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쾅쾅쾅! 정말 쾅 터졌다. 제목처럼 음악이 셌다.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이다. 미국의 작곡가 존 애덤스(1947년생)가 2005년에 작곡한 오페라 ‘원자폭탄 박사’ 속 음악을 발췌해 심포니로 만들었다. 오페라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끌었던 최초의 핵실험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고뇌, 공포, 절망 등 불안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교향곡은 2007년 BBC프롬스에서 초연됐다. 처음에는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45분 안팎의 작품이었다. 애덤스는 이것을 세 부분으로 구성된 25분 길이의 단악장으로 손을 봤다. 조금 더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는 “영화 제작자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찍은 장면의 부분들을 의미 있게 편집해야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국내 초연했다. 5월 23일(롯데콘서트홀)과 24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두 차례 선보였다. 하루라도 더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23일 공연을 픽했다.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휘봉은 데이비드 로버트슨(1958년생)이 잡았다. 서울시향과는 2023년 이후 두 번째 호흡. 프랑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의 제자다. 1992년 파리에 있는 현대음악연주단체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의 첫 미국인 음악감독이었다. 이후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세인트루이스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애덤스는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로버트슨에게 헌정했다. 헌정 받은 음악가의 지휘로 듣는 연주라 더 의미가 깊었다.

첫 부분은 ‘실험실(The Laboratory)’이다. 1막의 서곡에서 가져왔다. 3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핵폭발, 그리고 그 이후의 폐허를 실감나게 그렸다. 팀파니를 비롯한 차임벨, 크로탈, 글로켄슈필, 베이스드럼, 선더시트, 탐탐, 심벌즈, 공 등 다양한 타악기가 소리를 쏟아냈다. 무대 뒤쪽에 죽 늘어선 ‘신기한 모습’의 악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팀파니는 세상의 파괴자 얼굴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불규칙한 금관의 팡파르는 피할 수 없는 치명적 방사선을 분출했다. 3대의 트롬본 가운데 1대는 기립해 연주했다.

그 다음은 2막의 3장을 활용한 ‘공황(Panic)’. 핵실험이 개시되기 몇 시간 전이다. 원자폭탄 폭발 직전의 시험장에 격렬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지만 연구자들은 핵실험을 늦추지 않는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고함이 트롬본으로 들려온다. 장군과 과학자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카운트다운을 기다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맷 데이먼이 그로브스 장군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를 연기했다.

세 번째 부분은 ‘트리니티(Trinity)’, 즉 ‘삼위일체’다. 1막 마지막에서 오펜하이머가 부르는 아리아 ‘Batter My Heart’를 이용했다. 존 던의 소네트 ‘삼위일체의 하나님, 내 마음을 치소서’를 가사로 삼아 되돌릴 수 없는 절망적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첫 핵실험 코드네임을 ‘트리니티’라고 명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원작 오페라의 바리톤 음성을 트럼펫 독주(객원수석 정태진)로 들려준다. 분열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던지는 애처로운 호소의 메시지다.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을까. 끝난다는 예고도 없이 곡이 갑자기 마무리됐다.

연주를 마친 뒤 로버트슨은 무대 뒤쪽으로 성큼 달려가 4명의 타악기 주자들을 관객에게 인사시켰다. 금관, 하프, 첼레스타 연주자도 기립시켜 관객의 박수를 받게 했다. 지휘자의 활달한 성격이 드러났다.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로버트슨과 서울시향은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에 앞서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을 2부에서 먼저 연주했다. 이것도 역시 20분이 살짝 넘는 길이의 단악장 형식인데,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애덤스는 이 곡에 영향을 받아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을 45분에서 25분짜리로 리뉴얼했다.

서울시향 전 음악감독인 핀란드 출신의 오스모 벤스케는 시벨리우스 전문가다. 그에게서 습득한 ‘북유럽 음악 DNA’는 단원들의 연주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풀피리를 닮은 아득한 목관 주제, 서정적이고 신비한 현악 주제, 절대자적 트롬본 주제 등이 곡 전체를 통일성 있게 엮어 주었다. 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만이 연주하는 중간 부분은 묵직했다. 신선함, 청량함, 깨끗함 등 북유럽이 주는 대체적 이미지가 가득한 교향곡 뒤에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모습이 강하게 느껴지는 교향곡을 배치한 이유를 대부분의 관객은 공감했으리라.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시벨리우스 음악에는 사람이 없다’고들 한다. 음악이 표출하는 거대한 대자연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서울시향의 시벨리우스 7번은 사람이 있는 음악이었다. 숲의 어딘가 그가 피우는 한자락 불길이 보일 듯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음악회의 백미는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박사 교향곡’이었다. 금관악기의 강렬하고 불길한 포효와 타악기들의 발호, 콜레뇨로 두드리는 더블베이스의 저음이 불안의 시대를 적확하게 묘사했다. 석달치 금관악기 생연주를 충전한 느낌이다. 금관의 무한리필이었다”고 평했다.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1부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1979년생)의 시간. 바흐트랙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2023년 1위, 2024년 4위)로 곳곳에서 러브콜이 쇄도한다. 서울시향과는 이번이 두 번째 협연이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상주음악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스포트라이트 아티스트,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의 상주음악가로 활동했다. 현재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협주곡의 얼굴을 한 서사시’라고 불리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네 악장 형식에 러닝타임은 50분에 이른다. 즉흥적인 카덴차가 없으며 피아노와 관현악이 대등하게 음악을 이끈다. 호른을 비중 있게 넣었고 느린 악장에서 첼로가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부분은 교향곡 2번을 연상시킨다.

1악장(빠르게, 지나치지 않게) 첫 부분에 등장하는 호른(객원수석 홍콩필하모닉 린 지안)은 높은 산 정상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닮았다. 그냥 산이 아니라 눈 덮인 산이다. 호른이라는 악기의 서정성을 이렇게 멋지게 드러낼 수 있다니! 놀라운 스킬이다. 흰색 무리가 왼쪽으로 살짝 움직이자 피아노가 콧노래를 부르듯 뒤를 따랐다. 이탈리아 북부의 선선한 바람도 묻어 나왔다. 피아노는 화려한 독주를 이어가며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호른은 “나 여기 있소”하며 이후 세 차례 더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신스틸러(Scene Stealer) 호른’이다.

폭풍우 치듯 피아노가 매서운 얼굴로 다가온다. 2악장(빠르게, 열정적으로)은 스케르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섬세한 병행 선율로 피아노를 달랜다. 이에 피아노도 격정을 내려놓는다. 중간 부분에서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미뉴에트를 떠올리게 하며,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 후 다시 힘찬 주제로 컴백한다.

3악장(느리게)은 아름다운 첼로 파트(객원수석 주연선)와 영롱한 피아노의 음색이 귀를 사로잡는다. 퍼펙트 케미다. 피아노맨도 첼로 독주가 이어질 때 연주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브람스도 이 첼로 선율에 홀딱 반했다. 나중에 가곡 ‘나의 잠은 점점 얕아지고(Op.105-2)’에 다시 사용했다. 염세적 감성이 느껴지는 중간부 클라리넷 독주는 가곡 ‘죽음에의 동경(Op.86-6)’ 후반부에서 따왔다.

조금의 쉼도 없이 곧바로 4악장(조금 빠르게, 우아하게)으로 이어졌다. 론도 형식으로, 피아노의 경쾌한 부점 리듬이 주는 춤곡의 활기찬 인상이 지배한다. 피아노와 목관, 현이 다양한 주제를 조화롭게 주고받는다. 마치 이탈리아 여행처럼 지루함 없이 음악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로버트슨은 공연 전 인터뷰에서 “키릴은 마치 모든 작곡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고, 이미 그들과 밤새 긴 대화를 나눈 듯하다”며 “그는 제가 익숙한 작품들을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그 아름다움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고 찬사를 보냈는데, 이날의 연주가 딱 그랬다. 연주를 마친 게르스타인은 로버트슨과 포옹했다. 그리고는 성큼 첼리스트에게 다가가 “오늘 당신 최고였어요”라는 마음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류태형 평론가는 게르스타인의 연주에 살짝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브람스 협주곡 2번은 피아니스트의 많은 부분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바다처럼 느껴졌다. 반짝이는 음색은 여전했으나 튼튼한 뼈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첼로 독주와 함께한 3악장부터가 좋았다”고 말했다.

<백브피핑> 시베리우스 뒤에 애덤스의 교향곡...여운이 남는 절묘한 프로그래밍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과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음악평론가 허명현은 서울시향과 데이비드 로버트슨, 그리고 키릴 게르스타인의 공연이 끝난 뒤 페이스북에 감상평을 남겼다. 음악의 매력은 다양한 관점이다. 그 관점이 음악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1부는 키릴 게르스타인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이 공룡 같은 작품 안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스스로 원하는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게 대단했다. 때론 모험을 하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 때도 있었고, 때론 오케스트라와 호흡마저 일치시켜 뛰어난 앙상블을 보여주기도 했다. 2악장에선 성부를 일부러 빗겨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악센트를 부여해 낯 설면서도 새로운 음악을 보여주고, 3악장에선 어딘가 옛 피아니스트로 부활했다. 앞으로 작품들을 함께 할 때마다 이 피아니스트의 매력을 계속 발견할 것 같다.

2부에 연주된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은 정말 많이 좋아하는 작품인데, 2019년에 오스모 벤스케가 서울시향과 연주했고, 그 후 6년 동안 듣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5년 동안 비행기 이륙할 때 나만의 수면 음악이었고, 작년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기도 하다. 내내 그때 기억들이 몰려와서 행복했다. 물론 연주도 훌륭했다. 소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섞인다. 지휘자가 섬세하게 컨트롤 하는걸 넘어 단원들이 소리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이마 안다. 오스모 벤스케가 시향에 남기고 간 선물이다. 음향 블록을 제대로 쌓아 나간 트롬본 객원 수석이 곡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렸다.

그리고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늘 그렇듯, 정제되었으나 생생했고, 절제되었으나 단단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억지로 드라마를 쥐어짜내지 않고, 다큐멘터리처럼 차분하게 풀어낸다. 악장 구분 없이 흘러가는 것도 참 자연의 흐름 같은데,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클라이막스조차 서서히 밀물처럼 다가온다.

사실 정말로 드라마틱했던건 작품의 배치였다. 프로그래밍이 참 그럴듯하고 느꼈던 건, 이 깊고 고요한 자연의 음악 뒤에 배치된 다음 곡이었다. 존 애덤스의 ‘원자폭탄 박사 교향곡’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열었다. 금관과 타악이 파열음을 내며 터졌고, 자연을 파괴하고 되돌릴 수 없는 문을 열어버린 인간의 역사가 음악으로 등장했다.

마지막 ‘Trinity’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사랑했던 시 ‘Batter my heart, three person’d God’를 트럼펫 솔로로 표현한다. 사실 오페라로 보면 더 절절하게 와닿긴한데, 오펜하이머의 갈등과 절망 그리고 절박한 구원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왜냐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으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심포니 버전은 1막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마치 오펜하이머 내면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것처럼. 참 여운이 남는 프로그래밍이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