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학구적, 탐구적, 도전적, 진취적이었다. “지금까지의 녹턴풍 달콤 조성진은 잊어주세요”를 선포하는 세리머니였다. 난곡(難曲)으로 프로그램을 채웠고, 그동안 꽁꽁 숨겨 놓았던 스킬을 하나씩 꺼내 솔루션을 풀어 나갔다.
동원 가능한 온몸 근육을 모두 사용했다. 소리의 결이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다. 말랑말랑 나긋나긋하지 않았다. 마침 밖에 쏟아진 폭우처럼 거칠고 매서웠다. ‘나쁜 남자’ 스타일의 음악, 딱 그랬다. 모범생 이미지를 벗은 파격적 모습이다. 그런데 끌린다. 낯설어 더 끌린다.
클래식계의 핫 셀럽 조성진이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헨델부터 러시아의 현대음악 작곡가 구바이둘리나의 곡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건반을 선보였다.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국 리사이틀의 첫 무대가 열렸다. 합창석까지 꽉 들어찼다. 2500석이 광클 솔드아웃됐다. 프로그램북 1800부도 금세 동났을 만큼 탄탄한 인기를 입증했다.
조성진은 들어오자마자 합창석에 먼저 인사했다. 배려 넘치는 초이스다. 첫 곡은 헨델의 ‘건반 모음곡 5번 E장조(HWV 430)’. 지난 2월 발매한 앨범 ‘헨델 프로젝트’에 수록됐다. 원래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독일어로는 쳄발로·프랑스어로는 클라브생)를 위한 곡이지만, 조성진이 피아노로 녹음했다.
담백하고 소박했다. 1악장 프렐류드는 적절한 인트로 역할을 해냈고, 2악장 알르망드는 대단히 선율적이며 온건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3악장 쿠랑트는 인상적인 꾸밈음이 곁들여져 발랄하고 상큼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조화로운 대장장이(The Harmonious Blacksmith)’라는 애칭이 붙어있는 마지막 4악장. 주제와 다섯 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패시지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양손의 움직임은 단순한 구조지만 조성진의 손끝에서는 현란한 연주 효과를 만들어 냈다.
이어 올해 92세의 여성 작곡가 구바이둘리나의 ‘샤콘느’를 들려줬다. 쇼킹했다. 첫 시작부터 체중을 실어 건반을 눌렀다. 육중함과 둔탁함이 뒤섞이며 자유로운 변주곡이 펼쳐졌다. 조성진이 저런 동작을 한다고! 몸이 누울 정도의 아크로바틱 자세도 등장했다. 액티브했다. 점차 격렬함이 절정으로 치솟았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멀리서도 묘한 흥분감을 안겨줬다. 낯선 사운드가 때로는 귀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완전히 딴 세상은 아니었다. 충분히 수용 가능한 불협화음이다.
조성진은 곡의 배치에도 신경 썼다. 시대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헨델과 구바이둘리나를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란히 붙여 놓았다. 익숙함과 낯섦의 상반된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아이디어다.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Op.24)’는 28세의 젊은 브람스가 바로크 음악에 몰두한 노력의 선물이다. 모두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헨델의 ‘모음곡 내림B장조(HWV 434)’ 중 아리아 부분을 주제로 끌고 와 25개의 변주로 변화무쌍하게 이어지고, 마지막에 푸가로 마무리된다.
이 곡의 미덕은 주제가 지닌 산뜻한 감성과 솔직한 건강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거기에 후기 낭만의 감수성을 멋지게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조성진은 브람스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으면서 바로크와 19세기 후반의 시대적 괴리감을 순수음악의 절대성을 통해 하나로 통일했다.
조성진은 이번 독주회에 앞서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헨델 하프시코드 모음곡과 더불어 헨델의 영향을 창의적으로 탄생시킨 브람스의 곡을 꼭 넣고 싶었다”고 밝혔다. 특히 브람스 변주곡과 푸가에 대해서는 “정말 천재적인 곡이다. 연주 테크닉과 음악의 복잡함이 연주자에게 도전이 되는 작품이고, 마치 큰 산을 오르는 것 같다. 그러나 힘들어도 정상에 도착하면 안도감이 들면서 감정에 빠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기교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는 어려운 곡이지만 관객 모두는 조성진의 친절한 안내에 힘입어 무사히 피크에 도달했다. ‘아리아+25개 변주+푸가’가 한 묶음이니 단숨에 27개의 봉우리를 찍은 셈이다.
인터미션은 놓칠 수 없는 보너스였다. 강력한 타건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이종열 조율사가 나와 건반을 두드리며 세심하게 다시 음을 바로잡았다. 피아노 조율 관련 에세이를 펴내기도 그에게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또한 하우스매니저는 손자국이 난 건반을 깨끗이 닦아내 다음 무대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2부의 브람스와 슈만은 한몸처럼 이어 연주했다. 모두 8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소품(Op.76)’은 은밀한 어조로 인생을 관조하는 브람스의 장년기를 여는 신호탄이다. 산전수전을 겪은 한 사내의 내면 목소리를 차분히 대변하는 곡이다. 조성진은 1, 2, 4, 5번을 터치했는데 청춘의 방황, 자유로운 집시의 영혼, 살짝 흔들리는 불안감, 강렬한 음향과 복잡한 리듬을 통한 공격적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프로그램 마지막 곡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Op.13)’. 무려 4년(1834~1837)이라는 시간이 걸린 대작으로 슈만의 피아노곡 중 최고의 기교가 필요한다. 작곡가 스스로 ‘교향악적’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만 보아도 곡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연주는 엄청났다. 기본 포맷인 주제와 12개의 연습곡을 뼈대로, 슈만의 사후에 나온 유작 변주곡 중 4변주와 5변주를 추가해 들려줬다. 숨이 멎을 듯 휘몰아쳤다. 격정의 낭만이 넘실거렸다.
더 놀라운 일은 앙코르에서 일어났다. 라벨의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거울’을 연주했다. 귀에 익숙한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을 서비스로 선사하는 게 일반적인데, 조성진은 넘사벽을 선택해 다시 정면돌파했다. 원래 5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제3곡 ‘바다 위의 작은 배’와 제4곡 ‘어릿광대의 아침노래’를 들려줬다. ‘거울’은 조성진이 독주회에서 처음 연주하는 곡으로 5일 예술의전당, 8일 대전 예술의전당, 9일 부천아트센터 프로그램에 속해있다. 미리 맛보기로 보여준 셈이다.
기립박수와 환호가 계속되자 조성진은 손가락으로 ‘1’을 만들며 한곡 더 선사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헨델의 ‘건반 모음곡 7번 내림B장조’ 중 3번 사라방드를 연주했다. 달달구리 마무리로 조성진 끝장의 밤이 막을 내렸다.
조성진은 커튼콜 때 무대 오른쪽으로 이동해 상대적으로 자신을 보기 어려웠던 관객들에게도 인사했다. 친절남이다. 마지막 앙코르 무대가 끝나고 퇴장할 때는 관객석 1열에 앉아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포옹했다. 정경화는 조성진의 오랜 멘토다.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에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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