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옥사와 10옥사 사이에 울려 퍼진 ‘순이삼촌’...서울공연 앞두고 서대문형무소 발표회 뭉클

제주·수원 이어 9월3·4일 세종문화회관 공연
“서울무대 계기로 세계에 4·3사건 알릴 것
반드시 기억해야 똑같은 실수 되풀이 안해“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0 21:29 | 최종 수정 2022.08.10 22:10 의견 0
오는 9월 서울 공연을 앞둔 오페라 ‘순이삼촌’ 출연자들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왼쪽부터 양신국, 강혜명, 김신규, 최승현, 장성일, 김성국. Ⓒ제주4·3평화재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소프라노 강혜명 예술총감독은 폭우가 퍼부은 지난 이틀 동안 새까맣게 속을 태웠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원작으로 한 창작오페라를 9월 3일과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서울 공연을 앞두고 10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발표회를 준비했는데 “비 때문에 못 열리면 어떡하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설쳤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꼭 열고 싶었어요. 광복의 의미가 깊이 새겨진 의미 있는 곳이잖아요. ‘순이삼촌’의 슬픈 스토리와 매치되는 곳이기도 하고요. 제주4·3평화재단 직원들이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한 덕택에 빌릴 수 있었습니다. 외부 행사에는 처음 오픈 해준 걸로 알고 있는데, 너무 고맙죠. 마침 비도 말끔히 물러가고 오히려 따가운 햇볕을 걱정하게 됐네요.”

장소에 많은 공을 들인 효과는 시각적으로도 증명됐다. 붉은 벽돌의 제9옥사와 제10옥사 사이의 잔디밭에서 식전 공연이 열렸다. 멀리 감시탑이 보이고 그 위쪽으로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늘도 도와줬다. 숭고한 풍경이 펼쳐졌다.

테너 이동명(상수 역)이 ‘예나제나 죽은 마을, 다시 이곳에’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순이삼촌 역을 맡은 소프라노 강혜명이 마치 무대에서 등장하듯, 왼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4막에서 부르는 아리아 ‘어진아’를 들려줬다. “어진아, 오 내 아이들아,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길 바랐네. 아, 험악한 세상이 너희를 데려갔구나. 죄 없는 너희를 앗아가고 말았네~” 중간에 독백 부분이 삽입돼 더 뭉클했다. 그리고 출연자 6명이 합창곡 ‘이름 없는 이의 노래’로 장엄한 분위기를 돋웠다. 단 세곡만 들었을 뿐인데 풍성한 9월 공연이 벌써 오버랩됐다.

오는 9월 서울 공연을 앞둔 오페라 ‘순이삼촌’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강혜명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노래 3곡을 마친 뒤 일제강점기 창고 건물을 개조한 공간서 간담회가 이어졌다. 원작자 현기영 작가와 강혜명 예술총감독, 최정훈 작곡가, 김홍식 지휘자가 참석했다. 성악가 6명도 함께 자리했다.

제주4·3사건은 1947~1954년 제주에서 일어난 소요사태와 무력충돌 과정에서 일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2020년까지 공식 집계한 사망자만 1만4532명에 달한다. 소설 ‘순이삼촌’은 4·3 당시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주 출신인 현기영 작가는 4·3사건이 발생한 지 약 30년이 지난 1978년 자신이 어린 시절 보고 겪은 일을 소설로 써 ‘순이삼촌’을 펴냈다. 당시까지도 4·3사건은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금기어였다. 책은 곧 금서로 지정됐다. 보안사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한때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족쇄가 채워졌던 ‘순이삼촌’이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그는 놀라워했다.

현 작가는 “대한민국 심장부인 서울까지 드디어 4·3이 진입하게 됐다”며 “4·3을 겪은 이들의 절규, 외침, 절실함을 모든 국민에게 알릴 것이다”라고 밝혔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지난 2020년 제주에서 2회 초연했다. 지난해에는 제주에서 2회, 수도권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1회 공연했다.

“소설로서의 ‘순이삼촌’은 다소 내성적이고 갇혀있던 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페라로 됐을 땐 그 외침이 방방곡곡에 울리는 거 같고, 여러 사람이 협업해 집단적인 제스처과 음성이 쌓이니 웅장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페라 장르의 설득력을 실감했죠.”

오는 9월 서울 공연을 앞둔 오페라 ‘순이삼촌’ 발표회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현 작가는 “4·3사건만큼 극단적인 ‘떼죽음’은 없었다”며 “이런 일이 한 공동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 구성원들이 모르고 지나간다면 이런 일은 또 되풀이될 것이다”라며 관심을 호소했다. 이어 “4·3을 전국에 알리는 걸 넘어서 세계에 알리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라며 “미국에서 공연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도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준비하면 미국에서도 공연할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며 “내후년에는 일본 공연도 예정돼 있다”고 덧붙였다.

강혜명 예술총감독도 제주 출신이다. 기획·연출·각본뿐만 아니라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그는 “제주도의 예술가로서 사명감을 느껴 작품을 만들게 됐다”며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을 때 현기영 선생님을 무작정 찾아가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고, 4·3평화재단이 참여해줘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초연 때는 3시간이 넘은 아주 긴 오페라였어요. 재연을 하면서 내용을 다듬고 일부 성악가 파트를 연극배우 파트로 바꾸는 등 조금씩 업그레이드하고 있어요. 이번 공연에서는 전체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작가의 요청으로 북촌에 들이닥친 비극의 슬픔을 조금 더 추가할 예정입니다.”

강 예술총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4·3유가족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를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다”라며 “문화예술적으로 이러한 비극을 조명하고 아픔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려했다"고 말했다.

현 작가는 강혜명이 국제적 명성을 가진 가수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며, 젊은 음악가의 도전을 칭찬했다.

“더 좋은 작품도 많을 텐데 ‘순이삼촌’을 무대화하겠다는 생각이 갸륵했죠. 4·3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고 슬픈 일은 사람들이 잘 보려 하지 않아요. 이런 소재로 작품을 만들겠다고 덤벼든 건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오페라를 고정된 양식이 아닌 해체하고 조합시키며 완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는 9월 서울 공연을 앞둔 오페라 ‘순이삼촌’ 발표회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이번 공연에는 제주합창단과 제주교향악단으로 이뤄진 제주도립제주예술단이 함께한다. 제주교향악단을 이끄는 지휘자 김홍식은 “제주교향악단 단원 중에는 실제로 4·3의 아픔을 겪은 가족을 가진 단원들이 있다”며 “모두 제주의 아픔을 연주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공연에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정훈 작곡가는 “강혜명 감독은 많이 연습해 멋진 공연을 올리려는 마음에 저를 볼 때마다 ‘악보 빨리 내놔라’ ‘작품 서둘러 써라’고 닦달했다”라며 “심혈을 기울였는데 결과물이 너무 좋게 나와 기분이 좋다”고 전했다. 그는 관객들에게 명확한 대사를 전달하기 위해 ‘징슈필’을 택했다. 독일에서 유행한 연극 형태의 오페라로 가사와 대사를 적절하게 섞어 공연한다.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대사는 대화체로 해서 연극적 요소를 강화하고,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을 땐 음악으로 몰입도를 높였다.

‘가해자’인 고모부 역할을 맡은 바리톤 장성일은 초연 때부터 계속 붙박이 출연하고 있다. 그는 “나쁜 배역이다 보니 관객들이 철저하게 저를 외면한다. 찬바람이 쌩쌩 분다”라며 “말 붙이는 사람이 없어 솔직히 서러웠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평소 정열적인 카르멘을 독차지 했던 메조소프라노 최승현은 할머니 역을 맡았다. 180도 변신이다. 그는 “똑똑한 사람은 다 죽고, 나같이 쓸데없는 사람만 남아라는 대사는 몇 번을 해도 늘 울컥한다”고 말했다.

4·3을 소재로 한 만큼 공연의 중심에는 제주 예술인들이 포진했다. 도립제주예술단(제주교항악단·제주합창단), 극단가람, 제주4·3평화합창단, 어린이클럽 노래하자춤추자, 밀물현대무용단 등 모두 230여명이 무대에 오른다.

프롤로그 테너로 정호윤·이정원, 순이삼촌으로 강혜명, 상수 역으로 테너 이동명·김신규, 고모부 역으로 바리톤 장성일·김성국, 큰아버지 역으로 바리톤 함석헌·심기복, 할머니 역으로 메조소프라노 최승현, 길수 역으로 바리톤 양신국·고세빈이 출연한다.

이번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4·3특별법 개정안 통과와 4·3희생자 배상·보상 등을 이끌어낸 국민적 관심과 격려에 대한 보답의 마음을 담았다. 국민들에게 바치는 헌정공연으로 열려 이틀간 전석 무료로 공연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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