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그냥 들으면 한없이 평화롭지만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눌러 불러야 하기 때문에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아침드라마의 막장 재미가 있어요.”
빈첸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시그니처 아리아는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고난도 기교가 필요한 곡이기에 내로라하는 소프라노들에게도 넘사벽 노래다.
소프라노 여지원은 1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로 불리는 ‘노르마’로 서울 무대에 서게 돼 기쁘다”며 “여사제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잘 담아내겠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은 전관 개관 30주년을 맞아 오는 26일(목)부터 29일(일)까지 나흘간 오페라극장에서 ‘노르마’를 공연한다. 이번 작품은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가 2016년 시즌 개막 작품으로 초연한 프로덕션으로, 압도적인 규모의 무대와 파격적인 연출로 찬사를 받았다. ‘노르마’는 국내에서 보기 쉽지 않은 공연인데 1986년, 1988년, 2009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노르마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리아(옛 프랑스의 영토) 지방의 드루이드교를 이끄는 여제사장이다. 정결을 요구받는 자리지만, 점령군의 수장인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져 몰래 두 아이를 낳는다. 로마와 드루이드교는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태지만, 노르마는 어느 쪽의 편을 들 수 없어 자신의 신도들을 진정시키며 평화를 지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폴리오네는 노르마를 따르는 여사제 아달지사를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지원은 지난 2005년부터 해외 생활을 시작해 ‘비토리아 여(Vittoria Yeo)’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번 공연이 서울에서 선보이는 오페라 전막 첫 무대다. 2014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투란도트’의 류 역으로 출연했고, 2017년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와 함께 경기도문화의전당 주최의 ‘무티 베르디 콘서트’에 올랐다.
그는 ‘무티의 소프라노’로 불린다. 2015년 8월 유럽 대표 클래식음악 축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무티가 지휘하는 베르디 오페라 ‘에르나니’에서 주역으로 깜짝 발탁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2017년에는 ‘아이다’의 아이다로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더블 캐스팅됐다.
여지원은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처음 노르마를 연기했고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그동안 감정을 폭발시키는 드라마틱한 역을 주로 맡았던 그는 “극중에서 노르마는 종교적·정치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배신당하며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감정을 억누르면서도 내면에 있는 강한 힘이 드러나게 노래해야만 이 오페라가 산다”며 역할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내용이 무척 재미있어 전혀 어렵지 않다.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막장의 재미가 있다. 삼각관계도 등장하고, 우정과 희생 등 익숙한 이야기도 있으며, 무엇보다 벨리니가 인물의 감정을 음악으로 기막히게 풀어내 작품이 전하는 감정을 따라오면 지루할 틈이 없다”고 강조했다.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팁도 덧붙였다. 그는 “‘정결한 여신이여’만 보지 말고 다른 정말 주옥같은 신(scene)에 집중하는 게 좋다. 개인적으로 피날레 장면을 정말로 좋아한다. 노르마와 더불어 합창, 테너의 슬픈 멜로디들이 합쳐져 벨리니의 음악의 찐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래 계획도 살짝 공개했다. 그는 “오페라는 언어를 기본으로 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제가 사용하는 언어(이탈리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맛을 잘 살리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
여지원과 함께 노르마 역할을 번갈아 맡는 소프라노 데시레 랑카토레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2021년 이탈리아 방송사가 현존하는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4명 중 1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랑카토레는 “높은 기교를 선보이는 동시에 한 여성으로서 노르마의 내면도 보여주겠다”며 “이 작품은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야기다. 이런 부분에 포인트를 주겠다”고 말했다.
지휘를 맡은 로베르토 아바도는 “벨리니의 작품은 벨칸토 오페라 초기의 로맨틱한 면과 클래식한 면을 함께 갖고 있다”며 “굉장히 웅장하고, 광범위한 음악의 범위를 보여준다. 후대 작곡가들도 영향을 받았는데 쇼팽의 녹턴이나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이런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어찌 보면 지루할 수 있는 레치타티보(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의 창법)도 악보에 아주 정교하고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며 “그가 작곡했을 때 스튜디오를 걸어 다니며 말하듯이 음악이 나올 때까지 작업했다고 한다. 저희의 포인트는 가수들이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바도도 이번 캐스팅에도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고난도 기교를 펼쳐야해 높은 수준의 가수들이 필요하다”며 “테크닉이 없으면 음악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우리는 환상적인 캐스팅에 성공했다. 이번 주역들을 선택한 건 탁월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세계와 닮은 이야기에 공감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4월 ‘맥베스’의 방코 역으로 국내 오페라 무대에 정식 데뷔한 베이스 박종민은 송일도와 함께 노르마의 아버지인 오르베소 역으로 출연한다. 그는 “연출을 맡은 알렉스 오예가 현대인도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기 때문에 훨씬 더 흥미롭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스스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새롭게 죽음을 맞이 한다”며 흥미를 유발했다.
노르마의 연적인 아달지사 역는 테레사 이에르볼리노·김정미, 그리고 노르마를 배반하는 폴리오네 역은 마시모 조르다노·이라클리 카히제가 출연한다. 연주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합창은 노이 오페라 코러스가 맡는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