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320년 전에 그린 ‘탐라순력도’ 뚫고 나온 제주의 싱싱한 몸짓

제주도립무용단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 박수갈채
3일 첫 공개에 “웰메이드 창작의 표본” 찬사 러시

김일환 기자 승인 2022.12.06 08:25 | 최종 수정 2023.03.20 10:20 의견 0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제5장은 ‘싱그러운 생명의 향’이다.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 과일인 귤을 모티브로 했다. 수확이 한창인 지금 시즌과도 딱 들어맞는다. 장소는 새콤달콤 향기 진동하는 귤밭이다. 열명 남짓의 여성 무용수가 송글송글 땀방울 흘리며 잘 익은 귤을 딴다. 통일된 손짓 하나에 “밥 먹었수꽈?” 재잘재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똑같은 동작의 발짓 하나엔 “폭삭 속았수다(고생 많으셨어요)”라며 힘든 노동을 이겨내는 마음도 읽힌다. 바구니에 쉬지 않고 열매를 넣지만, 실상 그들이 담고 있는 것은 젊음이다. 싱싱한 생명이다. 배꼽 살짝 드러나는 짧은 웃옷이 노란 풍요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살짝 심쿵도 하다. 탐라의 여인들은 늘 이렇게 생명을 품어내며 끈질긴 역사를 이어왔다.

이어 장구가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검정 웃옷에 파랑, 초록, 분홍 치마를 입었다. 왼쪽과 오른쪽, 위쪽과 아래쪽을 번갈아 내달리며 춤을 춘다. 쿵더쿵 소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무용수의 스텝은 오히려 그보다 더 빠르다. 이쯤 되면 축지법의 경지다. 원톱 무용수의 나홀로 빙빙빙은 미친 속도감을 뽐낸다. 상체에 매달려있는 장구를 한 바퀴 휙 돌리는 솜씨에 깜놀한다. 사선과 직선을 번갈아 비추는 조명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장구춤은 객석을 후끈 달궜다.

제주도립무용단이 한방을 터뜨렸다.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이 웰메이드 창작무용의 표본이라는 찬사와 함께 박수갈채를 받았다. 3일 오후 제주문예회관에서 초연의 순간을 함께한 관객들은 “대단하다” “또 보고 싶다” “서울서도 통한다” 등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가득했다.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잠시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1702년 11월 말, 조선 숙종 28년이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제주 곳곳을 돌아보는 순력을 떠난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가 관할지역을 직접 두루두루 살펴보는 순회를 한 것. 이때 화공 김남길이 동행해 사진 찍듯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채색화첩이 바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다. 국립제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가로 41.5cm, 세로 51.5cm의 ‘탐라순력도’는 이듬해인 1703년 봄에 완성됐다. 그림 41면과 서문 2면 등 총 43면으로 구성됐다. 그림 41면은 순력 장면을 담은 28면, 평상시의 행사 장면을 담은 11면, 제주도와 주변 도서 지도인 ‘한라장촉’, 후에 덧붙여진 ‘호연금서’ 1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인 김혜림은 이 화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320년 전 그림에 단편적으로 묘사된 연회 장면 속 춤사위들이 실제 어떤 몸짓으로 진행됐을지 궁금했다. 당대의 모습에 상상력을 덧칠해 ‘제주춤의 원형’을 구현해냈다. 우리 민속춤을 바탕으로 해녀, 말테우리(말을 돌보거나 키우는 사람) 등 제주의 생활상을 현대적 관점의 춤으로 재해석했다. 그래서 컨펨포러리(contemporary, 현대의·유행하는)라는 수식어가 작품 앞에 붙는다. ‘탐라순력도’에서 11면의 그림을 고르고, 그것을 다시 춤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일곱 장면(프롤로그, 제1장~6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맨 뒤에 에필로그를 달았다.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막이 오르자 프롤로그 ‘바람으로 이어진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공 김남길이 큰 붓을 들어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면서 시작된다. 제주의 바람이 화공의 손끝을 스치자 순환의 길이 열린다. 바람이 320년 전 기억을 데려오면 어제와 오늘의 섬이 이어진다. 순력도의 ‘한라장촉’에서 얻은 느낌과 감동을 표현했다. 작품의 핵심 주제는 ‘순환’이다. 화공이 그려나가는 제주 모습을 시작으로 탐라순력도에 담긴 기억 속 순환이 단순 반복이 아닌 과거에서 현재로 끝없이 순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1장 ‘푸른 유리의 바다’는 순력도의 ‘병담범주’를 풀어냈다. 돛에 용이 그려진 흰 배가 물살을 헤치고 들어온다. 용두암 근처의 용연에서 뱃놀이가 시작된 것. 바다 색깔 닮은 푸른 옷을 차려입은 여자 무용수들이 일사불란 선유락 춤사위를 선보인다. 이어 해녀들이 테왁(물질할 때 쓰는 부력 도구)을 들고 역동적인 모습을 선사한다. 그물망엔 뿔소라와 해삼 등이 가득하리라.

2장은 ‘다시 염원하는 평안’. 거대한 원 모양의 장치가 무대 한가운데로 내려온다. 고리에 흰 천을 감싼 형태인데, 그 위로 붉은색이 가득하다. 해돋이를 상징한다. 남자 무용수들이 여명을 헤치고 올라오는 빛을 배경 삼아 활력 넘치는 동작을 선보인다. 성산에서 본 일출의 장관을 그린 순력도의 ‘성산관일’이 무대에 구현된 것. 태양이 광명을 비추듯 평안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태평무로 이어진다.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선비는 산방산의 시원스러운 풍광에 취해 술을 마신다. 세상을 넓은 마음으로 품으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남자들의 호연지기에 화답해 여인들은 구음검무로 상생을 기원한다. 3장 ‘풍광에 취한 풍요’는 순력도의 ‘산방배작’을 형상화했다.

4장은 ‘시간의 함성’이다. 남자 무용수가 무대 한가운데서 12발 상모를 돌린다. 휙휙 소리를 타고 신명이 퍼져나간다. 폭포 사이로 시간의 빛줄기가 뻗는다. 그 빛줄기 안에 선무도를 하는 이들이 땅의 기운을 유유히 밟고 지나가자, 제주의 들판에 넘치는 말몰이꾼의 함성이 시간의 사이를 웅장하게 메운다. 말총을 든 사내들의 움직임이 힘차다. 에너지가 넘친다. 순력도 중 ‘천연사후’ ‘별방조점’ ‘산장구마’에서 힌트를 얻었다.

‘귤림풍악’을 묘사한 5장 ‘싱그러운 생명의 향’에 이어 6장 ‘제주 천고, 영원의 울림’도 역시 다이내믹했다. 순력도 중 ‘정의양로’ ‘제주양로’를 묘사했다. 30개가 넘는 북을 무용단원들이 직접 연주했고, 그 안에서 전통 관악기와 타악기가 흥겨움을 주도했다. 난타 빰치는 거대한 사운드가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제주의 기억이 후대로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둥둥둥 소리에 실려 하늘로 향했다.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공연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에필로그 ‘순력, 다시 순환하는 기억’은 차분했다. 순력도 가운데 ‘호연금서’를 풀어낸 장면이다. 화공을 태운 배가 멀어져간다. 이어 홀로 남은 화공은 배 위에 앉아서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원을 가운데 두고 한편에는 조선의 화공이 앉아있고, 또 반대편엔 21세기 현대인들이 자리해 있다. 320년 전 예술가가 남긴 기록이 오랜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예술가에 의해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둥그런 원은 ‘해’ ‘달’ ‘은하수’를 상징하며 순환을 더 극대화하는 중요장치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김혜림 예술감독은 “320년의 세월 동안 그림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전해오고 있는 ‘탐라순력도’를 보는 것은 옛사람들이 어떻게 제주를 기억하는가를 보는 것이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제주를 볼 때 어떤 것을 기억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지점과 같다”고 밝혔다. 첫술에 배부를수는 없는 법. 김 감독은 “한해에 그치는 작품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연속성을 두고 리뉴얼되고 재공연되는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뒷이야기> 한 사람 한 사람의 땀방울이 모여 만든 ‘협업 순력’

제주도립무용단이 3일 제55회 정기공연으로 컨템포러리 전통무 ‘순력(巡歷)’을 공연한 가운데, 오영훈 제주지사와 김태관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제주도립무용단 제공


하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아름다운 협업의 과정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순력’ 역시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숨어있다. 김정학 전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은 협력연출을 맡았다. 그는 ‘처용무’ ‘태평무’ ‘한량무’ 등의 이수자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의 지도로 ‘병담범주’에서 선유락이, ‘성산관일’에서 태평무를 선보였다. 제주 출신의 스타 무용가인 국립무용단 김미애도 특별지도로 힘을 보탰는데, ‘산방배작’에서 구음검무를 소개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제주의 전통연주를 지키고 있는 고석철은 제주 무속굿에 쓰이는 연물북을 가르쳐 웅장한 사운드를 뽑아냈다.

제주도립무용단은 제주문화예술진흥원의 산하 단체다. 지난 10월 초 취임한 김태관 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은 무용단에 많은 애정을 쏟고 있다. 그는 “이번 초연은 제주의 보물 ‘탐라순력도’를 기반으로 제작된 공연이다”라며 “현대예술과의 협업을 통해 제주 전통문화 콘텐츠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업으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영훈 제주지사도 끝까지 공연을 관람하며 큰 힘을 실어줬다. 제주지사가 문예진흥원 주최 공연에 참석한 것은 거의 3년만이다. 오 지사는 원래 다른 일정이 있었는데 도립무용단의 초연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럼 응원을 가야조”라며 스케줄을 조정했다는 후문이다. 커튼콜 때는 무대에 올라 제주도민에게 직접 인사를 하며 ‘문화예술 도백’의 모습을 보여줬다.

/kim67@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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