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곽효아가 28일 서울 서초동 로데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최윤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다. ⓒ곽효아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움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있을까/ 후회투성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한국 가곡 ‘시간에 기대어’(최진 시·곡)는 남자 성악가의 시그니처 곡 중 하나다. 처음 부르고 음반 녹음한 바리톤 고성현의 넘사벽 영향 때문인지, 여자 성악가 입장에서는 선뜻 도전하기 어려운 곡으로 인식됐다. 실제 무대에서 여성이 부르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다.
28일, 서울 서초동 로데아트센터 콘서트홀. 메조소프라노 곽효아(郭晓雅)가 ‘시간에 기대어’를 불렀다. 한국에서의 첫 리사이틀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 그런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억하고 추억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곽효아는 이런 감정을 잘 살려내며 노래했다. 진귀한 장면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중국 출신 성악가라는 점. 중국 발음으로는 ‘궈 샤오야(Xiaoya Guo)’로 불린다. 딕션이 좋다.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다. 또박또박 발음이 귀에 꽂혔다.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 등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 알고 불렀다. 무조건 암기가 아니라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내는 스킬이 놀랍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17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한 덕에 언어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모국어인 중국어 외에도 러시아어·영어·한국어에도 능통해 각 나라의 성악곡을 자유자재로 부를 수 있다. 지금도 외국 생활은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에서 성악을 시작했다. 2008년 러시아 모스크바로 건너가 그네신 음악 아카데미에서 성악과 오페라를 전공했고, 학사(2012년)와 석사(2014년) 과정을 졸업했다. 2015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갔다. 맨해튼 음악원에 입학해 2019년 성악과와 오페라과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뉴욕의 오페라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롱 아일랜드 음악원에서 성악과 강사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중국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곽효아가 28일 서울 서초동 로데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한국 첫 리사이틀을 열었다. ⓒ곽효아 제공
하이라이트 부분을 이끌어 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교과서로만 배운 한국어가 아니라 생활 밀착형 한국어다. 그는 뉴욕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한인교회를 다녔다. 이게 한국어의 날개가 됐다.
“교회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다”며 “최고의 선생님들 덕에 딕션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자랑했다. 교회에서 메조소프라노 솔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친구들이 멋진 한국 가곡을 소개해줘 역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리사이틀의 타이틀은 ‘정(情)’이다. 곽효아는 이 복합적 마음의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공연에 앞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 가곡은 느낌이 참 좋다. 부르면 부를수록 사랑의 감정이 샘솟는다. 애틋함이 가득한데, 결국엔 왈칵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다른 나라 노래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유의 정서다. 이런 필링은 정으로 통하고, 이 정은 또한 사랑으로 연결된다”고 밝혔다.
‘마중’(허림 시·윤학준 곡)도 들려줬는데, 이것 또한 절창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 한국 가곡이다.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있을게/ 꽃으로 서있을게” 부드럽고 깊이 있는 음색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곽효아는 다양한 레퍼토리 구성으로 앙코르를 포함해 모두 열두 곡을 연주했다. 중국 노래도 두 곡 넣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듣고 흥얼흥얼하던 곡들이다. 류청 작곡의 ‘월인가(越人歌)’와 왕룡 작곡의 ‘산지고(山之高)’다.
춘추시대 초나라 왕자 자습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월나라 뱃사공이 노를 저었다.왕자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기쁨과 설렘을 담은 노래가 ‘월인가’다. 곽효아의 말에 따르면 요즘말로 살짝 ‘브로맨스’를 풍기는 곡이다. 자신의 은밀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낸 마지막 구절은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지고’는 남송 말기에 요절한 비운의 여류시인 장옥랑의 시를 노래러 만들었다. “산은 높고 달은 밝은데/ 임 향한 내 마음은 변할 길이 없고/ 우리 함께 백년지약을 맺은 것이 어제 같거늘/ 어이하여 이른 이별인가/ 아침비가 내리니 내 마음도 흐리구나/ 천리상사를 밝히는 붉은 달아” 곽효아는 백년해로를 약속한 지 하루 만에 멀리 떠나는 약혼자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토해냈다.
오페라 장르에서 메조소프라노는 손해를 본다. 착한 주인공 소프라노의 빈대 편에 서는 못된 배역을 주로 맡는다. 테너와 바리톤의 관계와 비슷한 구조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나쁜 여자에 끌리지 않는가. 그만큼 치명적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전담한다. 곽효아는 파르나체와 부이용 공작부인을 오가며 관객을 홀렸다.
모차르트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는 왕(미트리다테)과 두 아들(파르나체와 시파레)이 여자 한 명(아스파시아)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막장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아버지와 대립하는 파르나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복수를 결심하며 ‘Va, va l’error mio palesa(가서 나의 잘못을 폭로하라)’를 부른다. 독기 뿜어져 나오는 분노 표출이 압권이었다.
칠레아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에는 독이 뭍은 제비꽃다발의 냄새를 맡게 해 연적 아드리아나를 살해하려는 부이용 공작부인의 사악한 모습이 나온다. 드라마틱하게 ‘Acerba volutta, dolce tortura(쓰디 쓴 즐거움, 달콤한 고통)’를 부르며 극적인 장면을 살려냈다.
곽효아는 또한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 등 각 나라의 가곡으로 음악투어를 떠났다. 슈베르트 ‘Der Tod und das Mädchen(죽음과 소녀)’, 뒤파르크 ‘Le manoir de Rosamonde(로즈몽드의 정원)’, 베르디 ‘Non t’accostare all’urna(무덤에 가까이 오지 마오)’, 라흐마니노프 ‘Пора(때가 되었다)’, 보울스 ‘Sugar in the Cane(사탕수수 속 설탕)’으로 관객의 고막여친이 됐다.
이번 공연에는 피아니스트 최윤희가 든든한 파트너로 나섰다. 리사이틀에 앞서 지난해 진행한 퍼포먼스 때 처음 만났고, 이번에 제대로 환상의 호흡을 맞췄다. 최윤희는 ‘슈베르티아데 서울’을 만들어 6년 전부터 꾸준하게 유튜브에서 활동하고 있다.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밤’이라는 뜻으로 슈베르트가 살아있었을 당시 그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모임이다. 최윤희도 알음알음 손발 맞는 연주자들과 함께 슈베르트 음악 등을 주로 연주하고 있다.
곽효아는 지금까지 한국은 일곱 번 방문했다. 가장 인상 깊은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은평구”라고 단호박 대답을 내놓았다. “동네가 조용해요. 그리고 이번에 피아노 반주를 맡은 최윤희 선생님 댁과도 가깝고요. 제겐 행운의 장소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두 사람이 빚어낸 열두 곡의 케미는 끈끈한 우정의 힘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앙코르는 김동현 시·이원주 곡의 ‘연(緣)’을 선곡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 속에서 내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 저의 리사이틀을 찾은 관객 여러분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아 영원한 그리움/ 나 차가운 눈물에 지워도/ 기다리네 기나긴 내 사랑/ 미련을 버리고 편히 잠들라/ 그 무엇도 남지 않을 듯 꼭 나를 기억해 주오/ 숨결까지 눈물까지 내 모든 것 그대에게로”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