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서대문 형무소의 독방이다. 독일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1967년 벌어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된다. 동백림(동베를린)을 왕래하던 문화예술계 인사와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200명 가량을 구속한 사건이다. 야만의 시대에 처참하게 인권이 짓밟힌 아픈 역사다.
윤이상은 600일 동안을 갇혔다. 높은 담벼락 안에서도 함께 수감생활을 한 천상병 시인·이응노 화백과 교류(실제로 세 사람은 교도소 안에서 만난 적은 없다)하며 오페라 작곡에 몰두한다. 한때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하자 교도소 측에서 작곡하는 것을 허용해줬다. 어둠 속에서 찾아온 한 줄기 빛이다. 윤이상은 마침내 완성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악보를 들고 서서히 일어선다. 그리고 노래한다.
“한 평 독방에 갇혀 벽을 마주한 채로 / 나비의 꿈 노래하는 오페라 쓴다 / 백년의 빛과 어둠 한갓 나비 꿈이던가 / 육신은 마디마디 부서지고 영혼은 깨어져 흩어진다 / 아픈 육신을 달래고 분노마저 어루만져 / 상처로 얼룩진 내 여혼 담은 오페라 쓴다 / 마지막 음까지 다 쓰고 나면 나비처럼 자유롭게 / 내 고향 통영 앞바다 하얀 갈매기 되어 훨훨 날으리라 / 훨훨”
바리톤 장철이 윤이상이 되어 ‘한 평 독방에 갇혀’ 아리아를 부르자 결코 꺾이지 않은 거장의 예술혼이 콘서트장을 가득 채웠다. 윤이상이 다시 살아나 우리 앞에 섰다. 2막 11장으로 구성된 나실인 작곡의 오페라 ‘나비의 꿈’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뭉클하다.
‘나비의 꿈’은 1969년 2월 독일 뉘른베르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됐다. 먼저 교도소에서 나온 부인이 악보를 들고 독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곡가는 초연 자리에 없었다. 12일 후, 윤이상은 가석방 되어 베를린의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장수동 예술감독이 이끌고 있는 서울오페라앙상블은 지난 3일 푸르지오아트홀에서 ‘봄이 오늘 길목에서’라는 제목으로 신춘음악회를 열었다. 공연 제목 위에 ‘창작오페라 나비의 꿈 작품집 출간기념 음악회’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다. 그래서 2부를 ‘나비의 꿈’ 오페라 갈라 무대로 꾸민 것. 전체를 모두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주요 장면을 적절하게 뽑아내 전막 공연을 본 느낌이다.
1994년 창단한 서울오페라앙상블은 ‘우리의 얼굴을 한 한국오페라의 세계화’라는 모토로 꾸준히 창작오페라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13편의 창작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값진 성과다. 그 중 하나가 ‘나비의 꿈’이다.
2017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대본을 수정 보완하고 기존 음악을 편곡하거나 새로 작곡한 부분을 추가해 2022년 다시 무대에 올려 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이 작품이 윤이상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있지만, 선배(장수동 감독)는 후배(나실인 작곡가)에게 이토록 멋진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노력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성을 들여 ‘나비의 꿈’ 작품집을 출간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작품집 헌정 행사를 열렸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소프라노 정시영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역을 맡아 ‘눈 감으면 지금도 들려요’를 불렀다. “눈 감으면 지금도 들려요. 그 첼로소리 / 그 소리 찾아 무작정 걸어갔죠. 저 복도 끝까지 / 그땐 몰랐었죠. 참 철없었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 그 소리에 날 맡겼죠. 당신의 목소리 / 그 음성 날 깨닫게 했죠. 우린 함께 라는 걸 / 눈 감으면 지금도 떠올라요. 내 손을 꼭 잡아주던 / 그 따뜻한 손 그 설렘. 사랑을 느꼈어요.” 남편을 만나는 면회 장면에서 부르는 아름다운 러브송이다. 오페라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흑장미를 들고 노래한다.
장철과 정시영의 이중창 ‘내 맘 속에 솟아나는 말 있어’와 전체 출연자(바리톤 장철·소프라노 정시영·메조소프라노 김난희·테너 유태근·바리톤 최정훈·테너 최재도·바리톤 임창한)의 합창 ‘통영 밤바다’도 오랫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피아니스트 김보미가 반주를 맡았다. 윤이상은 끝내 그리워하던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995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1부는 ‘봄의 왈츠’라는 제목으로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담은 다양한 노래를 선물했다. 노래도 노래지만 무대 스크린에 푸른 초원, 흐드러진 꽃, 햇빛 머금은 숲속 등 봄의 정경이 끊임없이 펼쳐져 눈도 호강을 했다.
소프라노 이효진·정꽃님·김은미·정시영·이소연·김채선, 테너 김중일, 바리톤 왕승원 등 정상의 성악가들이 슈베르트, 토스티, 슈만, 차이콥스키, 구노 등이 작곡한 봄노래를 들려줬다. 모든 노래에서 벚꽃향이 났다. 가끔 쑥냄새도 올라왔다. 4월과 5월이 이미 가슴으로 들어왔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반주를 맡았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은 ‘나비의 꿈’을 못 본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오는 24일(금)과 25일 그동안 공연했던 창작오페라 12편을 하나로 묶어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서울 동부권의 다목적 문화공간 소월아트홀 무대에 올린다. 바로 ‘2023 한국창작오페라 갈라 페스티벌’이다.
24일엔 7편을 선보인다. 중국에서 한류 오페라로 거듭난 장일남 작곡의 ‘춘향전’, 조선화가 윤두서의 삶을 조망한 고태암 작곡의 ‘붉은 자화상’, 전쟁의 참화를 나무를 통해 노래한 안효영 작곡의 ‘장총’, 1999년 출범한 서울소극장오페라축제의 시작을 알렸던 세태풍자 오페라인 김경중 작곡의 ‘둘이서 한발로’를 공연한다. 이밖에 ‘보석과 여인’(박영근 작곡) ‘백범 김구’(이동훈 작곡) ‘서울*라보엠’(번안오페라)도 기대된다.
25일엔 5편의 작품을 만난다. 나실인 작곡의 ‘나비의 꿈’, 아이의 눈으로 지구촌의 기후변화를 경고했던 신동일 작곡의 ‘빛아이 어둠아이’, 고전소설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근형 작곡의 ‘운영’뿐만 아니라 ‘취화선’(이근형 작곡) ‘굿모닝 독도’(신동일 작곡)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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