말 친절한 책이다.
나성인은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몇 가지로 나눠 설명하지만 그 핵심은 ‘마음의 돌봄’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팬데믹 시절을 겪으며 어린이들이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졌다. 관계 맺는 법을 처음 배워야 할 시기에 격리를 경험했기 때문. 게다가 우리의 어린이들은 이미 과도한 경쟁에 노출돼 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마음의 건강은 더 이상 미뤄놓을 수 없는 문제다.
배고픔보다 마음의 고픔이 더 문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인간다운 공감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일 우리 어린이들이 그런 정서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면 힘겨운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클래식은 예민한 듣기의 감각을 길러주고 집중력을 길러준다. 미주와 유럽에서 문화인의 표지로 받아들여지기에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필수적인 교양이기도 하다.
저자는 클래식 안에 들어 있는 장인 정신, 학구의 정신, 겸양의 정신, 그리고 상대방의 소리를 잘 들으려는 경청의 마음은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하는 내용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클래식을 듣고 인문학 공부를 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다운 연민의 마음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지만, 어른만큼이나 바쁜 일상을 살지만 마음만은 메마르지 않도록 마음의 돌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 하나를 여러분과 함께 듣고 싶다. 그가 남긴 천여 곡 중에서 딱 중간쯤 나온 작품, ‘음악에게’라는 노래다. 슈베르트는 음악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저 네가 있어 참 감사하다’고. ‘네가 있어 어려운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고. 나도 슈베르트의 음악에 똑같은 고백을 얻는다. 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낸 여러분도 곧 똑같이 행복한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park72@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