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유 ‘인종차별 울컥’...“눈앞에서 문 닫았지만 굴하지 않고 열고 들어갔죠”

“브루흐·바흐 협주곡은 제 감정 표현한 소중한 곡들”
바실리 페트렌코 지휘 로열 필하모닉과 음반 발매

“외국서 오래 살았지만 계란말이 도시락 싼 한국인”
음주 지휘자가 망친 8세때 첫 협주곡 연주 기억 남아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1.27 16:13 | 최종 수정 2023.01.27 16:37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막스 브루흐와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담은 새 앨범 ‘바버, 브루흐’ 발매기념 간담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브루흐는 28세 때, 바버는 29세 때 협주곡을 만들었어요. 지금 제 나이와 비슷한 시기였죠. 그만큼 현재 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하고 가까운 곡들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28)가 막스 브루흐와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담은 새 앨범 ‘바버, 브루흐’를 발매했다. 일곱 번 째 음반으로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선보였다. 지난해 서울시향을 객원 지휘한 바실리 페트렌코와 그가 상임지휘자로 있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PO)가 함께했다.

에스더 유는 26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가진 음반 발매 간담회에서 “브루흐 협주곡 1번 g단조는 어려서부터 사랑했던 곡이라 꼭 넣고 싶었고, 바버는 최근에 알게 됐지만 오래전부터 만났던 것처럼 친숙하다”며 “팬데믹 이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힐링곡들을 녹음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두 곡 모두 저에게 특별히 불꽃이 일어나는 곡이다”라며 “작곡가가 의도한 바이올린 소리와 표현의 범위에 깊이 공감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음반은 에스더 유의 풍성한 문화적 배경이 든든한 힘이 됐다. 미국에서 출생해 유년기를 보낸 뒤 벨기에·독일·영국에서 공부하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독일 낭만주의의 보수적 전통을 고수한 브루흐와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미국적 선율을 품은 바버의 작품을 자신만의 또렷한 목소리로 담아냈다.

에스더 유는 간담회에 앞서 수록곡 중 하나인 앙리 비외탕의 ‘미국의 선물’을 들려줬다.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외탕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동요 ‘양키두들’을 듣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다. 1704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프린스 오볼렌스키’는 과감하면서도 유쾌한 비르투오소적 연주를 뿜어냈다.

“미국적인 멜로디가 가득한 곡이에요. 어릴 적 아빠랑 차를 타고 여행을 갈 때마다 카세트테이프로 들으며 함께 노래하곤 했어요. 제게는 스토리가 있는 곡이죠. 그래서 녹음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막스 브루흐와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담은 새 앨범 ‘바버, 브루흐’ 발매기념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에스더 유는 2018년부터 로열 필의 상주음악가로 활동하며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로열 필을 이끌고 있는 페트렌코와는 이번이 첫 공동 작업이다. 녹음은 유쾌하게 진행됐다.

“페트렌코는 오랫동안 존경해온 마에스트로죠. 음반을 작업하며 이번에 처음 만났어요. 음악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었고 에너지와 유머가 넘쳐요. 창문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밖에 오랫동안 나가지도 못하고 녹음해 다들 힘들어했는데, 페트렌코가 분위기를 많이 띄워줘 즐겁게 녹음할 수 있었어요.”

뉴욕에서 태어난 에스더 유는 여섯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 뉴욕 스즈키 스쿨에 다녔다. 부모와 함께 와서 레슨을 받는 학교였는데 아빠와 엄마가 맞벌이로 바빴기 때문에 혼자 다니게 됐다.

“부모님이 늦게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자 학교에 남아 있었어요.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제 연주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됐죠. 부모님이 너무 늦을 때면 선생님 댁에 가서 밥도 같이 먹고 잠까지 잤어요. 음악과 더욱 가까워졌죠.”

벨기에로 이주한 뒤에는 교회나 학교 등에서 다양한 연주 경험을 쌓았다. 예술계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업에 대한 욕심도 드러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16세 때 참가한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하면서부터다. 경연 참가 이유가 재미있다. 당시에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배우고 있었는데 “결선에 오르면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 있다”는 규정을 보고는 참가했다고 한다.

이후 지휘자 로린 마젤은 18세의 에스더 유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한국 및 중국 투어 협연자로 낙점했다. 2014년에는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남미 5개국 공연을 함께 했다. 아슈케나지·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시벨리우스, 글라주노프 협주곡’(2015)과 ‘차이콥스키 협주곡’(2017) 등 두 장의 음반을 DG에서 발매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막스 브루흐와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담은 새 앨범 ‘바버, 브루흐’ 발매기념 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실내악에도 애정을 기울이고 있다. 피아니스트 장 주오·첼리스트 나렉 하크나자리안과 ‘젠 트리오’를 결성해 ‘브람스·드보르자크 트리오’(2017) ‘버닝 스루 더 콜드(Burning Through the Cold)’ 앨범을 내놓았다. 올 하반기에는 젠 트리오 내한공연도 추진 중이다.

에스더 유는 ‘팔방미인’이다. 클래식 장르뿐 아니라 영화음악과 현대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국 영화 ‘체실 비치에서’(2018) 오리지널사운드트랙에 참여했고, 또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채드 로슨의 음반 ‘브리드’(2002)에도 힘을 보탰다.

“‘체실 비치에서’ 영화음악을 맡은 작곡가가 라디오에서 제 연주를 듣고는, 제게 연주를 맡기면 좋겠다고 했대요. 영화는 음악보다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이 우선이잖아요. 그 감정을 관객들이 음악으로 어떻게 느끼게 할지 고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음악의 자양분으로 삼을 생각이다.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뭘 했겠느냐는 질문에 “변호사가 됐을 수도 있다. 심리학자가 될 수도 있었다”면서 “세상을 폭넓게 알아가는 것이 음악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도 공개했다. 여덟 살 때 처음 벨기에서 협주곡을 연주했다. 멘델스존의 곡이었다. 지휘자에게 문제가 발생했는데 자신이 수습했다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기분이 나빠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휘자 선생님이 음주를 하고 포디엄에 올랐어요. 결국 사고를 쳤죠. 페이지를 너무 많이 넘겨 악보가 뒤죽박죽돼 지휘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됐어요. 음악이 갑자기 공중에 붕 떴어요. 모두들 허둥지둥 진땀을 흘렸어요. 어렸지만 침착하게 그냥 연주했어요. 심지어 플루트 파트 등과 눈빛을 교환하며 호흡을 맞췄어요. 사실상 지휘자 역할도 겸한 셈이죠.”

현재 아시아인의 음악적 위상이 많이 높아졌지만 에스더 유는 ‘안좋은 경험’도 털어 놓았다. 인종차별을 당했다. 스무 살을 넘겼을 때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제법 큰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도 촉촉해했다.

“로열 패밀리가 방문했어요. 공연을 마친 뒤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차례대로 입장했는데 제가 마지막 순서였어요. 그런데 제 앞에 있던 사람이 자신은 입장하더니 제 코 앞에서 아예 문을 닫아버렸어요. 정말 황당했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을 밀고 들어가 인사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막스 브루흐와 사무엘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담은 새 앨범 ‘바버, 브루흐’ 발매기념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외국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에스더 유는 집에서 쓰는 한국 이름이 ‘지연’이라며 말했다. 커가면서 점차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해진다고 강조했다.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으며 한국인임을 느껴요. ‘시원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어려서도 제1 언어는 한국어였고, 밥과 계란말이를 도시락으로 싸서 들고 다녔어요. 외국에서 된장찌개를 파는 곳이 별로 없어 제가 직접 끓이기 시작했는데, 외국 친구들도 만들어 달라며 좋아합니다.”

앞으로의 연주일정 계획을 밝혔다. 우선 29일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에서 이번 앨범 수록곡인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한다. 이후 해외 활동을 바쁘게 이어간다. 다음달 태국 방콕을 비롯해 독일, 콜롬비아 등에서 연주한다. 페트렌코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투어를 진행한다. 가을엔 호주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데뷔 무대를 갖고 뉴질랜드에서도 첫 무대에 오른다.

“너무나 사랑하는 음악을 계속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며 감정이 더 깊어지는데, 이를 음악에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죠. 꾸준히 다양한 음악에 도전하고 싶어요.”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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