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1번 1악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가 한국에서의 첫 리사이틀을 ‘베토벤’의 작품으로만 구성한 이유를 알게 됐다. 지금이야 일반적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부르지만, 베토벤은 엄밀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라고 지칭했다. 악성은 두 악기가 동등한 무게로 균형을 이루어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바이올린 소나타 10곡은 이런 신념이 구체화된 결과물이다.
12일 부천아트센터. 제임스 에네스는 오래된 절친 피아니스트 오리온 와이스와 함께 무대에 섰다. 이번 시즌 한국을 포함해 미국, 영국, 노르웨이 등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공연에 앞서 에네스는 “베토벤은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며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연구해 온 인물이다. 이번 독주회가 베토벤의 위대함을 각인시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에네스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됐다. 두 사람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5번, 9번으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베토벤을 보여줬다. 요즘 유행하는 ‘환상 케미’를 펼쳤다. 에네스는 “10개의 소나타 중 제가 고른 세 곡은 베토벤 소나타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공연 후 나머지 7개의 곡도 탐구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는데, 그의 권고를 따른 관객도 적지 않았으리라.
‘1번 D장조(Op.12-1)’로 공연의 문을 열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유기적으로 대화하듯 진행됐고(1악장), 곧이어 바이올린이 주제를 이끌고 피아노가 이를 뒷받침하며 흘렀고(2악장), 마지막엔 경쾌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며 마무리됐다(3악장).
‘5번 F장조(Op.24)’는 베토벤이 공식적으로 ‘봄(Spring)’이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곡의 분위기를 적확하게 나타내주는 잘 뽑은 타이틀이다. 10대와 20대의 푸릇푸릇 사랑의 셀렘과 기대가 가득하다.
1악장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주고받으며 주제를 연주하는데,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처럼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2악장은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담았다. 처음 피아노가 주도해 수줍게 바이올린을 리드하고,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 다시 바이올린이 살짝 고백의 말을 건넨다. 소곤소곤 귀엣말이 연상되는 바이올린의 풍부한 음색이 돋보였다.
3악장은 아주 짧다.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스케르초 악장이다. 3악장의 액티브한 분위기를 이어받은 4악장은 끝까지 피아니스트와의 조화에 귀 기울이게 했다. 지나친 감성 분출 없이 필링을 극대화하는 스킬이 놀랍다.
‘9번 A장조(Op.47)’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릿지타워와의 인연으로 작곡됐고, 브릿지타워가 직접 초연했다. 베토벤은 공연 시간에 맞춰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브릿지타워는 두 번째 악장을 연습하지도 못한 채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악보를 읽어 연주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 결국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에 헌정되어 ‘크로이처(Kreutzer)’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러나 크로이처는 정작 이 작품에 시큰둥했다. 연습하지도 않았고 결국 연주하지도 않았다. 감동을 받은 사람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소설을 썼다.
1악장은 앙상블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모호할 정도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다. 2악장은 느린 서정적 악장이다. 테마를 제시하고 톡특한 변화를 가지는 4개의 변주곡이 이어졌다. “내가 더 잘났어”라며 뻐기지 않고, “네가 더 잘났어”라며 서로 칭찬하는 시간이었다. 3악장은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피아니스트와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5번이 청춘들의 사랑이었다면 9번은 중년의 깊어진 사랑이었다.
앙코르 두 곡도 관객을 사로잡았다. 역시 베토벤을 골랐다. 3번 3악장의 발랄함과 6번 2악장의 목가적인 풍경을 선물했다.
에네스의 이번 퍼펙트 리사이틀은 그와 25년 동고동락하고 있는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엑스-마르시크(EX-Marsick)’와 함께 했다.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인 마르틴 피에르 마르시크(1847~1924)가 생전 연주한 악기다. 에네스는 “마르시크로 인해 더 나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가가 됐다”라고 말할 정도로 약 300년 된 바이올린이 뿜어내는 품격은 엑설런트했다.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무대 위의 신사가 정중하게 말을 건네듯 연주했다. 에네스의 이미지는 바이올린을 든 휴 그랜트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에서 익숙한 두 악기의 팽팽한 대결 양상과는 사뭇 달랐다. 에네스의 바이올린은 거의 빈틈없이 섬세한 피아노의 파도 위를 서핑하는 듯했다. 훨씬 더 날렵하고 세련된 현대적인 연주로 다가왔다. 이렇게 편안하게 마음 놓고 들었던 베토벤 소나타 연주가 또 있었던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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