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나무 그리고 목조 건축물과 함께한 신효선 도편수가 ‘목업 木業’을 출간했다. ⓒ궁편책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옛 건축물을 조사하고 해체하고 수리하는 것은 200년 전, 300년 전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왜곡하면 안돼요. 지금의 시점으로 손을 대면 죄를 짓는 일입니다. 철저하게 그 시대의 눈높이로 판단해야 합니다. 불편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요. 그 불편함이 400년 후, 500년 후에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신효선은 목수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목수였다. 태어날 때부터 ‘목수 DNA’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97년 11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고향인 충북 괴산 감물면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28년 동안 한 우물을 팠다. 단 한 번도 한식 목수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져 보지 않았고, 단 하루도 작업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전국구가 됐다.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로서 지금까지 열네 채의 목조 건축물을 뜯고 고치고 조립했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가 대패질과 톱질 사이사이에 키보드를 두드려 지난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이 ‘목업 木業’이다. 엄연한 전문 학술서임에도 교양서적처럼 술술 읽힌다. 480쪽에 이를 정도로 두툼하지만 풍부한 현장사진이 수록돼 있어 어렵지 않게 도전할 수 있다. 최근 그를 만나 목수로서의 30년 삶을 들었다.

“예전 기록을 찾아보면 목수는 본래 목업으로 불렸어요. ‘고려사’에 따르면 목업 가운데 우두머리를 목업지유라고 호칭했어요. 사이즈가 큰 공사를 할 때는 부두목 격인 석업지유를 두고 그 밑에 목업행수교위, 화업, 소목장, 조각장, 행수대장 등 다섯 명을 배치해 일을 분담했죠. 목업행수교위는 목업지유의 보좌관 역할을 맡았어요.”

어려운 용어를 쉽게 풀어 가르쳐준다. 설명을 듣고 보니 목수보다는 목업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한국전쟁으로 이어진 60여년의 시간은 우리 건축의 암흑기였다. 목수 대부분은 일본 사람들 밑에서 생존을 위해 일했다. 입에 풀칠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다. 집을 잘 짓는 것보다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양적 팽창에 집중했다. 한양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한옥 건축이 이루어졌다. 북촌과 서촌의 많은 기와집도 이때 만들어 졌다.

속도가 중요하다 보니 빨리빨리 건축이 대세였다. 안타깝게도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현편수(기둥·보·지붕구조 등을 맡은 기술자)의 역할이 축소됐다. 그 결과는 상처가 컸다. 근대에 복원된 기와집의 처마 선은 참담하다. 맞배지붕의 경우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 오래고 팔작지붕은 국적 모를 선을 그리고 있다. 다들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따라한다. 두 세대의 단절 폐해는 골이 깊었다.

일평생 나무 그리고 목조 건축물과 함께한 신효선 도편수가 ‘목업 木業’을 출간했다. ⓒ궁편책 제공


“지금 남아있는 한옥촌의 건물을 보면 대부분 서까래가 짧고 수려한 곡선이 없어요. 정현편수들은 자신들의 쓰임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씁쓸하게 목도했을 겁니다. 60여년 동안 전통 건축의 기준에서 대형 건물을 신축한 사례가 없어요. 특이한 것은 한양에 대규모 기와촌이 형성될 즈음 뛰어난 목수들이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행히도 그 분들은 지방에 자신들의 기능을 잘 남겨 놓았습니다.”

‘다행’이라는 말에 저절로 안도의 숨이 나왔다. 충북 보은에 있는 선병국 가옥이 대표적이다. 처마 선과 연목(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구성을 보면 운현궁 노락당, 칭경기념비전과 유사한 모습이다.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 도편수를 맡았던 이승업의 제자가 지은 건물이다. 지금 시대의 처마 선과는 그 느낌과 구조적 안정성이 매우 상이하다. 이게 우리의 원형과 가깝다.

신 도편수는 “암울했던 역사로 인해 선조들의 맥이 끊겼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곳곳에 남겨진 유산들이 있으니 우리의 방식대로 알아 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위 부재 하나 하나를 조사하는 과정이 전통을 잇는 과정이다”라며 “목조 건물의 해체 보수는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다”라고 강조했다.

신효선은 법고창신, 온고지신의 실천자다. 그의 열린 마인드는 공구 사용에서도 나타난다. 목조 건물 보수시 전동 공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황에 맞게 수공구와 전동공구를 적절히 믹스해 쓴다. 막연히 수공구만 고집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도리어 작업을 망치기 쉽다.

“정답과 정답이 아닌 것을 가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현장을 누비며 최선을 다한 과정과 결과의 기록, 그것뿐입니다. 현재 몇 가지는 특허를 출원한 상태인데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그 신뢰도로 많은 기능인에게 널리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올바른 시공법을 통해 더욱 좋은 개발 품목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는 마흔 살에 처음 헌집을 고쳤다. 충북 옥천에 있는 영모재였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제사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배운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양식이 나왔다”라며 “특히 처마 선이 달랐다.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건물이다”고 말했다.

목조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은 기능인이다. 기술자마다 제각각의 해체 방법과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다. 통일된 기준이 없다. 해체 부재의 표기법이 없다. 뜯은 뒤에도 어디 있던 부재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주먹구구다.

‘한식 목수’ ‘문화재 수리 기능자’ 등 여러 직책으로 불리는 신효선 도편수가 목조건축물 해체·수리·복원 30년의 기록을 담은 ‘목업 木業’을 출간했다. ⓒ궁편책 제공

그래서 책을 썼다. 제대로 된 부재 표기법만 있어도 해당 부재의 위치, 상태, 원형 유무, 보수 방향 지시 등 각종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관리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소개하는 방법이 정답이 아니라도 말한다. 솔루션 가운데 하나를 제공할 뿐이며, 더 좋은 방법과 기술이 나오면 그것을 그때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신 도편수는 어쨌든 업적을 쌓았다. 전통 목조 건축물의 해체와 보수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은 지금, 전례 없던 기준점을 만들었다. 조사 주기표와 분류 야장 등 ‘목업’에 수록된 자료들이 그것이다.

집을 해체하면서 나오는 목재 따위를 일목요연하게 번호를 적어 차례대로 기록해 표로 만드는 법과 세밀한 측량이 필요한 야외 작업을 할 때 필요한 자료를 빠지지 않게 써넣어 작성하는 법을 만들었다. 체계와 기준이 없어 시행착오를 겪는, 그리고 자기와 같이 최선을 두고 고민하는 한식 목수들에게 이 책이 하나의 길라잡이로 사용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광화문과 숭례문의 복원 작업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숭례문의 경우엔 전문가들이 2권짜리 보고서를 남겼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수리했습니다”라고는 나와 있지만 “4000개의 부재를 이렇게 해체했고, 이렇게 고쳤고, 이렇게 복원했습니다”라는 구체적 사실은 없다. 후세에 전해줄 데이터가 없는 셈이다.

숭례문 복원 때 회룡틀(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기구)을 썼다고 한다. 기록을 제대로 남겨 놓지 않아 궁금했다. 그래서 질문했다. 당시 참여했던 목수들에게 “몇 명이서 어떤 작업을 했느냐”고 6하 원칙에 따라 설명해달라고 하니 버럭 화를 낸다. “이 분들도 제대로 안해봤구나, 모르는 구나”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떤 부분이 낡았다고 무조건 새 것으로 끼워 넣으면 안 됩니다. 최대한 그대로 살려야 할 곳은 살려야 합니다. 그런 작업이 수고스럽지만, 그래야 진정한 복원입니다. 집도 사람하고 비슷해요. 뜯어보면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집도 없어요. 각 시대별로 만든 사람이 모두 다릅니다. 꼼꼼하게 조사해보면 이 사람이 여기서 실수했구나, 저거는 노력했구나 등등이 다 보입니다.”

충남 논산 노강서원 강당(보물 제1746호)의 해체·수리·조사는 신효선에게 ‘배움’이고 ‘아픔’이었다. 건물을 뜯는 데 꼬박 7개월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한 달 정도 소요되는데 허투루 할 수 없어 일곱 달을 매달렸다. 집요한 신효선이다.

“근대에 들어 이미 세 번을 고친 건물입니다. 그런데 세 번 모두 다 잘못 수리했어요. 옛 건축물인데 현대 건축물을 대하는 마인드로 건물을 수리했기 때문에 실패했죠.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죠.”

속상한 일도 겪었다.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술을 탈취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조립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처음 ‘목업’ 원고에는 이 과정을 소상하게 적었으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과감하게 뺐다.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후배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한식 목수’ ‘문화재 수리 기능자’ 등 여러 직책으로 불리는 신효선 도편수가 목조건축물 해체·수리·복원 30년의 기록을 담은 ‘목업 木業’을 출간했다. ⓒ궁편책 제공

상량은 목조 건축물에서 종도리(마룻도리)를 올려놓는 일을 뜻한다. 종도리는 서까래 밑에 가로로 길게 놓이는 도리 부재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두는 것으로, 서까래를 걸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다는 점에서 건물 골격이 완성되는 단계로 본다.

예부터 상량을 할 때는 별도 의식을 진행하고 날짜, 이력, 과정 등을 적은 글을 종도리에 직접 묵서(먹물로 쓴 글씨)로 쓰거나 종이에 쓴 상량문을 넣어 밀봉하기도 했다. 이런 건축 공사 과정의 기록을 통해 그 건축물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상량문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글도 있어요.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원통보전 상량문에는 ‘오늘이 상량 날인데 밥도 없고 떡도 없네’라는 글이 적혀 있어요. 열심히 일 했는데 대접이 소홀했나 봅니다. 그 불만을 몰래 적어 ‘소심 복수’를 한 것이죠. 충북 영동 황간향교 대성전에서는 모두 5개의 상량문을 발견했어요. 창건, 중건, 수리 등 모두 다섯 차례 손을 봤음을 남겨 놓았죠.”

충북 괴산군의 괴산향교 대성전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사또가 새벽 4시에 나와 상량을 지켜보고, 1주일 간격으로 상량이 이루어졌고. 작업 인원이 몇 명이었다는 등의 꼼꼼기록이 적혀 있다. 신 도편수는 “전체 공사 투입 인원까지 유추해 짐작할 수 있다”며 “작업한 사람의 개인적 성향까지 알 수 있어 지문과 같다”고 설명했다.

‘목업’은 지난해 3관왕을 차지했다. 한국출판학회가 선정한 올해의 책 4권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024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돼, 전국 각지의 도서관 한켠에 꽂히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한 제65회 한국출판문화상 올해의 편집부문 10종에 뽑혔다.

일평생 나무 그리고 목조 건축물과 함께한 신효선 도편수가 ‘목업 木業’을 출간했다. ⓒ궁편책 제공


신 도편수는 책을 출간해준 ‘궁편책’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목수라는 직업이 현실의 언어로는 한물간 직업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줬다.

궁편책 이다겸 편집장은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마땅히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알맹이가 있는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라며 “보통 편집 작업을 마친 뒤 제목을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신 도편수가 달아준 ‘목업’이라는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통 문화재 수리’ ‘한옥 새로 짓기’ 등의 제목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조언이 쇄도했지만 모두 물리쳤다고 덧붙였다.

궁편책 김주원 대표는 “신 목수와 첫 미팅을 하는 날에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는데 프린트한 원고를 소중히 들고 나왔다”며 “회의를 마친 뒤 ‘저는 궁편책을 믿습니다’라며 초등학생처럼 팔짝팔짝 뛰어 전철역을 내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말했다. 신 도편수도 그날 김 대표의 얼굴에서 장인들이 옛집을 바라볼 때의 그 눈빛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신 도편수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 중 하나로 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제528호)를 꼽았다. 원래 제천시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면서 지금의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겼다.

그는 “고려, 조선, 근대 세 가지 양식이 복합되어 있는 건물이다. 특히 단순하면서도 맵시 있는 고려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다”면서도 “좌측에 익랑(날개가 달린 누각)이 붙어있어 독특한데 복원 위치가 달라져서 아쉽다”고 설명했다.

책이 나와 주변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은 많이 들었느냐고 질문했더니 손사래를 친다. 전통 목조 건축계에서 더 왕따 신세가 됐다. 그런데도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선배들을 위해 쓴 게 아니라 후배들에게 도움 됐으며 하는 마음으로 썼으니 다 감내할 수 있다는 대범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실무자의 뼈 때리는 외침이 계속 귓전에 남았다.

“헌집이 제게는 교과서이고 텍스트입니다. 저는 그것을 통해 배우는 것뿐입니다. 후배들에게 가이드가 됐으면 하는 게 저의 목표고 희망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도자기 파편 하나 나오면 호들갑을 떠는 데, 200년 이상 버티고 있는 건축물 기둥 하나에는 그 만큼의 사랑을 주지 않아 속상합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