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소리를 키운 건 여러분의 목소리”...‘콜로라투라 속매력’ 선사하는 김성혜

타이틀 ‘라 보체’로 한국데뷔 15주년 리사이틀
더욱 성숙해진 고음 끝판왕 깊어진 소리 선사
​​​​​​​“노래는 고난과 절망을 이기게 해주는 치유약“

민은기 기자 승인 2024.11.05 12:49 | 최종 수정 2024.11.14 17:28 의견 0
소프라노 김성혜가 한국 데뷔 15주년을 맞아 ‘라 보체(La Voce)’라는 타이틀로 리사이틀을 연다. ⓒ데일리한국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지금 저의 목소리를 키운 건 여러분들의 목소리입니다. 10주년 때는 콜로라투라 고유의 ‘찐매력’을 보여드렸다면, 15주년에는 더 성숙해진 콜로라투라의 ‘속매력’을 선사하겠습니다.”

소프라노 김성혜가 한국 데뷔 15주년을 맞아 5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이번 독창회는 사회적기업 툴뮤직과 협업해 준비한 ‘장애인 음악가 육성을 위한 4개 프로젝트’ 중 하나로 개최돼 더욱 의미가 깊다.

공연 타이틀은 ‘라 보체(La Voce)’. 이탈리아어로 ‘목소리’라는 뜻이다. 콜로라투라(coloratura)는 ‘채색한’ ‘색을 입힌’이라는 의미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복잡한 장식음을 정확한 기교로 소화해 내는 화려한 고음의 성악가다. 요즘말로 ‘고음 끝판 여왕’ ‘고막여친 가수’다.

지난달 말 서초동 스타인웨이 갤러리 서울에서 지휘자 김광현과 연습을 하고 있는 김성혜를 만났다. 그는 공연 의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제가 성악가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분발하라며 격려해준 사람이 여러분이었고, 어느 정도 완성된 가수로 활동했을 때 늘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넨 이도 여러분이었다”라며 “결국 저의 목소리를 만든 건 여러분의 목소리였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홀로 빡쎄게 연습’해서 성취한 줄 알았지만, 지금은 모든 성과물이 ‘여러분의 사랑’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는 고백이다.

그러면서 “팬들이 보내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라 보체’라고 제목을 달았다”며 “이번 무대는 저 혼자만의 공연이 아닌 관객 모두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서트다”라고 덧붙였다. ‘생큐! 에브리바디’를 공언한 만큼 최고의 퀄리티를 펼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그의 10주년 독창회(2019년 롯데콘서트홀)도 화제였다. ‘아임 콜로라투라, 아임 김성혜(I’m Coloratura, I’m Kim Sunghye)’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높은 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승부했다. 이제 5년이 흘렀다. 지금은 결이 살짝 달라졌다. “그때는 콜로라투라의 언터처블 스킬과 테크닉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같은 콜로라투라지만 더욱 숙성되고 풍성한 목소리를 담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노래가 빈첸조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에 나오는 ‘Eccomi in lieta vesta...Oh! quante volte(행복의 옷을 입고 있어요...아, 몇 번이던가)’다.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는 이탈리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주인공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해 카풀레티가의 줄리에타와 몬테키가의 로메오로 적었다.

“줄리에타가 아버지의 명령으로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빠집니다. 결혼식 전날 혼례복을 입어보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처지가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몇 번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도 소망이 이뤄지지 않으니 답답하죠. 왈칵 슬픔이 밀려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하프 반주에 맞춰 흐르는 벨리니의 섬세함은 정말 절창입니다.”

콜로라투라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매드신(mad scene), 즉 ‘광란의 장면’도 넣었다. 벨리니의 마지막 오페라 <청교도>에 흐르는 ‘Qui la voce sua soave...Vien diletto(그의 다정한 목소리가...오라 사랑이여)’다. 주인공 엘비라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르는 아리아다. 결혼을 앞둔 신랑 아르투로가 다른 여자와 도망(사실은 왕비를 구한 것임)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쳐서 부르는 노래다.

“세상을 살다보면 돈, 명예 등 많은 유혹에 무릎을 꿇곤 합니다. 지나친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것도 큰 유혹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유혹이죠. 노래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유혹은 더욱 강렬합니다. 그런데 <청교도>의 이 하이라이트 파트는 지나침을 경계하며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한방 크게 터트리지 않지만, 안으로 안으로 극한의 슬픔을 삼키며 더 애를 끊게 만들죠. 울음보다 더 절절합니다.”

소프라노 김성혜가 한국 데뷔 15주년을 맞아 ‘라 보체(La Voce)’라는 타이틀로 리사이틀을 여는 가운데 지휘자 김광현과 연주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데일리한국 제공


독창회의 기본 골격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곡을 한곳에 모으는 형식을 따른다. 이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다. 밋밋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묘안을 짜냈다. 역사상 가장 슬픈 오페라를 꼽으라면 항상 첫 손가락에 꼽히는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변화를 줬다.

곧 엄청난 비극이 몰려올 것임을 암시하는 듯한 심벌즈 소리가 가슴을 때리는 1막 전주곡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이어 엔리코의 아리아 ‘Cruda, funesta smania(잔혹하고, 비통한 이 괴로움)’, 루치아의 아리아 ‘Regnava nel silenzio(깊은 침묵은 밤을 덮고)’, 루치아와 엔리코의 이중창 ‘Soffriva nel pianto(눈물로 고통 받고)’를 연속해서 부른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만 네 곡을 골라 파노라마식으로 연주한다. 오페라 한 막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한 것.

“어렸을 적에는 여러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가 최고의 선물이었잖아요.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춰 다양함(서곡·바리톤 아리아·소프라노 아리아·이중창)을 넣으면서도 ‘편지 퍼포먼스’(정략결혼을 시키려 오빠 엔리코가 몰래 편지를 위조한다)에 악센트를 줬습니다. 살짝 파격을 가미해 새로움을 더했어요. 아예 노래 순서를 바꿔 더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관객들이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모험은 접었습니다.”

김성혜는 이밖에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중 ‘Et incarnatus est(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고)’도 꺼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 누나의 마음(두 사람은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잘츠부르크까지 찾아가 초연했지만, 끝내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아내 콘스탄체가 직접 소프라노를 맡아 이 솔로곡을 불렀지만, 시아버지와 시누이의 얼음장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혹 김성혜의 목소리였다면 오해와 갈등을 풀고 가족의 화합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모차르트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 나오는 콘스탄체의 일편단심 아리아 ‘Ach, ich liebte(아, 나는 사랑했었네)’와 레오 들리브의 흥겨운 가곡 ‘카디스의 처녀들’도 기대되는 곡이다.

“얼마 전 집안 청소를 하다 USB를 하나 발견했어요. 이게 뭔가 하고 꽂았더니 2003년 유학시절 녹음한 노래였어요. 지금보다 훨씬 더 힘이 있고 리릭하더라고요. 음악적 표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통으로 꽉 찬 목소리로 곧잘 노래를 소화했습니다.” 그럼 그때보다 지금 노래가 더 못하다는 말이냐고 짓궂게 질문하자 손사래를 친다. “목소리의 힘은 줄었지만 훨씬 음악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억지로 만들어 채워 놓을 수 없는 영혼의 힘은 지금이 훨씬 강하고요. 또한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부드럽고 고르게 노래하게 됐습니다.”

김성혜는 한국 가곡도 잘 부른다. 지난해 4월 서울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사월 삼십이일(4월 32일)’이라는 제목으로 콘서트를 열었다. 오롯이 팬들을 위한 하루를 새로 만들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였다. 당시 2부를 모두 한국 가곡으로 채워 호평을 받았다.

“한국 가곡은 어릴 때부터 부를 수 있지만 우리 정서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세월이 주는 장점이 있어요. 어느 날 문득 ‘필’이 확 옵니다.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농익은 감정을 느낍니다. 노래하는 맛!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 가곡 2곡을 선사한다. 먼저 ‘얼굴’. 생물교사 심봉석과 음악교사 신귀복이 새 학기 교무회의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지자 딴짓을 하며 5분 만에 완성(1967년)했다는 ‘레전드 노래’다. “고전가곡 또는 전통가곡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 넣고 싶었다”라며 “지금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데다 그리움을 대표하는 곡이라 초이스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희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사심 있는 선곡이기도 하다.

김효근 시·곡의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는 비교적 최근 노래다. 2016년 화가이자 미술교육 전문가인 권정은이 출간한 동명의 그림 에세이를 읽고 감동을 받아 만들었다. 김성혜는 “팍팍한 세상살이를 견디게 해주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예찬하는 노래다”라며 “힘들 때 부르면 눈물도 나지만 또한 힘도 나게 해주는 힐링송이다”라고 설명했다.

소프라노 김성혜가 한국 데뷔 15주년을 맞아 ‘라 보체(La Voce)’라는 타이틀로 리사이틀을 여는 가운데 김광현 지휘자와 연습을 하고 있다. ⓒ데일리한국 제공


지휘자 김광현과 바리톤 김동섭, 그리고 코리아쿱오케스트라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김광현 지휘자와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서곡,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3막 폴로네즈,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페도라> 2막 간주곡 등으로 웅장함을 더한다. 김동섭 바리톤의 어시스트 또한 이번 공연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나오는 알피오의 아리아 ‘Il cavallo scalpita(말은 힘차게 달려)’ 등을 부른다.

김성혜는 음악을 통해 삶의 지혜를 하나 터득했다. “활짝 펴서 지천에 만발한 꽃도 아름답지만, 이 꽃이 시들지 않게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오랫동안 팬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 그 선물을 받고 팬들이 용기를 얻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김성혜가 피날레로 준비한 ‘Glitter and be gay’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곡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캔디드>에서 퀘네공드(영어식으로는 쿠네곤데)가 노래하는 아리아다. 제목은 ‘화사하게 명랑하게’ ‘기쁘고 즐겁게’ 등으로 번역되지만 실제 내용은 딴판이다.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후, 반짝이는 보석과 귀금속을 통해 위안을 얻는 장면에서 나온다.

“2008년에 참가한 콩쿠르에서 이 곡을 불렀어요. 경연이 끝난 뒤 심사위원이었던 준 앤더슨(1957년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깜짝 놀랐죠. ‘동양에서 온 조그만 친구가 이 노래를 부를 줄 몰랐다. 정말 잘했다’라며 칭찬을 해줬어요. 못 잊을 순간입니다. 악보에 사인을 해줬는데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번스타인은 38세 때인 1956년 브로드웨이에서 <캔디드>를 초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작업을 거쳤고, 마지막 손질이 1989년 이루어졌다. 번스타인이 숨지기 한 해 전이다. 그해 12월 런던심포니를 직접 지휘해 공연했는데, 퀘네공드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가 바로 준 앤더슨이다. 이 공연의 라인업은 최강이었다. 제리 하들리(테너), 크리스타 루트비히(메조소프라노), 니콜라이 게다(테너) 등이 무대에 올랐다. <캔디드>는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등 무엇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테크닉이 완벽해야 소화할 수 있는 곡입니다. 더욱이 뮤지컬적 요소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연기도 잘해야 하고요, 울다가 웃는 등 복잡한 감정기복의 변화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살짝 ‘넘사벽’이죠. 이번엔 더 잘해서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곡입니다.”

김성혜의 15주년 리사이틀은 음악에 나눔이 더해진 특별한 무대다. 특별 게스트로 ‘파라솔 클라리넷 앙상블’이 공연한다. 이 앙상블은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각자의 꿈을 실현해오고 있다. 지난해 일곱 번째로 열린 ‘전국 발달장애인 음악축제(GREAT MUSIC FESTIVAL)’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섬집아기’(이흥렬 곡)를 연주한다. 또한 김성혜는 티켓 수익 일부를 12월에 진행되는 툴뮤직장애인음악콩쿠르 후원금으로 기부한다.

“음악 중에서도 특히 성악이 주는 힘은 그 어떤 장르보다 치유 효과가 높습니다.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을 노래할 때마다 그 작곡가의 삶이 지금 현실 세계로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오페라가 영원한 것은 세대를 초월해 인간의 변하지 않은 감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간접경험을 주고 고난과 절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치유약이 어디 있겠어요.”

한편 김성혜와 툴뮤직은 김성혜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독주회’(11월 5일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 ‘툴뮤직 장애인 음악 콩쿠르’(12월 중 이천아트홀 소극장), ‘툴뮤직 장애인 음악 콩쿠르 수상자 음악회’(내년 2월 중 이천아트홀 소극장)를 계속 이어나간다. 이를 통해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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