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초등 6학년때 구입한 카세트테이프에 꽂힌 박세연...‘신쾌동 가야금 산조’ 되살렸다

전통음악프로젝트 ‘본연’ 여섯번째 무대
​​​​​​​거문고 명인의 ‘잊힌 가야금 소리’ 부활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9.10 14:58 | 최종 수정 2023.09.10 16:04 의견 0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지난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신쾌동의 ‘잊힌 가야금 연주’를 살려내고 있다. ⓒ박세연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어린 시절부터 가야금 연주를 시작한 박세연은 레코드 가게에서 처음으로 음반을 구입했다. ‘申快童 가야금 산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카세트 테이프였다. 정작 자신은 ‘申快童’이라는 한자를 읽을 수 없어 나중에 이 글자가 ‘신쾌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재킷에는 남자 두 명이 가야금, 거문고, 장구를 뒤에 두고 앉아있다. 오른쪽이 신쾌동 명인이고, 왼쪽이 김재선 고수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신쾌동(1910~1977)은 거문고의 명인이다. 금헌(琴軒)이라는 호를 썼다. 정일동에게 거문고 정악을, 백낙준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백낙준의 고제(‘고족제자’의 준말로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가 됐고, 스승이 별세한 뒤 그 뜻을 이어가며 거문고 산조 1인자에 올랐다.

신쾌동은 한참 배우고 익히던 때에 박학순 밑에게 가야금 산조를 공부하기도 했다. 열을 알려주면 스스로 서너 개를 더해 깨우치는 실력이 어디로 가겠는가. 거문고뿐만 아니라 가야금에도 솜씨가 있었다. 신쾌동이 남긴 가야금 산조 음원은 4종의 음반으로 남아 있으나, 모두 내용이 동일하다. 박세연이 가지고 있는 카세트 테이프의 수록곡도 음반 속 곡들과 똑같다. 이후 아세아레코드에서 1984년에 발매한 음반 ‘가야금 산조’는 1996년에 CD형태로 제작하기도 했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은 초등학교 6학년때 구입한 ‘신쾌동 가야금 산조’ 카세트 테이프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박세연 제공


비록 표지의 색은 바랬지만 박세연에게 신쾌동의 카세트 테이프는 보물이다. 지금도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이 곡을 연주해봐야지”라며 듣고 또 들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카세트 테이프, 음반, CD 등을 선생님삼아 신쾌동의 가야금 산조를 익혔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실력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박세연은 지난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신쾌동의 伽倻琴(가야금)’이라는 타이틀로 팬들을 만났다. 서울돈화문국악당 2023 공동기획 시리즈의 열한 번째 공연이며, 지난 2016년부터 시작된 박세연의 전통음악 프로젝트 ‘본연(本然)’의 여섯 번째 무대였다.

박세연은 그동안 ‘본연’ 시리즈를 통해 한성기, 김태문과 같이 사라졌던 옛 명인의 음악을 복원·재현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가 이번에는 거문고 명인의 ‘잊힌 가야금’을 발굴하는 무대를 마련한 것.

든든한 지원군이 뒤를 받쳐줬다. 목원대학교 한국음악과 이태백 교수가 고수로 나섰고, 윤중강 음악평론가가 신쾌동의 음악을 해설해줘 감상에 도움을 줬다. 공연장 분위기는 고풍스럽다. 무대 위 8폭 병풍과 화문석이 단아하다. 객석의 경사도가 급하지만 무대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지난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신쾌동의 ‘잊힌 가야금 연주’를 살려내고 있다. ⓒ박세연 제공


신쾌동의 음원자료는 거문고 산조가 대부분이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풍류 음악을 즐겼던 서봉 허순구 선생에 의해 신쾌동의 또 다른 예술세계인 풍류 음악 실연본이 녹음됐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음원이 전북도립국악원 보존자료 복각음반 시리즈로 발매됐다. 이 음반에는 하현해탄(대금), 염불도드리(단소), 타령(가야금), 군악·본군악(거문고)이 수록돼 있다.

박세연은 첫 곡으로 이들 풍류 중 유일하게 가야금으로 연주된 ‘타령’을 선사했다. 곡 소개도 이채로웠다. ‘지지직~’ 오래된 레코드 소리와 함께 “신쾌동 선생의 풍류 중 타령을 들려 주것습니다”라는 음반 속 멘트를 그대로 사용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워프 효과를 줬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지난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신쾌동의 ‘잊힌 가야금 연주’를 살려내고 있다. ⓒ박세연 제공


두 번째 곡은 이날의 하이라이트 ‘가야금 산조’. 첫 음을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뜨거운 것이 가슴 밑바닥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줄을 뜯고 눌러 소리를 내고 있지만, 박세연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힌 오랜 연습 시간이 에너지가 되어 소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살짝 고수 이태백의 추임새가 더해지면서 한국미의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관객들도 얼쑤, 헛, 어잇 등 각자 입소리를 내며 음악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서양 클래식 공연에서는 볼 수 없는 참여형 소통음악이 됐다. 타이밍을 잡아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의 경지는 아닌 까닭에 속만 태웠다.

가야금 산조를 마친 뒤 박세연은 “휴~”하고 긴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활짝 웃었다. 만만치 않은 연주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객석 어딘가에 신쾌동 선생이 살아 돌아와 앉아 있었더라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으리라. 박세연은 음원의 즉흥적인 선율 때문에 장단과 어긋나는 부분은 자신의 장단에 맞춰 수정하며 연주했다.

해설을 맡은 윤중강 평론가는 “그동안 다른 음악가들은 신쾌동의 가야금 연주를 채보(採譜)해 연주하는 것에 그쳤지만, 박세연은 그것을 뛰어넘어 신쾌동의 음원 속에 들어있는 성음(聲音)을 재현하려고 애썼다”고 평가했다. 쓰여 있는 악보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원래 내려고 했던 ‘참 소리’에 더 집중하는 연주를 택한 것이다.

이어 윤 평론가는 “신쾌동의 산조는 ‘전북의 산조’다. 전북의 산조는 사투리에 가깝다. 자기 고백적이다. 마치 일기를 쓰는 것 같다.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강하다”라며 박세연이 그런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지난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이태백 고수와 함께 신쾌동의 ‘잊힌 가야금 연주’를 살려내고 있다. ⓒ박세연 제공


마지막 곡은 남도잡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새타령’. 화창한 봄날에 즐겁게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모습을 흐드러지게 그리고 있는 노래다. 신쾌동의 복각음반 시리즈에서는 가야금 산조 이후 바로 민요 새타령이 노래 없이 가야금과 장구 반주로 연주된다.

박세연은 이 새타령을 철금(鐵琴), 즉 철가야금으로 새롭게 연주했다. 가야금은 일반적으로 12줄 명주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명주실 대신에 철줄 현을 얹은 것이 철가야금이다. 사운드가 쨍쨍하고 더 멀리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고여만 있으면 발전이 더디다. 박세연은 대선배 신쾌동의 소리를 업그레이드해 새롭게 전달했다. 아름다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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