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로티를 단박에 사로잡은 반주자 홍자윤 “피아노는 제게 선물”

까다롭기로 유명한 성악가 매료시킨 피아니스트
국립오페라단 반주자로 갔다가 피아니스트로 발탁
???????이젠 오롯이 자신만의 색깔 드러내는 독주회 꿈꿔

송인호 객원기자 승인 2023.06.11 09:05 | 최종 수정 2023.06.11 09:14 의견 0
파바로티를 매료시킨 피아니스트 홍자윤은 이제 오롯이 자신만이 색깔을 드러내는 독주회를 꿈꾸고 있다. ⓒ홍자윤 제공


[클래식비즈 송인호 객원기자]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홍자윤은 정말 피아노에 미쳤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가 너무 좋아 밥먹는 것도 잊은 채 피아노를 쳤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당연히 예중·예고를 거쳐 멋진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예중은 커녕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대를 간 것이다. 다들 놀랐다.

“저희 집이 딸만 넷이에요. 저는 그중에서 셋째 딸이고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어요. 피아노가 저의 유일한 친구였죠. 그런데 아빠가 피아노 전공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피아노를 더 잘 치려면 개인 레슨을 따로 받아야 하는데 부모님께서 많이 부담이 되셨나봐요. 자식들 전부 다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저만 음악공부를 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셔서 어쩔 수 없이 저는 공대 전산통계학과를 다녔어요.”

그러나 끼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피아노 건반에 손이 가고 그에 따라 소리가 춤을 추는 것이었다. 심지어 음대를 기웃거리며 피아노 소리에 심취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대학 2학년 때 결국 음악대학 과사무실로 찾아갔다. 복수 전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칙에는 복수전공이 있었지만 단박에 거절됐다. 같은 음대생이면 몰라도 공대생이 음악, 그것도 피아노 전공으로 복수전공을 한 사례가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4학년 때 아빠에게 간곡한 부탁을 드렸죠. 딱 1년만 도와달라고요. 그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한참 후에 그러겠노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음대에 입학할 수 있겠구나라는 감이 오더라고요.”

피아니스트 홍자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 성악가 파바로티를 단박에 사로잡아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했다. ⓒ홍자윤 제공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도 실력이 안되면 음대 입학은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만큼은 확신이 들었다. 중, 고교,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한시도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등록금이 제일 싼 음대를 알아봤죠. 부모님께서 정말 어렵게 도와주시는 건데 제가 등록금이 비싼 학교를 선택할 수 없었어요. 알아보니 서울시립대학교가 그 중 제일 등록금이 싸더라고요. 그래서 지원하고 합격을 했죠. 3학년으로 편입을 했는데 경쟁률이 20대1이었어요.”

사실 20대1의 경쟁률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500대1의 경쟁률이라도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음대에 다니는 2년 동안은 마치 날개를 단 새처럼 높이 솟아올랐다. 거칠 것이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피아노 실기수업 1등을 해냈다. 한없이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래야만 더 멀리 볼 수 있었기에 2년의 시간을 4년처럼 사용했다. 예중·예고까지 합해서 허비한 시간이 10년이다. 이 허비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배우는 모든 것을 물먹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서울시립대에 합격하자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네가 이렇게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줄 몰랐다’고 하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아,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결국 그는 배움에 대한 욕망을 끊을 수 없었고 서울시립대를 졸업하자마자 곧 바로 이탈리아 로시니 국립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에 입학하고 디플롬을 획득했다.

홍자윤은 피아노는 자신에게 ‘선물’이라고 말한다. 피아노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그에게 선물처럼 내려졌으니까 말이다. 이런 선물 같은 일들이 이탈리아에서도 일어났다.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반주를 맡게 된 것이다.


피아니스트 홍자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 성악가 파바로티를 단박에 사로잡아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했다. ⓒ홍자윤 제공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교수님께서 갑자기 내일 피아노 반주를 해 줄 수 있냐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얼마나 급하면 그러나 싶어서 가능하다고 했죠. 세계적인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피아노 반주자를 구한다는 거에요. 순간 놀랍기도 하고 떨렸어요. 제가 세계적인 성악가의 반주를 하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거든요. 다음날 갔더니 거기에 덩치 큰 파바로티가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있더군요.

반주자라고 얘기했더니 옆에 있던 학생이 제게 ‘먼저 온 반주자들 여러 명이 다 짤렸데요’ ‘파바로티가 마음에 안든다고 짤랐데요’라고 넌지시 말하더라고요. 그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긴장이 되는 거에요. 엄청 까다로운 분이구나 싶어서 나는 짤리면 안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시작했는데 파바로티가 바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아리아를 반주하라는 것이에요. 마침 제가 알고 있는 곡이라 그 자리에서 악보도 보지 않고 반주를 했죠.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전 반주자들은 파바로티가 어떤 곡을 요구하면 악보를 주섬주섬 꺼내 펼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한 거죠. 그럼 파바로티는 바로 그만두라고 하는 것이죠. 준비가 안된 반주자라는 거죠. 그걸 저는 악보도 펼칠 시간없이 바로 쳐 내니까 처음에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바로 수업을 하시더라고요.

또 중간에 조를 바꾸기도 해요. 다음 소절에서 반음을 올려라, 어떤 부분에서는 반음을 내려라고 하는 등 그 변화에 잽싸게 대처를 해야 하는데 그전 반주자들은 당황하거나 우왕좌왕 하니까 파바로티의 마음에 안든거죠. 근데 저는 그걸 한치의 동요도 없이 다 반주해 내니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오라고 하더군요. 결국 그 분 돌아가시기 1주일전까지 반주를 해 드렸어요.“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까다로운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대가의 요구에 충족을 시킨다는 것은 평소에도 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랬다. 준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걸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기가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피아노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세계적인 성악가의 반주를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피아노는 그에게 선물이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되니까 제가 향수병에 걸렸어요. 빨리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졸업 연주를 마치고 두달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어요. 그때가 임신 8개월로 만삭이었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었죠. 8개월이 넘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었어요. 도착해서 7월에 아이를 낳았어요.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춘 스케줄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해요.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난리가 나는 거죠.”

피아니스트 홍자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 성악가 파바로티를 단박에 사로잡아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했다. ⓒ홍자윤 제공


서울시립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성악도였다. 두 사람은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5일 만에 신혼여행을 이탈리아 유학으로 시작했다. 유학시절은 일분일초도 아까웠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마냥 허비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로시니 국립음악원을 만점으로 졸업했다. 또 한국인 최초로 산타 체칠리아 기념음악회 오케스트라 협연을 했다. 이 모두가 피아노에 미친 덕분이다.

한국에서 그의 반주실력이 다시금 빛을 발한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성악가들 오디션을 진행할 때 요청이 와 반주를 하러 갔다. 거기에서 그는 다른 반주자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객원 피아니스트로 발탁이 돼 국립오페라단 작품 ‘오를란도 핀토 파쵸’에서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섰다. 반주자는 반주자로 그 역할이 끝나는데 오히려 그는 그 이상을 얻게 된 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지만 그것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그만이 갖고 있는 모든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다. 그것이 무대에서 발휘된다.

“한국에 돌아오면 뭔가 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근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유럽과 달리 여기는 보이지 않는 여러 인맥들이 작용하더군요.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 조금씩 적응해 나갔어요. 그렇지만 아이를 키우는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를 해야 해서 연주회는 꿈도 꿀 수 없었어요. 간간히 반주를 하거나 학교 출강하는 일 외에는 육아에만 집중을 했죠.”

피아니스트 홍자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 성악가 파바로티를 단박에 사로잡아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했다. ⓒ홍자윤 제공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었다.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 피아노는 떠나지를 않았다. 이제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자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때 그를 불러낸 것이 바로 얼마 전 수원SK아트리움에서 있었던 제이케이아트컴퍼니의 기획공연 ‘브런치 콘서트’ 시리즈 살롱 드 아트리움(Salon de Artrium)이었다.

프랑스의 유명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디지털영상과 함께 해설이 있는 음악회로 진행했는데 여기서 연주를 맡으며 예전의 실력을 여지없이 뽐냈다. 그는 밀레의 그림 디지털 영상 분위기에 맞춰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음악회에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았다. 피아노 하나로 능수능란하게 음악회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이제 홍자윤은 반주자를 넘어 오롯이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독주회를 갖고자 한다. 피아니스트 홍자윤의 아름다운 무대가 만들어 지는 그 날 까지 그의 피아노 스토리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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