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금도 계속되는 엘레나와 아리고의 비극...‘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긴 여운

국립오페라단 성공적 초연...극명한 색채대비 어필
서선영·강요셉·양준모·최웅조 등 고난도 가창 감동

박정옥 기자 승인 2022.06.07 17:20 | 최종 수정 2022.06.08 08:28 의견 0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주인공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 등이 5막 마지막 장면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결국 엄청난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면은 생각보다 더 ‘비극적’이었다. 두 번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 넘게 숨 가쁘게 달려온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는 처절한 트레저디(tragedy)의 순간에 모든 것이 멈추며 막을 내렸다. 마치 찰칵 한 장의 스냅 사진처럼.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 이런 극적인 클로징이 오페라 무대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며 긴 여운을 남기는 효과적인 장치로 쓰였다.

오렌지색과 하늘색 열매가 매달린 하얀 나무 한그루가 1막에 이어 마지막 5막에도 무대 한가운데 등장했다. 오렌지색과 하늘색 두 빛깔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 즉 억압받는 집단과 억압하는 집단을 상징한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오렌지색 옷을 입은 시칠리아인들은 독립의 열망을 불태우며 환호했고, ‘점령군’으로 군림했던 하늘색 옷을 입은 프랑스인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무장봉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엘레나 서선영’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 어떤 사운드도 나오지 않고 그냥 표정으로 비극의 장면을 잘 포착해 더 애절했다. ‘아리고 강요셉’은 바닥에 싸늘한 주검이 돼 나뒹굴고 있었다. 두 사람만 유일하게 흰옷을 입고 있다. 두 집단의 용서와 화합을 보여주는 컬러였지만,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오렌지색과 하늘색 겉옷을 벋어 던지지 못했다. 새드엔딩으로 끝났다.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60주년을 맞아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를 국내 초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60주년을 맞아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를 국내 초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60주년을 맞아 주세페 베르디의 걸작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를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초연했다. 4일 공연을 감상했다. 1855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첫선을 보였으니, 무려 167년 만에 한국 관객을 만난 셈이다.

이 작품은 1282년 프랑스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던 시칠리아인들이 부활절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투쟁에 나선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다룬 시대극이다. 프랑스 군인이 시칠리아 여인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격분한 시칠리아인들이 성당의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수많은 프랑스인을 살해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연출을 맡은 파비오 체레사는 영리했다. 지난 2016년 국립오페라단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에서 감각적인 연출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에도 입에 오르내릴 만큼 빛나는 솜씨를 뽐냈다. 무대는 군더더기 없이 심플했다. 2막의 범선, 3막의 섬, 4막의 행성은 아주 단조로운 세트였지만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쉴 새 없이 움직여 더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소프라노 서선영이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체레사는 시칠리아인과 프랑스인의 적대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을 오렌지색과 하늘색의 극명한 컬러 대비를 통해 시각화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시대에도 세상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고 있는 적대 관계로 구도를 확장했다. 폭력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엘레나와 아리고의 비극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체레사는 “베르디의 작품에서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목적이다”라며 “관객들이 이런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의상 디자인을 추상화했다”고 말했다.

아리고의 몸에 20m 정도 길게 늘어뜨린 긴 옷자락은 민족, 혈육, 가족, 애국, 배신 등의 복합감정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숙명을 대변했다. 얼굴이 사라져버린 죽은 이들과 천사의 검은 날개·가면 등을 적절하게 사용해 전체 구성을 촘촘하게 이끌어주는 도구로 활용했다.

주역 4명의 빼어난 노래는 ‘완전 귀호강’이었다. 프랑스인에게 오빠를 잃고 복수심을 불태우는 엘레나(소프라노 서선영 분), 고아로 자란 시칠리아의 독립투사 아리고(테너 강요셉 분), 나중에 아리고의 아버지로 밝혀지는 프랑스인 총독 몽포르테(바리톤 양준모 분), 만종 대학살을 주도하는 지도자 프로치다(베이스 최웅조 분)의 가창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극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일등공신이었다.

베이스 최웅조가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바리톤 양준모가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열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프로치다 최웅조는 2막에서 안정적인 호흡과 발성으로 ‘O patria(오 나의 조국)’와 ‘O tu, Palermo(오 그대 팔레르모)’를 잇따라 노래해 베이스의 매력을 선사했다. 굳은 신념을 드러내는 묵직한 울림은 잠자고 있던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몽포르테 양준모는 3막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에 100% 빙의했고, 중간 중간 아버지의 고뇌도 절절하게 잘 드러냈다.

강요셉은 4막에서 갑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몽포르테 임을 알면서 느끼는 심적 갈등을 절묘하게 녹여냈고, 또한 서선영과의 애절한 이중창 역시 관객 마음을 단숨에 홀렸다.

피날레 5막은 ‘서선영의 시간’이었다. 이 오페라의 시그니처 아리아인 ‘Merce, dilette amiche(고맙습니다, 여러분)’에서 고난도 테크닉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지휘자 홍석원은 젊은 거장의 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코리아쿱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섬세함과 웅장함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사운드를 들려줬고, 일명 ‘Sinfonia(신포니아)’로 불리는 서곡에서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먹을 것도 많았던 소문난 잔치를 즐기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는 6월 18일(토)과 19일(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센터에서 다시 공연한다.

/park72@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