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지수의 ‘꽃’ 10분 오르간 대곡으로 탄생...올리비에 라트리 즉흥연주 매직

노트르담대성당 오르가니스트 6년만의 내한공연
비도로·프랑크·생상스 등 프랑스 레퍼토리 선사

작곡가 비하인드 스토리 곁들인 해설 귀에 쏙쏙
​​​​​​​신청곡 프린트해온 관객 등 앙코르무대 또 화제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5.17 16:00 | 최종 수정 2023.05.18 00:19 의견 0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올리비에 라트리가 관객들이 적어낸 신청곡 패널에서 즉흥 연주할 곡을 고르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올리비에 라트리가 프로그램북에 적혀있는 다섯 곡 연주를 모두 끝마쳤다. 스태프 한 명이 메모가 잔뜩 붙어 있는 패널을 들고 나왔다. 공연 시작 전 공연장 로비에 ‘올리비에 라트리의 즉흥연주’라는 안내판을 미리 설치했다. 듣고 싶은 곡을 포스트잇 등에 적어 붙이면 이 노래를 활용해 즉석에서 새 곡을 만들어 들려주는 것. 관객·연주자가 협업해서 만드는 이색 앙코르다.

그는 지난 2017년 공연 때 이런 깜짝쇼를 처음 열었다. 팬들이 메모지에 적어낸 멜로디 가운데 ‘애국가’와 ‘카카오톡 알림음’을 골라 다양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변주를 선보였다. 연주 도중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 관객 떼창을 유도해 잊지 못할 진풍경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16일 오후. 세계적 오르가니스트는 6년 만에 다시 선 롯데콘서트홀에서 어게인 즉흥연주를 보여줬다. ‘무슨 곡을 선택할까’ 모두들 두근두근 설렜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신중하게 메모를 살펴봤다. 그냥 작곡가와 곡명만 적은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오선지에 음표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아예 집에서 악보를 프린트해온 ‘정성파’도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인 올리비에 라트리가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가운데 관객들이 라트리가 즉흥 연주할 곡을 신청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올리비에 라트리가 관객들이 적어낸 신청곡 패널에서 즉흥 연주할 곡을 고르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두 장을 골라 오르간 위에 올려놓고 건반을 눌렀다. 첫 곡에서부터 환호가 터졌다. 여성 K팝 그룹 ‘블랙핑크’ 멤버인 지수가 솔로곡으로 발표한 ‘꽃’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예쁜 날 / 꽃향기만 남기고 갔단다 / 꽃향기만 남기고 갔단다” 발매된 지 두 달도 안된 따끈 따근 신상곡이다. 두 번째 곡은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 낳으시고 키우시는 어머님 은혜 /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아”라는 가사의 ‘어머님 은혜’다. 라트리는 ‘황금손’이다. 두 곡 모두 5월에 딱 맞는 초이스다. 거기에 더해 MZ세대와 중장년층을 모두 만족시키는 곡 아닌가.

뚝딱뚝딱 스톱(stop)을 만지며 금세 새 곡을 만들어간다.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아가며 즉석에서 신곡을 뽑아낸다. 이쯤 되면 ‘마법사 라트리’다. 이렇게 해서 ‘꽃’과 ‘어머님 은혜’ 주제에 의한 즉흥곡(Improvisation on the theme of ‘Flower’ & ‘Mother of Grace’)을 작곡했다. 신곡의 탄생과 연주를 실시간로 지켜본 관객들을 박수와 환호를 쏟아냈다. K팝과 동요를 믹스해 10여분이 넘는 ‘대곡’으로 만들었다.

공연에 앞선 인터뷰에서 그는 “즉흥연주는 큰 도전이 필요할 만큼 어렵지만 나중에 청중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는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작곡되며 마지막 음이 끝나면 즉시 사라진다. 아주 근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자기만의 확실한 두 번째 퍼포먼스를 뽐낸 뒤 그는 “유명한 K팝인지 모르고 뽑았다. ‘잇 워즈 오케이(It Was Okay)’다”라고 답했다. 몇 번의 커튼콜 후 다시 오르간 앞에 앉더니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까지 앙코르를 한 곡 더 선사했다. 옆에 연인이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프러포즈하고 싶은 밤을 만들었다.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가 연주를 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라트리는 말이 필요 없는 월드 클래스다. 1984년 최연소 나이인 스물셋에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가 됐다. 이번 공연 연주곡을 정하면서 “저는 뿌리 깊은 오르간의 전통을 가진 프랑스 출신이다”라며 “그래서 프랑스 작곡가인 프랑크, 생상스, 비도르의 음악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프로그램에서 연주되는 모든 작곡가들은 마치 음악 대가족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며 “바그너와 리스트는 세 명의 프랑스 작곡가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첫 곡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중 1막 서곡을 들려줬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모든 악기의 역할을 오로지 연주자의 두 손과 두 발로 구현하는 모습은 숭고했다.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음색을 펼쳐내는 게 놀라웠다.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생활을 즐겼던 프란츠 리스트는 말년에 성직자의 삶을 살았다. 그 때 만든 ‘두 개의 전설’ 중 하나인 ‘새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두 번째 곡으로 연주했다. 성인 프란체스코가 새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해 놓은 곡이다.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의 소리를 고음역의 트릴과 트레몰로로 잘 표현해냈다.

카미유 생상스는 여러 동물의 행동과 습성 등을 음악 이미지로 표현한 ‘동물의 사육제’를 만들었다. 모두 14개의 짧은 악장으로 이루어졌다. 생상스는 생전에 이 작품이 출판되면 진지한 작곡가라는 명성이 금이 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해 출판하지 않았다. 정작 그가 죽은 후 널리 유명해졌다. 그 중 제7곡 ‘아쿠아리움’, 제10곡 ‘큰 새장’, 제13곡 ‘백조’ 세곡을 들려줬다.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가 관객에게 연주할 곡을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라트리의 부인인 오르가니스트 이영신 씨. ⓒ롯데콘서트홀 제공

라트리는 중간 중간 마이크를 잡으며 곡에 대한 해설도 해줬다. 작곡가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곁들일 땐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통역자. 프랑스어로 말을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번역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으리리라. 바로 부인인 이신영 씨다. 그도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다. 라트리가 연주한 ‘동물의 사육제’ 발췌곡이 바로 이영신의 편곡 버전이다.

1부 마지막 곡은 세자르 프랑크의 ‘오르간을 위한 영웅적 소품’. 두 개의 다른 분위기 주제가 번갈아 나오는 순환형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랑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영웅을 떠올리게 하는 극적 분위기(첫 번째 주제)를 지나 고요하고 차분한 무드(두 번째 주제)로 접어들며, 프랑스 교향악적 오르간 악파의 모습을 펼쳐냈다.

2부에서는 오르간의 위치를 왼쪽으로 살짝 틀어지게 바꿨다. 무대를 바라보고 왼편에 앉은 관객들이 연주자의 모습을 잘 볼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친절 라트리다. 곡은 단 한 작품으로만 구성했다. 샤를 마리 비도르의 ‘오르간 심포니 5번’이다.

비도르는 모두 10곡의 오르간 심포니를 작곡했다. 오르간 심포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오르간을 하나의 오케스트라 개념으로 보았다. 3악장은 페달만을 활용한 연주를 보여줘 이채로웠다. 4악장은 고요함 속에서 선율들을 반짝반짝 빚어냈다. 5악장(토카타)은 비도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악장이다.

6년만에 다시 내한공연을 연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가 관객에게 작곡가 비도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라트리는 비도르와 관련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대방출해 풍성한 리사이틀을 만들었다. 비도르가 음악에서는 진지했지만 생활에서는 남다른 유머를 가진 인물임을 증명해주는 일화들이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는 24세에 생 쉴피스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됐어요.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다보니 주위에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임명권자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임시 오르가니스트’라고 발표했습니다. 그 후 깜빡 잊었는지, 공식적으로 ‘임시’라는 꼬리표를 안떼어 주었어요. 그래서 비도르는 나중에 자신을 소개할 때 ‘64년 임시 오르가니스트입니다’라고 말했죠.”

“성당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스폰서를 가끔 초청했어요. 어느날 오르간은 1도 모르는 돈 많은 여자가 ‘어휴 엄청 복잡하네요. 이 많은 건반은 어떻게 쓰나요’라고 말했죠. 그러자 비도르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흰 건반은 결혼식 때 쓰고, 검은 건반은 장례식 때 쓴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이번 라트리의 리사이틀은 그의 말대로 “모든 곡은 오르간으로 연주할 수 있다”를 보여준 무대다. 오르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통과 새로움을 이어주는 브릿지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관객 모두들 음악의 기쁨에 취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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