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장면 하나. 2막이다. 인간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세 마녀가 붉은 바구니에서 칼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꽂는다. 어느새 무대는 단도로 가득 찼다. 관객은 눈치 챈다. 곧 피비린내 진동하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어 자객 30여명이 등장한다. 칼을 집어 들고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타깃을 기다린다.
맥베스의 절친인 방코(베이스 박종민 분)가 천천히 나온다. 닥쳐올 검은 그림자를 예감하고 있었을까. 걸음걸이가 한없이 무겁다. 스산한 바람도 부는 것 같다. “방코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다”라는 마녀들의 예언이 꺼림칙해 맥베스는 킬러들을 보냈다. 방코를 죽여라 미션을 내린 것. 이미 던컨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지만,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끝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악행을 저지른다.
방코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는 듯 비통함과 비장함이 뒤섞인 노래를 부른다. 묵직하다. ‘오 아들아 조심히 가거라...하늘에서 어둠이 내려오듯(Studia il passo, o mio figlio!...Come dal ciel precipita)’이다. 베이스라면 한번쯤 탐내고 싶은 최애곡 중 하나다.
“오 나의 아들아 조심히 가거라! / 이 어둠에서 나가자꾸나 / 슬픈 예감과 의심으로 가득한 내 가슴 속에 /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지는 구나” “점점 더 칠흑 같은 어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구나! / 오늘 같은 밤에 그들은 나의 왕 던컨을 찔렀지 / 수천 개의 불안한 생각이 나에게 불행을 알리고 / 내 마음은 악령과 공포로 가득 하구나”
방코가 절절한 아리아를 토해내는 동안 자객들이 한명씩 다가와 등을 찌른다. 어떤 킬러는 깊숙이 배를 찌르기도 한다. 무차별 공격을 받는데도 노래는 계속된다. 실제로는 피 한 방울 튀지 않는데도 30여명이 차례대로 칼을 꽂는 장면은 비극의 크기를 30배 더 크게 만들었다. 참혹함을 이렇게 세련되게 극대화하는 연출이 놀랍다. 디테일이 살아있다.
국내에서 정식으로 오페라 데뷔한 박종민의 노래는 빛났다. 빈 국립오페라에서 7년간 전속 주역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2020년 프리랜서 선언 이후에도 수많은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2027년까지 공연 일정이 빼곡할 정도로 해외 무대에서 사랑받고 있다. 마침 국내 팬들에게 첫 선을 보일 시간이 생겨 이번에 합류했다.
#장면 둘. 4막이다. 레이디 맥베스(소프라노 임세경 분)가 등불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온다. 몽유병에 걸려 밤마다 방황한다. 극심한 신경쇠약과 정신착란도 앓고 있다. 의사와 시녀가 그를 지켜보며 걱정한다. 등불을 내려놓고는 손을 비비며 무엇인가를 지우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없어지지 않는다. 바로 던컨 왕의 핏방울이다.
“얼룩이...아직도 여기 있어 / 없어져, 이 저주 받은 것아 / 하나...둘...지금이 없앨 시간이야 / 당신 떨고 있소 / 들어갈 엄두가 안난다고 / 전사기 이렇게나 비겁하다고 / 오, 창피한줄 알아라 / 당장 서둘러라 / 그 늙은이의 몸 안에 그렇게 피가 많은 줄 누가 상상이나 해겠어”
오케스트라의 슬프고 애잔한 선율에 실려 벨칸토 오페라의 ‘매드신(광란의 장면)’에 견줘도 전혀 꿇리지 않는 ‘몽유병 장면’이 흘렀다. ‘Vegliammo invan due notti...Una macchia e qui tuttoral(이틀 밤을 지켜봤는데 소용없소...얼룩이 아직 여기 남아있어)’라며 약 13분 동안 이어지는 ‘신스틸러’다.
붉은 장갑은 피 묻은 손을 의미한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었는데 레이디 맥베스의 손에서 장갑이 벗겨져 나간다. 지독한 운명이 이제야 끝났음을 상징한다. 역시 세밀함이 반짝이는 연출이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눈 모양의 깊은 터널로 서서히 빠져들어 간다.
임세경은 음역의 폭이 넓은 배역을 맡아 ‘역시 임세경’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높은 음과 낮은 음 모두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닦달해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악마의 모습에선 비열함을 제대로 드러냈다.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국민 악녀’다.
#장면 셋. 역시 4막이다. 맥베스(바리톤 양준모 분)는 왕관을 차지했지만 늘 불안하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매일 매일이 지옥이다. 넓은 무대 위에 덜렁 놓여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폼이 위태위태하다. 반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Perfidi! All’anglo contro me v’unite!(반역자들! 감히 나에게 대항을 해!)’라며 콧방귀를 뀐다. 결코 나는 패하지 않을 것이라며 큰소리친다. 하지만 왠지 지쳐 보인다. 약함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그리고는 한손에 왕관을 들고 회한의 노래 ‘Pieta, rispetto, amore(자비도, 존경도, 사랑도)’를 부른다. “자비, 존경. 사랑도 / 하루의 끝에 해질녘의 위로도 / 한 송이의 꽃도 / 그대의 스러지는 세월 위에 뿌리지 않을 것이다 / 네 비석에 달콤한 말이 쓰일 거라 기대하지 말라 / 아! 오로지 저주만이, 아! 불행한 이여! / 장송곡이 네 것이 되리라”
양준모가 ‘장송곡이 네 것이 되리라’라며 마지막 부분을 아주 길게 부르자 긴 박수 소리가 쏟아진다. 이날 공연의 원픽이다. 마녀들은 맥베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색 옷을 벗긴다. 그의 운명도 이렇게 끝났다. 맥베스 역시 눈 모양 터널 끝으로 사라진다.
양준모는 이번이 네 번째 맥베스 프로덕션이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하던 2011년과 2015년에 독일에서 맥베스를 연기했다. 2016년에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에 맞춰 서울시오페라단이 제작한 ‘맥베드’에 출연했다. 공연에 앞서 양준모는 “강한 남자가 아닌 겁이 많은 남자로 맥베스를 표현하겠다”고 밝혔다. 부인 레이디 맥베스가 오히려 더 표독스럽게 느껴졌으니 새로운 캐릭터 창출에 성공한 셈이다.
양준모, 신세경, 박종민 등 톱클래스 성악가들이 출연한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오페라 ‘맥베스’가 27일 무대에 올랐다. 3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네 차례 관객을 만난다. A팀이 출연한 개막공연과 B팀이 출연(이승왕, 에리카 그리말디, 박준혁)한 프레스 리허설을 감상했다.
연출을 맡은 파비오 체레사의 스킬이 단연 돋보였다. 이미 ‘오를란도 핀토 파초’(2016년)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2022년)를 통해 팬들을 사로잡은 그는 무대디자이너 티치아노 산티, 의상디자이너 주세페 팔렐라와 환상의 케미를 이뤘다.
중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대가 어두침침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조명이 밝았다. 눈의 피로가 줄어들어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바리톤과 베이스가 주역을 맡고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음악은 헤비했지만,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소리가 아니라 올라 갈 때는 확실하게 올라가는 소리였다. 베테랑들의 힘이다.
막이 오르자 무대 한가운데 ‘거대한 운명의 눈’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빠트리지 않고 지켜보는 CCTV같다. 4막이 끝날 때까지 입체적 장치는 한자리를 지키지만, 수시로 변화를 줬다. 마치 눈을 깜박거리듯, 장면이 변할 때마다 감고 뜨는 효과를 줘 지루할 틈이 없다. 색다른 경험이다.
공연에 앞서 체레사는 “삶은 우연에 가까울 까요? 아니면 운명에 가까울 까요? ‘멕베스’는 삶은 운명이라고 이야기한다”라며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운명에 접근하는 방식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말했다.
이런 연출 포인트는 무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됐다. 즉, 맥베스는 왕관이 머리 위에 떨어지는 운명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만 부인인 레이디 맥베스는 왕관에 손을 뻗어 쟁취하는 운명을 재촉한다. 또한 신화에서 사람의 삶은 가느다란 실로 연결돼 있다고 하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운명을 연결하는 붉은 끈이 죽음의 순간에는 탁 끊어지게 연출했다.
‘눈 모양의 터널’도 운명을 상징한다. 터널 안으로 우리의 삶은 흘러가고, 죽음을 맞이할 때 눈의 역할도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맥베스 부부의 의상 변화. 처음 두 사람이 입고 나온 새하얀 의상은 핏자국으로 얼룩지며 점차 붉어지다가 마침내 완전한 빨간빛으로 뒤덮인다. 그와 동시에 황금색도 섞이는데 물질적 욕망을 담고 있다.
지휘자 이브 아벨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음악 호흡도 엑설런트했다. 달콤하고 서정적인 선율은 아니지만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드라마틱한 운명의 전개를 빼어나게 표현했다.
맥베스의 손에 죽은 부인과 아들의 복수를 맹세하며 4막에서 맥더프(테너 정의근·윤병길)가 부르는 아리아 ‘O figli, o figli miei!...Ah, la paterna mano(나의 아들들이여...아 아버지의 손이)’는 뭉클했다. 정권을 빼앗은 맥베스 부부가 2막에서 연회를 벌이는 장면에서 노래하는 ‘Si colmi il calice(포도주로 잔을 채워요)’는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와 비슷한 필을 느끼게 해줬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올해 베르디 탄생 210주년을 맞아 ‘비바! 베르디, 비바! 오페라’ 시리즈를 준비했다. 이번 ‘맥베스’에 이어 ‘일 트로바토레’(6월 22∼25일), ‘라 트라비아타’(9월 21∼24일), ‘나부코’(11월 30일∼12월 3일)로 이어진다.
<뒷이야기>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단장 커피타임까지 열어 적극 홍보
‘맥베스’ 공연을 앞두고 가장 긴장한 사람은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단장 겸 예술감독이다. 지난 2월 14일 취임했다. ‘단장 겸 예술감독’ 타이틀을 달고 첫 선을 보이는 작품인 만큼 세심하게 챙기고 꼼꼼하게 살폈다.
적극 홍보하기 위해 개막 하루 전인 26일 오후 프레스 리허설을 진행했다. 30분 정도 일찍 기자들을 만나 커피타임도 가졌다. 소통하는 단장의 모습을 보여줘 반가웠다. 그는 “직원, 스태프, 성악가 모두가 열심히 준비했다. 한층 더 발전된 무대를 보여줄 생각에 마음이 기쁘다”며 설레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연습과정에서의 뒷이야기도 들려줬다. “연출자가 합창단(노이오페라코러스)에 많은 신경을 썼어요. 특히 여성 합창단원의 동선 하나하나를 코치하더라고요.” “지휘자가 모든 파트를 암보하고 있어 놀랐어요. 족집게 어드바이스를 해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원래 하루에 A팀과 B팀의 리허설을 번갈아가며 하려고 했는데, 전날(25일) 마에스트로가 너무 세밀하게 음악을 만지는 바람에 오늘은 B팀만 리허설을 하게 됐어요. 그 덕분에 성악가들이 하루를 더 쉬게 돼 에너지 충전을 제대로 했어요.”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A팀이 공식 프레스 사진을 B팀에게 양보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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