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아무래도 사연이 있으면 더 애절하고 아름답다. 가슴으로 그대로 날아와 꽂힌다. 거기에 더해 눈물 콧물까지 빼는 요소가 랩핑돼 있다면 감동은 더블이다. 임방울과 산호주, 한성기와 김죽파.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레전드로 전해오는 이 주인공들의 스토리를 철가야금으로 풀어냈다. 풍성한 색채로 그들의 음악을 선물했다.
박세연은 24일(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다. 지난 2016년부터 시작된 그의 전통음악 프로젝트 ‘본연(本然)’의 다섯 번째 무대다.
그의 무기는 ‘철금(鐵琴)’이었다. 스토리텔링 흐르는 3곡 모두를 철가야금으로 연주했다. 가야금은 일반적으로 12줄 명주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명주실 대신에 철줄 현을 얹은 것이 철가야금이다.
재료가 철이기 때문에 줄의 장력이 명주실과 많이 다르다. 습도나 온도에 매우 민감해 다루기 쉽지 않다. 박세연은 공연에 앞서 “대기실에서 줄을 고르고 골라 음을 겨우 맞춰 놓았는데 아주 잠깐 히터를 틀었더니 줄이 금세 변형됐다”고 혀를 내둘렀다. 참 예민한 놈이다.
철금은 줄의 두께가 제한적이고 신축성이 적은 탓에 저음 부분이 빈약하게 들리거나 농현(왼손으로 줄을 짚어 원래의 음 이외의 여러 가지 장식음을 내는 기법) 때에 칭칭 대는 노이즈가 들리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냈다. 산조에서 자주 쓰는 겹청조현을 위해 가장 아랫줄에 두꺼운 쟁줄을 얹었다. 나머지 줄도 기존 철줄보다 좀 더 두꺼운 줄로 바꿨다. 이는 산조가야금에서 겹청 하청에 거문고 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완벽하게 세팅을 한 덕에 첫 곡 ‘추억’부터 음색은 청아했고 여운은 길었다. 감정표현을 극대화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세연의 철가야금과 이태백의 장구는 지음(知音)을 뽐내며 100년 전의 러브스토리로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판소리계의 마지막 슈퍼스타였던 명창 임방울(1904~1061)이 죽기 직전까지 즐겨 불렀다는 가슴 아픈 사랑노래 ‘추억’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100% 팩트로 믿기에는 의문스러운 구석도 있다.
임방울은 소년 시절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 더부살이를 했는데, 마침 주인집에 동갑내기 산호주(성은 김씨다)라는 딸이 있어 서로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게 됐고, 산호주는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간 후 소식이 끊겼다.
이후 임방울이 ‘쑥대머리’로 일약 명창 반열에 오른 어느 날, 두 사람은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산호주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돌아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재회한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못다 이룬 사랑을 이루게 된다.
그 뒤로 임방울은 2년 동안 외부와 연락을 끊고 송학원의 내실에서 생활한다. 산호주는 지극 정성으로 임방울을 대접했고, 천하의 소리꾼은 그곳에 머무르며 사랑하는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음반 전속계약을 한 레코드사는 임방울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임방울의 목이 상해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됐다. 크게 낙심한 임방울은 산호주에게 떠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홀연히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임방울 때문에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임방울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온 지리산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토굴 속에서 홀로 소리공부에 매진하던 임방울은 그런 소식을 듣고도 애써 외면하고 만나지 않았다.
결국 산호주는 죽음을 맞이했고,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마주하게 된 임방울은 ‘추억’이라는 노래를 즉흥으로 작창해 불렀다고 한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 혼은 어데로 향하신가 / 황천이 어데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 /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나 말았거나... /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 어데로 가고 못오는가 / 보고지고 보고지고 /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노래는 부르지 않고 박세연의 연주로만 선보였지만 슬프고 애잔한 선율 사이로 노랫말이 저절로 오버랩 되는 듯 모두들 조용히 눈을 감고 절절한 순애보(殉愛譜)를 그렸다.
박세연이 철가야금을 제대로 연주해본 것은 2019년 겨울 ‘본연’ 두 번째 공연 때다. 그는 “지나고 보니 철가야금을 어설프게 소화했던 것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 또 한편으로는 그리움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라며 “이에 다시 용기를 내어 공연을 기획하고 악기도 아예 새로 제작해 독주회를 열게 됐다”고 고백했다.
두 번째 선사한 곡은 ‘한성기제 철가야금 산조’.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역사를 훑어봐야 한다.
가야금 산조는 19세기 말 1세대 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창조(1865∼1919)에 의해 만들어졌다. 가야금 산조 2세대인 한성기(1889∼1950)는 김창조의 수제자면서, 역시 1세대 명인 한숙구(1850~1925)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김창조에게 배운 가야금을 김창조의 손녀 김죽파(1910∼1989)에게 전수했다.
김죽파가 처음 가야금을 접한 것은 물론 조부로부터 풍류를 배우면서부터였지만, 할아버지 타계 후 한성기에게서 본격적인 산조 수업을 받으면서 김죽파 산조의 근간이 됐다.
이처럼 사제 관계로 맺어진 세 사람은 ‘김창조-한성기-김죽파 산조’로 그 계보를 잇고 있으며, 현재 김죽파류는 가장 활발히 연주되고 있는 대중적 가야금 유파 중 하나다.
하지만 한성기 가야금산조는 전승이 끊겨 안타깝게도 현재 연주되고 있지 않은데, 박세연이 이것을 되살려냈다.
그는 1930년대 유성기 음반 다이헤이(1933년)와 시에론(1932년)에 들어 있는 짧은 길이의 한성기 산조 음원 자료를 직접 모아 흐름에 맞게 하나의 긴 산조로 재구성해 지난해 연주하고 음반으로도 발매했다.
음원자료를 보면 한성기 산조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명인들의 산조보다 연주 속도가 빠르고, 동일 음을 반복해 튕기며 리듬을 쪼개는 동음연타 주법이 자주 등장한다.
이번에 박세연이 선보인 곡은 이를 바탕으로 하되 앞에 다스름(본 음악에 들어가지 전 연주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연주하는 짧은 곡)을 새로 첨가하고 템포를 훨씬 느리게 바꾸는 등 철가야금 스타일로 편곡했다. 여운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당악의 순서로 선율의 진행을 바꿨다. 마치 랩을 연상시키듯 뜯거나 튕기는 속사포 연주 파트는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처음에는 ‘제 자신만의 가야금 산조를 새로 만들어 보리라’ 원대한 포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만들면 만들수록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곡으로 들어서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산조의 탄생이 평생을 걸고 해도 될까 말까 하는 각고의 영역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제가 지난해 고음반을 복원한 ‘한성기 산조’를 철가야금에 어울리는 선율로 재구성했습니다.”
마지막 곡은 전라도 지방의 대표민요 ‘육자백이’. 원래는 논일 하는 농부들이나 밭 매는 아낙네들이 소박하게 부르던 노래였으나, 점차 전문 소리꾼들이 가락과 가사를 다듬어 오늘날과 같이 부르게 됐다.
육자배기는 전형적인 남도 계면조와 느린 6박자의 진양조 장단으로 되어 있다. 매 절 끝에서 “거나 헤~”를 제창으로 불러 끝맺는다.
이날 연주에서는 삼월삼짇날로 시작해 긴육자백이-자진육자백이-삼산은 반락-개고리타령-흥타령의 순서로 들려줬다. 원완철의 대금, 김나영의 노래, 이태백의 장구, 그리고 박세연의 철가야금이 어우러져 멋들어진 하모니를 연출했다. 객석에서 “얼씨구~” 소리가 쏟아졌다.
공연을 마친 뒤 박세연은 “연주자로 살면서 때로는 좌절도 많이 하고, 부족한 재능을 탓하며 자책도 많이 했다”라며 “이젠 무조건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속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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