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역시 프로들이다. 조수미의 ‘후두염 투혼’, 김봄소리의 ‘손목통증 투혼’, 그리고 피에타리 잉키넨의 ‘십자인대파열 투혼’이 KBS교향악단의 800회 정기연주회를 역대급으로 만들었다.
KBS교향악단의 첫 정기연주회는 1956년 12월 20일 명동의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임원식의 지휘로 소프라노 이경숙이 협연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C장조(K.96)와 디베르티멘토 D장조, 그리고 푸치니 ‘라보엠’ 중 미미의 아리아와 홍난파 가곡들을 들려줬다.
그 후 68년을 꾸준하게 달려 KBS교향악단이 드디어 800회 정기연주회를 맞았다.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역사적인 날’을 성대하게 잘 치르고 싶었다. 공연에 앞서 축하 리셉션도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 정말 좋은 일에는 탈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투혼이 음악회를 더욱 엑설런트하게 만들었다.
● 조수미 급성후두염 투혼...“그래도 부른다” 3곡서 1곡으로 줄여 노래
협연자로 나선 조수미는 원래 세곡을 부를 예정이었다.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여’, 도니제티 오페라 ‘연대의 딸’ 중 ‘모두가 알고 있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아, 그대였던가’를 프로그램에 올렸다.
27일 저녁 공식홈페이지와 SNS 등에 긴급공지가 올라왔다. 조수미의 급성 후두염으로 프로그램을 변경한다는 내용이었다. 29일 공연에 앞서 28일에도 여의도 KBS홀에서 한차례 더 공연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긴박했다. 부랴부랴 곡을 줄여 한곡만 부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조수미가 사이드 드럼 소리에 맞춰 무대로 나왔다. 비록 한곡이지만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러 나온 오페라 여왕에 대한 예우다. 그는 1986년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데뷔한 뒤, 38년 동안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다. 와~ 함성이 쏟아졌다. 지휘를 맡은 잉키넨과 가볍게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눴다.
도니제티의 ‘모두가 알고 있지’를 불렀다. 첩자로 오인돼 병사들에게 잡혀온 토니오가 실은 마리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리와 병사들이 함께 부르는 경쾌한 노래다. 목 상태가 정상이 아닌 탓에 마이크를 썼지만 역시 월클이다. 처음부터 아아아~아아~아아아~ 고음을 펼치며 콜로라투라의 매력을 뽐냈다. 부르지 못한 나머지 두곡을 한곡에 갈아 넣은 느낌이다.
왼쪽 오른쪽 짝짝짝 박수를 치며 흥겨움을 유도했다. 또한 노래 중간에 “2절”이라고 알려주는 센스를 발휘했고, 실제 오페라 보는 듯한 드라마틱 연기를 펼쳤다. 마지막 경례 동작도 멋졌다. 큰 무대에서 산전수전 경험한 베테랑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저 때문에 걱정 많으셨죠. 많이 준비했는데 못해서 속상해요. 제 스승이신 이경숙 선생님이 첫 정기연주회에 서셨고, 제자인 제가 800회 무대에서 노래하게 돼 기뻐요. KBS교향악단이 앞으로 8000회 공연할 수 있도록 응원할게요”라며 인사했다. 재치 넘치는 멘트다.
노래할 때는 목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지 몰랐지만 이야기를 할 때는 확실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해외서 외로울 때면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 곡을 들려드리겠다”라며 직접 피아노를 치며 안정준의 ‘아리 아리랑’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몇 차례의 커튼콜에서 손키스와 손가락하트를 날렸고, 가슴을 추켜올리는 과감한 몸짓을 선보이는 등 ‘바람잡이 역할’을 미션 클리어했다.
● 김봄소리 손목통증 투혼...긴급 SOS 수락 ‘의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는 조수미의 노래가 축소되면서 급히 추가 협연자로 투입됐다. KBS교향악단이 이러 저리 수소문 끝에 마침 국내에 머물고 있던 김봄소리와 연락이 닿아 SOS를 쳤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KBS교향악단과 연주한 경험이 있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Op.35)’를 선곡했다. 손발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잘 맞춰 질주했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산뜻한 사운드였다.
김봄소리는 러닝타임 상으로 곡의 절반을 차지하는 1악장에서 바이올린의 가녀린 숨결과 폭발적 에너지를 적절히 섞어가며 곡을 리드했다. 카덴차가 끝나고 플루트가 이어지는 장면은 감미로웠다. 2악장과 3악장에서는 현란한 기교를 뜨겁게 펼치며 절정으로 안내했다.
1열에 앉은 탓에 사운드를 온전히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지휘자·악장과 눈짓 사인을 주고받으며 퍼펙트 케미를 맞춰가는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현을 짚는 왼손과 활을 켜는 오른손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살짝 숨을 몰아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 쉴 새 없이 오른 손목을 돌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시큰시큰 손목통증을 느끼고 있음을 누구나 눈치챘다.하지만 김봄소리 아닌가.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집중력으로 정면 돌파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평론가 성용원은 “어떤 지휘자가 와도 KBS교향악단의 협주곡 반주는 참 편안하고 아늑하다”라며 “김봄소리는 소리가 작은 것을 염두에 두고 튜티(‘모두 함께’ ‘다함께’라는 뜻)에서도 최대한 절제하며 밸런스를 맞춰 가는 노력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 피에타리 잉키넨 목발투혼...관객들 “레스피기 로마 3부작 역대급 연주”
역시 800회의 진전한 주인공은 상임지휘자 잉키넨과 KBS교향악단이었다. 잉키넨의 등장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목발을 짚고 나왔다. 스키를 타다 십자인대 부상을 입었다.
앉아서 지휘를 해야 했기 때문에 포디움도 2단으로 준비했다. 뒤쪽 악기 파트에서 잘 보이도록 살짝 단을 더 높이 쌓은 것. 800회 정기연주회 축제의 날이기 때문에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을 메인디시로 준비했다.
‘로마의 축제’는 장대하고 강렬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로마의 주요 축제를 모티브로 삼아 로마의 종교적 이미지와 열정적인 이탈리안의 초상을 부각했다. 트럼펫 3명의 반다(연주자가 무대 밖에서 연주하는 것)는 귀를 사로잡았다. 심벌즈, 드럼, 팀파니 등 다채롭게 구성된 타악기의 연주는 힘찬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로마의 분수’는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났지만 세밀한 아름다움이 반짝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상쾌한 물줄기와 흩어지는 물방울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했다. 내밀한 속삭임을 닮았다. 하프와 첼레스타의 음색이 귓전을 맴돌았다
‘로마의 소나무’는 3부작 중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로마의 명승지에 서있는 소나무를 매개로 과거의 현재를 넘나들며 로마의 갖가지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소환한다. 특히 2악장에서 보여준 트럼펫 솔로 반다와 4악장에서 선사한 트럼펫 4명·트럼본 2명의 반다는 눈부셨다.
성용원 평론가는 “로마의 소나무 3악장(자니콜로의 소나무)이 끝나갈 무렵 클라리넷의 여음에 새소리가 울려 퍼질 때가 압권이었다. 카덴차를 마친 피아노 연주자가 그 여리고 여린 음들에 혹시나 방해가 되지 않을까 악보를 넘기지 않고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하나로 일치된 배려와 합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