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류재준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피아노 모음곡 2번’을 세계 초연한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오푸스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러시아 출신의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다. 지난달은 열세차례나 공연했다. 한 부분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반주, 협연, 솔로 등 만능플레이어다. 하루 두 번 무대에 서기도 한다. 이렇게 러브콜이 쇄도한다는 것은 실력이 입증됐다는 의미다. 가끔 번아웃이 찾아올 법도 한데 지치는 법을 아예 잊었다. 그는 “피아노를 치는 일은 에너지를 쓰는 해로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생기를 줘 건강에 좋다”고 강조한다.
한국과의 첫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 콩쿠르에서 우승했는데 부상으로 아시아 투어를 했고, 그 중 한곳이 서울이었다. 본격적으로 한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13년부터. 원래 폴란드에서 활동했는데 작곡가 류재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국제음악제에 초청했다. 매해 출근도장을 찍으며 한국 팬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2017년부터는 성신여대 음대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아예 한국에 정착했다.
라쉬코프스키는 자신을 한국으로 이끌어준 류재준 작곡가와 각별한 사이다. 2011년부터 꾸준하게 류재준의 피아노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애가 등의 작품을 연주해 왔다. 그는 류재준에 대해 “집 열쇠도 줄 만큼 가까운 가족 같은 친구다”라고 말했다.
작곡가 류재준이 공연에 앞서 자신의 ‘피아노 모음곡 2번’을 세계 초연하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오푸스 제공
라쉬코프스키는 25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이번 독주회에서 그는 류재준의 ‘피아노 모음곡 2번’을 세계 초연했다. 류재준 입장에서는 ‘믿고 맡기는 피아니스트’인 셈이다.
류재준은 2020년 2인 가극 ‘아파트’를 만들었다. ‘경비원’ ‘층간소음’ ‘아파트 구입’ ‘선분양’ ‘기러기 아빠’ ‘명예퇴직’ ‘학교폭력’ ‘택배기사’ 등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가사에 담은 15곡의 가곡과 7곡의 프렐류드로 구성됐다.
이 작품에 들어있는 11개의 곡을 발췌해 ‘피아노 모음곡 2번’을 만들었다. ‘인벤션-토카타-프렐류드-프렐류드Ⅱ-토카타Ⅱ-녹턴-인벤션Ⅱ-녹턴Ⅱ-에튀드-캐논-녹턴Ⅲ’로 재구성했다. 첫 선을 보였지만 프렐류드와 녹턴은 확실히 귀에 쏙쏙 박혔다. 고전적인 형식미 위에 포스트 낭만주의적인 작곡가 특유의 어법이 결합됐다.
류재준은 ‘녹턴Ⅱ’에 대해 “지금도 자주 만나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그렸다”라며 “친구들과 이야기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섬광 같은 청춘의 한 시절을 노래했다”고 말했다.
성용원 음악평론가는 “조성을 근간으로 한 20세기 초의 스크리아빈이나 시마노프스키의 연장선 같았다”라며 “전통을 계승해 자신만의 방식과 어법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레퍼런스이자 위대한 창조의 어머니라는 걸 입증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통에 뿌리를 두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화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혁신성은 류재준의 음악의 특징이다”고 덧붙였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류재준의 ‘피아노 모음곡 2번’을 세계 초연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라쉬코프스키는 1부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연주했다. 알로이지우스 베르트랑의 산문시 ‘밤의 가스파르’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세 곡으로 이루어진 이 위대한 피아노 음악은 시의 분위기와 느낌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반영한 작품이다. 연주자로 하여금 초인적인 비르투오시티와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난곡 중의 난곡이다.
라쉬코프스키가 건반을 누르자 물방울이 톡톡 튀어 올랐다. 어느새 물방울은 잔잔하게 파도치며 물결을 이루었다. 신비롭지만 창백한 파란색이 연상됐다.(제1곡 ‘물의 요정’)
손가락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방금 제1곡에서는 관능적이고 몽환적이었는데 금세 변신했다. 나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돌변했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함과 어찌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반반씩 섞여 흘렀다.(제2곡 ‘교수대’)
라벨은 밀리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보다 더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들려고 했고, 그 염원은 제3곡 ‘스카르보’에서 이루어졌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난쟁이 요정인 스카르보의 악살스러움과 괴기스러움을 그리고 있다. 격렬한 액센트와 숨가쁘게 전환되는 장면들, 질주하는 음표와 옥타브의 향연이 가득하다. 라쉬코프스키는 고도의 테크닉과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효과적으로 믹스하며 음악을 이끌어 나갔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음표를 또렷이 살려내며 격정과 몽환을 자유롭게 오고갔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류재준의 ‘피아노 모음곡 2번’을 세계 초연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마지막 곡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24개의 프렐류드(Op.28)’. 쇼팽 이전의 플렐류드(전주곡)는 자유롭고 즉흥적인 스타일의 악곡으로 흔히 푸가나 춤곡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짤막한 곡으로 쓰였다. 쇼팽은 이런 프렐류드의 개념에서 벗어나 독립된 악곡으로 작곡했고, 24곡을 하나의 전집으로 묶었다.
쇼팽은 피아노에서 나올 수 있는 24개의 모든 조성을 썼다. 평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존경했던 쇼팽은 바흐의 48곡의 전주곡과 푸가를 모은 ‘평균율 클라비어’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라쉬코프스키는 파워와 소프트를 적절히 섞어가며 쇼팽을 어루만졌다. 비교적 우리 귀에 익숙한 4번 e단조, 7번 A장조, 15번 내림D장조 ‘빗방물 전주곡’, 20번 c단조는 특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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