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의 뮤즈가 아니라 동등한 업적 남긴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

풍월당 ‘가브리엘레 뮌터’ 새 책 출간
진정한 예술가 뮌터의 삶과 작품 조명

박정옥 기자 승인 2022.07.13 15:15 | 최종 수정 2022.07.13 17:08 의견 0
풍월당이 독일의 여성화가 가브리엘레 뮌터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망한 ‘가브리엘레 뮌터’를 최근 출간했다. 표지에 쓰인 그림은 뮌터가 그린 '안락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여인'. 뮌헨 가브리엘레 뮌터와 요하네스 아이히너 재단 소장. Ⓒ풍월당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가브리엘레 뮌터(1877~1962)는 여성 미술가를 ‘여자 환쟁이’라고 낮잡아 부르고 경멸하던 20세기 초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더 큰 상처는 따로 있었다. 항상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그림자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돼 왔다는 점이다. 즉 ‘칸딘스키의 뮤즈’로만 인식됐다.

현대 미술을 주도하며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구상화를 창조한 업적은 존중받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뮌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뮌터와 칸딘스키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김종호 풍월당 대표가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을 보면 두 사람의 파란만장 스토리가 자세히 나와 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20대에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됐다. 요즘말로 잘 나가는 ‘엄친아’다. 그런 그가 30세에 인생 방향을 180도로 바꿨다. 뮌헨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하고 화가로 새출발을 한다. 그리고 운명의 여자 뮌터를 만났다.

베를린의 유복한 중산층에서 태어난 뮌터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여성을 받아주는 미술학교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에서 온 칸딘스키가 ‘팔랑스’라는 사설 미술학교를 세워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는 칸딘스키의 제자가 됐다. 칸딘스키는 유부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들은 뮌헨 근교의 아름다운 마을 무르나우에 정착한다. 뮌터의 돈으로 구입한 집은 러시아 사람이 산다고 해 마을 사람들이 루센하우스(Russenhaus), 즉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많은 그림을 그렸다. 칸딘스키가 스승이지만, 그도 뮌터의 영향으로 강렬하고 채도가 높은 색상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자 동지였다. 그러나 생활은 행복하면서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재능 있는 여성도 남자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뮌터는 늘 힘들었다.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베레프킨과 야블렌스키’. 렌바흐하우스 소장.


그들 집에는 뮌헨의 대표적 젊은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파울 클레 등이 자주 방문했으며,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커플은 아예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결국 뮌터와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무르나우에서 펼쳤던 일단의 예술적 교류와 합의로 1911년에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유파 ‘청기사파(靑騎士派)’가 탄생했다. ‘청기사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발간한 잡지 ‘청기사’에서 유래했다.

1914년에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뮌터는 자신을 ‘칸딘스키 부인’이라 부르며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쁜 남자’였다. 혁명 러시아의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칸딘스키는 독일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뮌헨이 아닌 베를린에 정착하고 뮌터를 찾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교수가 된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며 크게 유명해진다. 그러나 그런 활약상을 뮌터는 신문을 통해서만 볼 뿐이었다. 그가 본처와 이혼하고 이미 재혼했다는 소식까지도.

나치가 집권하자 칸딘스키는 퇴폐 미술가로 낙인 찍히고, 작품들은 압수돼 소각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자 뮌터는 무르나우 집에 남아있던 칸딘스키의 그림들을 지하실에 몰래 보관했다. 그가 숨긴 그림들은 그의 생명이고 애인이고 자식이었다. 힘들었던 뮌터는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하네스 아이히너(1886~1958)와 결혼하면서 심신을 회복한다. 두 사람은 무르나우에서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정리한다. 그동안에 칸딘스키는 파리로 가서 세계적 추상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1949년 뮌헨에서 열린 청기사파 전시회에는 뮌터가 보관한 칸딘스키의 그림 41점이 걸렸다. 뮌터의 작품은 9점이었다. 죽은 칸딘스키를 대신해 참석한 아내 니나 칸딘스키는 남편의 상속인이자 청기사파의 집행자 역할을 했다. 그는 전후의 피폐한 뮌헨에 파리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니나는 뮌터에게 다가가서 그를 파리로 초대했다. “파리에 남겨진 그의 그림들은 당신에게 흥미로울 겁니다.” 뮌터는 대답했다. “저는 여행하지 않습니다.”

1957년 80세 생일을 맞아 뮌터는 보관하던 유화 80점과 드로잉 330점을 뮌헨의 미술관 렌바흐하우스에 모두 기증했다. 유명한 초상화가 렌바흐의 집이었던 렌바흐하우스는 지금 청기사파의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된, 그리고 젊은 날의 칸딘스키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근대 미술관이 됐다. 다음 해에 아이히너는 갑자기 죽고, 뮌터는 마지막 5년간 혼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뮌터마저 세상을 떠나자 가브리엘레 뮌터와 요하네스 아이히너 재단이 발족하고, 그들이 살던 집은 뮌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개방됐다. 이 집은 뮌터와 그의 두 남자, 칸딘스키와 아이히너라는 세 미술가의 족적이 서린 유산이자 현대미술의 여명기에 바쳐진 기념비다.

최근 현대식으로 새로 확장한 렌바흐하우스에 가면 많은 청기사파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젊은 날의 칸딘스키와 뮌터의 화창한 그림들이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주인들을 대신하여 나란히 걸려 있다.>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밤의 꽃’.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


1962년 85세로 생을 마감한 뮌터를 조명한 책 ‘가브리엘레 뮌터’(풍월당·296쪽·2만9000원)가 최근 출간됐다. 보리스 폰 브라우히취가 썼고, 조이한과 김정근이 옮겼다.

칸딘스키와 연인 관계였던 뮌터는 오랜 기간 미술사에서 칸딘스키로부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만 설명됐다. 이 책은 뮌터를 둘러싼 이런 오해와 부정적 평가를 걷어 내고, 그의 독립적인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제자였던 시기에도 소묘, 사진, 판화 부문에서 칸딘스키를 뛰어넘는 재능을 보였다. 칸딘스키가 “빛 입자의 혁명을 통해 사진은 예술의 경지에 올라섰다”며 예술 매체로서 사진의 가능성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도, 사실은 사진을 일찍부터 다뤘던 뮌터의 영향이다. 또한 칸딘스키는 뮌터가 찍은 사진을 보고 유화를 그렸으며 뮌터가 다뤘던 목판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상호적이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의견에 공감했지만 결코 종속되지 않았다. 그를 따라 추상화를 시도했고 작품도 여러 점 남겼지만, 구상적으로 사물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뛰어난 성과를 이뤘다. 일상적인 대상과 풍경에 대한 애착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다.

뮌터는 청기사 그룹 안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청기사 동료들조차 삶과 예술에서 독자성과 고유함을 유지하려는 뮌터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칸딘스키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뮌터의 작품 세계를 바라보려 했고, 그의 독특한 그림을 깎아내렸다.

“청기사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그사이 좀나방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그에게 열광했던 동료들도 뮌터를 ‘좀나방’에 비유하며 청기사가 해체된 책임을 그의 탓으로 돌렸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을 지닌 청기사 소속 화가들은 동료에서 적이 되고, 전장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청기사는 자연스럽게 해체됐지만, 뮌터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이 책은 뮌터의 삶과 작품에 칸딘스키가 미친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제까지 뮌터를 가리고 있던 수많은 수식어들을 거둬 내고,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뮌터를 다시 보려고 노력한다. 즉 뮌터는 칸딘스키와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 자유롭고 조용하게 작업했으며, 남녀 동료 화가들을 위해 노력을 쏟았고, 한 가지 주제로 다양한 연작을 시도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여자’에 머물지 않고 화가로 이름을 날린 당당한 예술가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19세기 말 “여성이 미술을 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에른스트 굴의 무례한 물음에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뮌터를 다시 수용하는 움직임은 이제야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뮌터뿐 아니라 재능 있는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ark72@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