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로 타로가 부천아트센터에서 프랑스 샹송을 클래식 음악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샹송 클래식’에 흠뻑 빠졌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로 타로(Alexandre Tharaud)가 파리의 가을을 부천으로 몰고 왔다. 프랑스 대중가요 샹송(Chanson)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지금 계절에 딱 들어맞는 선곡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에펠탑, 유람선 떠있는 센강, 마로니에·플라타너스 낙엽 뒹구는 샹젤리제 풍경이 그의 피아노 선율을 타고 한꺼번에 밀려왔다. 음악으로 떠나는 파리 투어다.
11월 첫날, 알렉상드로 타로는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부천아트센터가 올해 야심차게 준비한 ‘프라임 클래식 시리즈(Prime Classic Series)’의 일곱 번째 무대다. 이날은 부천아트센터의 새로운 수장이 된 박은혜 사장의 임기 첫날이기도 했다. 박 사장에게는 잊지 못할 타로가 됐다.
검정 슈트를 입은 타로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K.331)’다. 첫 음을 터치한 뒤 몸을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며 왼쪽 귀를 피아노 쪽으로 가져가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처음 나온 소리의 질감을 파악하려는 의도다.
‘11번’은 말이 필요 없는 유명한 소나타다. 첫 악장은 이례적으로 변주곡 스타일을 보여준다.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이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왼쪽으로 돌고, 직선으로 달리고, 오른쪽으로도 돈다. 어느 순간에는 펄쩍 뛰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인상적이다. 두 번째 악장은 산뜻한 첫 번째 주제와 쌉쌀한 중간 주제의 대비가 묘한 대비의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악장은 ‘alla turca(터키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아예 ‘튀르키예 행진곡’(국명이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바뀌었음)으로 불린다.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에는 이국적 사운드에 더 열광했으리라.
알렉상드로 타로가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관객에게 안사하고 있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타로는 두 편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2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에서 피아니스트 역으로 나왔고,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작곡가 라벨의 전기 영화 ‘볼레로’에서는 음악평론가 역을 맡았다. ‘영화인 타로’다.
음반 녹음 직전에는 특이한 루틴이 있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에마뉘엘 샤브리에의 묘에 꽃을 놓아둔다. “샤브리에가 내게 말을 걸어주고 응원해주는 느낌이다”라고 고백했다.
협연이나 독주회에서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지 않는 점도 독특하다. “연주 도중에 기억력 문제가 생겼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가 문제점을 해결해줬다. “예전에는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가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패드에 악보를 넣어 두고 직접 발로 넘기는 페달을 사용한다”고 했다.
타로는 이어 장 필리프 라모의 ‘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집 a단조(RCT 5)’를 통해 우아한 바로크 양식 모음곡을 맛보게 해줬다. 부드러운 리듬감(제1곡 알라망드)으로 문을 연 뒤, 이를 경쾌하게 발전시켰다(제2곡 쿠랑트). 단조가 아닌 장조로 우아하게 춤을 추고(제3곡 사라방드), 가벼운 꾸밈음이 이곳저곳에서 퍼져 나갔다(제4곡 세 개의 손). 미뉴에트 닮은 아기자기한 팡파르가 터지고(제5곡 팡파리네트), 의기양양한 여인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며 하이라이트를 뽐내고(제6곡 개선), 마침내 주제와 변주로 마무리된다(제7곡 가보트와 6개의 더블).
알렉상드로 타로가 부천아트센터에서 프랑스 샹송을 클래식 음악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1년 파리에 ‘지붕 위의 황소(Le Boeuf Sur Le Toit)’라는 이름의 카바레가 문을 열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셀럽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문사철(문학·사회·철학)이 흐르는 복합적 공간이었다. 여기서 연주된 많은 곡들(대부분 피아노곡)은 프랑스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타로는 이 시기의 히트곡을 모아 ‘지붕 위의 황소’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명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1968년생인 타로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클래식 음악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흥얼대던 옛 노래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지 않은가? 복고 취향의 프랑스 음악 사랑은 샹송을 주제로 한 최근 앨범 ‘피아노송(Pianosong)’으로 이어졌다. 이번 리사이틀은 이 음반 발매를 기념해 열렸다. 샹송에 대한 타로의 오마주 또는 리스펙트의 시간이다.
2부는 프란시스 풀랑크(프랑시스 풀랑)가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에디트 피아프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 à Édith Piaf)’로 시작했다. 열여섯 살 위였던 풀랑크는 비록 장르는 달랐지만 피아프를 존경했고,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곡이다. 작곡가의 열다섯 번째 즉흥곡이기도 하다. 타로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슬픔을 견뎌냈던 한 샹송 여가수의 흔적을 어루만졌다.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는 샹송가수 샤를 트레네의 찐팬이었다.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라는 가명으로 트레네가 부른 노래 6곡을 피아노로 편곡했다. 클래식 음악가가 대중음악 주변을 기웃거리면 눈총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본명을 숨기고 발표한 것.
타로는 그중 한곡인 ‘당신은 당신의 말을 잊어버렸지(Monsieur, vous oubliez votre cheval)’를 연주했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가수의 노래를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 중 한명인 바이센베르크가 재치 넘치는 음악어법으로 풀어냈고, 타로는 자신만의 색을 덧칠해 들려줬다. 이 곡뿐만 아니라 ‘4월, 파리에서(En Avril, à Paris)’도 유명하다. 건반위에 살짝 물기가 떨어졌나 보다. 연주를 마친 뒤 건반을 쓱쓱 닦았다.
19세기 말, 몽마르트 언덕에 있던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에 새로운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에릭 사티였다. 요즘말로 4차원의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있던 ‘부적응자’ 사티는 4년 동안 이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그의 초기작품 ‘3개의 사랑방드’ ‘3개의 짐노페디’ ‘3개의 그노시엔느’(사티 사망 후 3개가 추가돼 지금은 6곡)는 이때 탄생했다.
2층의 한 관객이 갑자기 “브라보!”를 외치자 타로가고개를 돌려 관객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괜찮다는 무언의 사인의 보내고 있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밤무대 생활’ 덕에 사티는 1902년 아주 이질적인 느낌의 ‘당신을 원해요(Je te veux)’를 작곡했다. 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의 연예기간에 만들어졌다. 피아노와 소프라노를 위한 곡이며, 피아노 독주곡이기도 하다. 피아노는 간결하고 세련된 3박자의 왈츠를 뿜어낸다. 심플한 형태지만,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으로 이루어진 선율이 마음을 휘어잡았다. 타로가 연주를 마치자마자 2층 객석에서 한 관객이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쳤다. 곡의 흐름상 박수와 환호를 자제해야 하는 게 예의지만, 많이 감동받았나보다. 타로는 고개를 돌려 관객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괜찮다는 무언의 사인의 보냈다.
타로는 본업이 피아니스트인데도 집에 피아노가 없다. 완전 깜놀이다. 1990년대 집에 있던 피아노를 판 뒤에는 집에 피아노를 두지 않고, 친구의 집이나 스튜디오에서만 연습한다. 독특한 캐릭터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상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다”라고 소개했다. 피아노에만 올인하는 삶보다는 균형잡인 라이프 사이클을 가지고 싶어하는 타로다.
‘지붕 위의 황소’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던 장 비에네르도 트레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도 바이센베르크처럼 트레네의 노래를 자기 스타일에 맞게 어레인지해 ‘샤를 트레네의 두 개의 샹송’을 만들었다. 꿈을 꾸는 듯한 멜로디가 고음역을 떠다니는 ‘시인의 영혼(L’âme des poètes)’, 쇼팽이 20세기를 살았다면 썼을법한 녹턴처럼 들리는 ‘내 젊은 시절(Mes jeunes années)’을 들려줬다. 타로의 피아노는 대조를 이루는 두 곡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솜씨를 뽐냈다.
다시 플랑크로 돌아왔다. 그가 쓴 ‘사랑의 길(Les chemins de l’amour)‘은 성악과 피아노가 함께하는 멜로디(프랑스의 예술가곡)지만 나른한 멜랑콜리가 인상적이라 현재는 악기 독주곡으로도 많이 연주된다.
프로그램 마지막 곡은 타로가 직접 편곡했다. 프랑스 대중음악 거인들의 음악을 하나로 묶었다. 제목은 ‘피아프, 바바라, 조세핀 베이커, 자크 브렐 등을 위한 즉흥곡’. 그들의 히트곡인 ‘파리의 하늘 밑’ ‘사랑의 찬가’ ‘라보엠’ 등을 메들리로 들려줬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짧게 끊어갔다. 설령 곡명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음들이 이어지자 관객 가슴으로 가을이 훅 들어왔다.
알렉상드로 타로가 샹송을 클래식 음악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마친 뒤 팬사인회를 열고 있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앙코르는 3곡을 선물했다. 사티의 ‘짐노페디’ 1번, 피아프의 ‘군중(La foule)’, 마르셀 물루지의 ‘언젠가 넌 알게 될거야(Un jour tu verras)’를 터치했다. 마지막 앙코르가 끝나자마자 한 관객의 텀블러(혹 휴대폰일수도)가 바닥으로 쾅 떨어졌다. 다행이다. 몇초만 늦었으며 피날레를 망칠뻔했다. 관객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가을이 훨씬 더 깊어졌다.
음악칼럼니스트 윤무진은 “고전음악 작곡가들만이 고전으로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잊히지 않는 멜로디와 분위기를 머금은 노래들이 시대를 가리지 않고 있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로는 오늘 마지막 곡으로 청중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라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음악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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