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출신의 DG 간판스타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마친 뒤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와 포옹을 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오스모 벤스케가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포디움 위에 꼿꼿이 설 수 없어 좌우로 편하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회전의자에 앉아 지휘봉을 들었다. 지난해 12월 불의의 낙상 사고 후유증이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골반과 오른쪽 어깨가 부러져 침대에 오래 누워있었다”며 “의사들은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6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다행히 회복 속도가 빨라서 기쁘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중상으로 연말 공연이었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를 못한 채 3년 임기를 마무리했다. 예정된 공연은 취소할 수 없어 김선욱이 대타 지휘했다.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서의 굿바이 무대였는데 불발돼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비록 ‘객원 지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지만 벤스케가 뒤늦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24일과 25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임기 중 시작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공연을 열었다. 세계적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DG)의 간판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도 이틀 동안 함께 했다. 25일 공연을 감상했다.
첫 연주곡은 ‘카렐리아 모음곡(Op.11)’. 시벨리우스의 신혼여행에서 잉태된 곡이다. 현재의 러시아 북서부와 핀란드 남동부에 걸쳐있는 카렐리아 지방은 북유럽의 역사적 성지이자 핀란드 민족 문화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시벨리우스는 이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음표로 담았다. 능숙함과 세련미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색채와 진정성, 그리고 민족적 감정이 가득한 곡이다.
벤스케의 지휘로 경쾌한 행진곡풍의 ‘간주곡’으로 출발해, 중세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유래한 ‘발라드’로 이어지고, 활달한 ‘행진곡풍’으로 마무리됐다. 1악장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북유럽의 서늘한 감성을 유발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2악장은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조화를 이루며 토속미를 뽐냈다. 벤스케는 볼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벙긋벙긋 입술 지휘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중간 부분 오보에 솔로는 아름다웠다. 3악장에선 장쾌한 음색으로 행진곡 특유의 흥겨운 매력을 펼쳐냈다.
조지아 출신의 DG 간판스타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조지아 출신의 DG 간판스타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린은 시벨리우스의 악기다. 한때 바이올린 전문 연주자의 꿈을 키웠지만 20대 후반에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는 포기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평생 가장 친근한 악기로 남았다.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한곡만 작곡했다. 바로 ‘협주곡 d단조(Op.47)’다. 1903년과 1904년에 걸쳐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초연 무대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1905년 작품을 대폭 수정해 ‘개정판’을 마련했다. 한결 정돈된 구성에 교향악적 색채를 강화한 이 버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조지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바티아슈빌리는 진달래 색깔 닮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개정판을 연주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드레스가 아니라 발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 걸음걸이가 더 가뿐해 보였다. 1악장은 어느 겨울 아침, 강원도 산골 계곡 얼음 밑을 차갑게 흐르는 맑고 투명한 물 같았다. 과장되지 않고 담백했다. 2악장은 오보에·클라리넷·호른·바순이 얼려 놓은 얼음 위로 바이올린이 미끄럼을 탔다. 3악장은 담백한 웅장미가 일품이었다.
바티아슈빌리는 앙코르 곡으로 핀란드 민요 ‘저녁 노래’(야르코 리히매키 편곡)와 조지아 출신 작곡가 알렉시 마차바리아니의 ‘돌루리’를 연주했다. 특히 ‘돌루리’에서는 열정적인 속도로 질주하는 스킬을 선보여 환호를 받았다. 관객을 향해 손키스를 날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조지아 출신의 DG 간판스타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조지아 출신의 DG 간판스타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교향곡 6번을 작곡할 당시 시벨리우스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술·돈·가족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어, 인생의 어떤 교차점에 있었던 시기였죠. 그는 인생에서 계획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을 겁니다. 마치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그것을 만질 수 있을지, 플랜을 실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당시 거의 60세가 다 되었던 나이도 위기의식에 한몫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환경들이 2번 교향곡과는 완전히 다른 단순한 곡을 탄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6번 교향곡이 칵테일이나 위스키가 아닌 순수한 생수 같기를 바란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한 ‘교향곡 6번에서는 첫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의 이런 표현을 무척 좋아해요.”
벤스케의 말처럼 ‘교향곡 6번(Op.104)’은 목가적인 북유럽의 정취를 담고 있다. 벤스케와 서울시향은 작품 본연의 캐릭터인 소박함을 잘 드러냈다. 갓 지은 쌀밥 같았다. 반찬 없어도 밥 하나 만으로도 단맛이 났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가운데 유독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작품으로 통한다. 살짝 깃든 종교적 색채와 명상적 분위기도 효과적으로 포착해냈다.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6번 연주를 마친뒤 관객에게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6번 연주를 마친뒤 관객에게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앙코르는 없었다. 벤스케는 지난 3년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준 팬들에게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단원들과 함께 왼쪽과 오른쪽 사이드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몸을 돌려 따로 인사도 했다. 뭉클한 장면이다.
벤스케는 30일과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시벨리우스 사이클을 계속 이어간다. 핀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엘리나 베헬레는 바이올린 협주곡 오리지널판을 연주한다. 오리지널 버전은 개정판과 달리 카덴차가 2개로 구성돼 독주의 풍미를 더한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교향곡 2번을 연주해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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