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무대 위에서 협연자와 지휘자의 ‘케미’를 알아채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사운드에 집중해 파악해야 하는데, 솔직히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이를 캐치하는 것은 어렵다. 미묘한 음의 변화를 잡아내려면 많은 공부가 수반돼야 한다. 하지만 쉬운 방법도 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내한공연에서 ‘소리의 시각화’ 장면을 포착했다. 심쿵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1부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의 ‘피아노 협주곡 1번(Op.23)’을 연주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16세 때부터 쳤지만 유명한 곡이라 늘 부담이 된다”며 “특별히 더 잘 연주하려고 하기 보다는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며 연주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악보에 더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호른의 웅장함과 피아노의 묵직함으로 1악장이 열렸다. 정작 주요 주제보다 서주가 더 유명한 이 악장에서 피아니스트는 엄청난 체력을 뽐냈다. 몸이 뒤로 젖힐 정도로 온 힘을 다해 흰 건반을 눌렀다. 강렬한 타건이다.
2악장은 현악기의 스타카토로 시작돼 애상적인 플루트가 뒤를 이었다. 그 위를 스케이트 타듯 피아노가 미끄러져 흘렀다. 그리고는 첼로와 피아노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 첫 부분에서 플루트 수석의 음이탈이 발생했다. 이미 세종예술의전당(2일), 롯데콘서트홀(3일), 아트센터인천(4일)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긴 것. 그러나 전체의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순간의 방심에서 빚어진 실수 또한 음악 아닌가.
3악장은 긴박한 리듬감과 거침없는 호쾌함이 믹스됐다. 조성진의 두 손엔 모터가 달렸다. 쉼 없이 달리고 달렸다. 자신의 연주를 잠시 멈추고 오케스트라 파트를 들을 땐 아예 몸을 왼쪽으로 돌려 귀를 쫑긋 세웠다. 한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이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였다. 조성진이 카덴차를 치고 나갈 때, 그도 아예 몸을 돌려 조성진의 연주를 내려 봤다. “성진! 잘하고 있어!”라는 극찬이다. 브로맨스 영화가 생각나는 시각적 효과와 어우러진 피아노·오케스트라 소리는 뭉개짐 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합을 맞추는 장면은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약 35분 동안의 연주를 마친 뒤 조성진과 정명훈은 포옹했다. 객석에선 뜨거운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조성진은 앙코르 곡으로 헨델의 ‘모음곡(HWV 434)’ 중 ‘미뉴에트 g단조(빌헬름 켐프 편곡)’를 들려줬다. 최근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발매한 음반 ‘헨델 프로젝트’ 수록곡이다. 몇 차례의 커튼콜에 응한 조성진은 피아노 위에 두 손을 댄 채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이제 연주를 끝마친다며 손을 흔들어 바이 바이 포즈를 취했다.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조성진의 연주는 나무랄 데가 없었고 정명훈은 최대한 조성진의 피아노에 맞추려는 성의가 돋보였다”라며 “앙코르로 선사한 헨델 미뉴에트는 슬프고도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이어 “플루트의 음정이나 자잘한 미스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다 자갈을 밟는 듯 지나갔다”고 평했다.
관객들은 2부에서 70세 정명훈이 지휘하는 475년 역사의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풍성한 사운드에 흠뻑 빠졌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1548년 창단해 지금까지 이어오는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다. 2012년 정명훈은 악단 역사상 첫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돼 10여년간 다양한 연주를 함께하고 있다.
특별히 이번 무대는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묶어서 하는 공연이 아닌 한국만을 위한 단독투어라 더 의미가 깊다. 정명훈은 기자간담회에서 “아시아 투어를 하면 일본에서 많이 하고 한국은 많아야 한두 번인데 처음으로 한국만 특별히 여섯 번을 공연한다”면서 “우리 음악 수준이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평가했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교향곡 8번 ‘미완성(D.759)’과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은 독일 정통 관현악 사운드로 구현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이름값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류 평론가는 “정명훈의 음악이 크고 깊어졌다. 특히 미완성 교향곡은 예상을 뛰어 넘는 명연이었다”며 “세르주 첼리비다케, 한스 크나퍼츠부쉬, 오토 클렘페러 스타일의 장려한 대하드라마였다”고 평가했다. 그리고는 “현과 관이 뿜어내는 처절한 강열함이 귀를 자극했다”며 “호른과 목관이 만드는 풍성한 사운드는 꿈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고 찬사를 보냈다.
‘마탄의 사수’ 서곡에 대해서는 “정명훈의 시그니처인 ‘운명의 힘’ 서곡을 더욱 어둡게 강화시킨 느낌이다”며 “막강한 호른의 십자포화에 마음 놓고 들을 수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앙코르도 돋보였다. 몇 차례 커튼콜 뒤 정명훈은 “음악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곡을 들려드릴게요. 브람스”라며 교향곡 3번 3악장을 연주했다. 없는 연애 감정도 샘솟게 할 만큼 감정이 꿈틀대는 소리였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폴을 향한 시몽의 목소리가 들렸다. 7일(1·2번)과 8일(3·4번)에 예정된 브람스 교향곡 전곡 사이클 연주에 대한 맛보기를 겸한 영리한 선곡이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