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흔한 곡을 흔하지 않게...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빛난 한수진 바이올린

‘프랑크 소나타’ ‘비발디 사계’로 리사이틀
​​​​​​​앙코르 4곡도 익숙한 곡으로 구성 박수갈채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4.25 16:55 | 최종 수정 2024.04.26 06:17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첫 앨범 ‘An Die Musik’ 발매를 기념해 열린 리사이틀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고 있다. ⓒSH아츠앤드클래식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프로 연주자가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많은 관객이 잘 알고 있는 곡으로만 구성하는 것은 ‘모험’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귀에 익숙해 참신성이 떨어진다.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식상하다, 질린다, 물린다 등의 핀잔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일부 연주자는 남들이 모르는 레퍼토리를 독주회에 끼워 넣는다.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연습해서 선보이고 싶은 욕심에 고르기도 하지만, “당신들 이거 모르지”라는 약간의 허세로 초이스하는 경우도 있다. 폼 잡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은 ‘모험’을 선택했다. 지난 1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그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Op.8)’를 전면에 내세웠다. 두 곡 모두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니, 한수진 입장에서는 잘해도 본전이다. 까딱했다가는 본전을 못찾을 수도 있는 도전이다.

하지만 역시 한수진이었다. 섬세하고 애잔했고, 또 유쾌하고 힘이 넘쳤다. 두 끝지점을 자유자재로 오고갔다. 인위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흘렀다. 흔한 곡을 흔하지 않게 연주하는 스킬이 놀라웠다.

한수진에게 이날 공연이 특히 뜻 깊었다. 최근 워너클래식에서 발매한 첫 앨범 ‘An Die Musik(음악에 붙여)’의 탄생을 기념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음반 작업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재작년 가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피아니스트 프레디 켐프와 호흡을 맞춰 녹음했는데, 심한 감기에 걸려 수액를 맞아가며 레코딩했다. 링거투혼이 만든 음반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첫 앨범 ‘An Die Musik’ 발매를 기념해 열린 리사이틀에서 신재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SH아츠앤드클래식 제공


1부에서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 단원 13명이 먼저 나와 3악장으로 구성된 펠릭스 멘델스존의 ‘현악 교향곡 2번’을 연주했다. 웰컴 뮤직 역할을 톡톡히 했다. 디베르티멘토 풍의 경쾌함과 저돌적인 질풍노도의 음악양식을 통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작법을 충실히 습득한 멘델스존의 노력과 재능이 엿보였다.

이어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한수진이 피아니스트 신재민과 함께 나왔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벨기에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의 결혼식 축하 선물로 작곡했다. 이자이가 초연했을 당시 갑자기 정전이 돼 암흑 속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이게 오히려 플러스가 됐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오히려 음악에만 더 집중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 소나타는 많은 해석이 따라 붙지만, 한수진은 프로그램북에 직접 다음과 같이 적었다.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결혼생활 혹은 인생의 사계절에 비유되는 등 해석이 많다. 저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영국 왕립음악대학의 펠릭스 안드리옙스키 교수님이 제시한 예수님의 생애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닿는 해석이다. 1악장은 사랑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의 따뜻한 모습과 근심의 먹구름 사이에서 다시 나오는 희망의 빛을 담았다, 2악장은 폭풍이 휘몰아친 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처럼, 어둡고 정지되는 듯한 포인트가 등장하지만 화성에 의해 심장이 다시 소생하듯 부활을 연상하게 하한다. 그리고 단조로 시작해 장조로 끝나는 승리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3악장의 레치타티보 스타일은 마치 깊은 내용의 설교처럼 다가온다. 하늘의 위로가 신비한 베일에 싸여 내려오는 순간을 보여준다. 4악장은 이 모든 게 지나간 뒤 달관한 듯 밝게 시작한다. 세 번째 악장에 나온 깊은 열정의 드라마를 초월적이면서도 단단하게 한 단계 고조시킨 다음에 교회 종소리가 마구 울려 퍼지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한수진은 오버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은 밋밋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단아한 동작으로 담담하게 음악을 이끌어 나가는 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겉으로 드러나는 제스처는 평범했지만 1666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는 뚜렷한 기승전결을 만들어나갔다.

연주를 마친 한수진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이번에 내놓은 앨범 ‘An Die Musik’를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면서 앙코르로 앨범 마지막 트랙 수록곡인 프란츠 슈베르트의 ‘An Die Musik’를 연주했다. 뒤이어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도 들려줬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첫 앨범 ‘An Die Musik’ 발매를 기념해 열린 리사이틀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고 있다. ⓒSH아츠앤드클래식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첫 앨범 ‘An Die Musik’ 발매를 기념해 열린 리사이틀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고 있다. ⓒSH아츠앤드클래식 제공


2부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과 케미를 맞춰 비발디의 ‘사계’를 선사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는 곡이다. 자연을 물감이 아닌 소리로 그려내듯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지휘자 없이 한수진의 리딩으로 음악이 시작됐다. 어느새 마른 가지에서 꽃망울이 움트고 거친 땅에서는 새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시즌에 딱 들어맞는 선율이다(봄).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이 뜨겁지만, 활기찬 생동감도 가득하다(여름). 그리고 여기저기서 풍성한 수확이 한창이더니(가을), 금세 찬바람 씽씽 불며 옷깃을 여미게 했다(겨울).

지난 2월,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가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리컴포즈드 사계’를 연주했을 때와 또 다른 모습이다. 한수진은 뉴 버전의 곡뿐만 아니라 오리지널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한수진은 비토리오 몬티의 ‘차르다시’도 들려줬다. 삶의 애환이 촘촘하게 박힌 헝가리춤곡 차르다시는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곡이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집시의 한이 가득한 전반부와 그 한을 빠른 춤의 흥으로 풀어내는 후반부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날 공연의 안성맞춤 디저트 같은 역할을 했다.

2부 앙코르는 로베르트 슈만을 선택했다. 누구나 사랑하는 소프트 명곡 ‘트로이메라이’와 ‘헌정’이었다.

“비범한 테크닉과 다양한 표현력으로 진정성 있는 음악이 인상 깊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기돈 크레머의 평가가 헛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독주회였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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