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⑥] 드뷔시·라벨 등 프랑스 음악에 눈 뜨게 해준 이본느 르페부르

쇼팽 작품 연주의 가장 중요 포인트는 루바토
템포를 약간 흔들어 음과 음의 사이를 만들어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4 13:07 의견 0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연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당 타이 손이 쇼팽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았던 것은 루바토(Rubato·의도적으로 템포를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연주하는 것)다. 리스트가 ‘줄기는 단단하고 움직임이 없는데, 이파리만 떨리듯 움직인다’라고 비유했던 루바토는 이탈리아어로 ‘도둑맞았다’라는 의미다. 템포 루바토는 하나의 프레이즈 가운데 템포를 자유로이 가감해서 연주하는 것이고, 기계적인 정확성을 대신해서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한다. 템포를 약간 흔드는 것, 아주 약간 음과 음의 사이를 만드는 것이 루바토를 의미한다. 손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쇼팽의 작품에서 루바토는 선율의 프레이즈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뿐 아니라 이것이 파악되면 작품의 논리적인 전개도 해결됩니다. 쇼팽 연주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도 이 루바토라고 말할 수 있지요. 오른손은 음악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하고, 왼손은 튼튼한 지주가 되는 리듬을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작품 흐름의 주도권은 아마도 오른손의 아름다운 선율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왼손은 그것을 이끌어내서 세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바토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경험이 루바토라는 것을 자연히 알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규칙을 지키며 생활을 하고, 시간과 규범을 잘 따랐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같은 시간에 돌아오며, 해야 하는 공부나 연습이나 일을 거르지 않고 레일 위를 곧장 달려왔어요. 이런 생활에서는 루바토의 감각을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서방 세계에서도 활동하게 됐고 특히 캐나다에 이주해 살면서 정신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유스러운 시간을 만끽하게 됐고, 한 점 구애받을 것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루바토라는 것이 가진 본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내 기분의 움직임대로 자연스러운 형태의 루바토가 표현됩니다. 루바토는 결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묘한 감각이고, 피아니스트가 스스로 체득하면서 일생 동안 깨달아가는 것, 자유로운 감각,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품을 완성하는 건 집을 짓는 것...악보 초견은 단 시간에 재빨리 할 것

당 타이 손이 쇼팽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았던 것은 의도적으로 템포를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연주하는 루바토였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는 당 타이 손. Ⓒ인터넷 캡처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것을 집을 짓는 작업에 비유하고 있다. “작품의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극적인 것인지, 서정적인 것인지 등을 알 필요가 있는데, 집을 몇 층으로 지을 것인지 구조는 어떤 모양일지 기본부터 디자인하는 것과 다름없죠. 그리고 악보 초견(初見)은 가능한 한 단시간 내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세세히 들여다보지 말고 먼저 전체의 모양을 파악합니다. 천천히라도 좋고 틀려도 좋으니까 전체를 쳐봅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하나씩 음을 정확히 칠 수 있도록 하고 반드시 양손으로 연습합니다. 한손씩 연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곳, 아무리 해도 안되는 곳에 한해서입니다. 양손의 밸런스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서두르지 말고 음을 확인해가며 몇 번이고 연습해갑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전체를 통틀어서 몇 번이나 쳐봅니다. 전부 칠 수 있게 되면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되고 나면 암보를 시작하지요. 암보는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쳐질 수 있게 훈련이 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최종 단계는 사람들 앞에서 몇 차례 쳐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완성된 집을 구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되고 나면 비로소 자신의 레퍼토리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연습할 때 1악장 시작 부분이 마음에 들게 쳐지질 않자, 그 하나의 프레이즈를 하루에 몇 시간씩 여러 날을 연습했다고 한다. 손 역시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다. “레슨 때 선생님이 ‘매일 세 시간 연습해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연습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네 시간 다섯 시간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할 수는 있지만, 머리로 음악을 생각해서 한 시간이라도 집중한다면 그 편이 효과가 더 높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쳐지지 않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그곳만을 집중적으로 뿌리 뽑듯이 연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번의 레슨 때 한 페이지 진도밖에 나가지 못하면 불만스러워하는 학생이 많이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한 번의 레슨에서 정말 한 소절밖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음악 비즈니스에 대해 가르쳐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어머니

당 타이 손의 유년기와 청년 시절에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피아니스트로는 스바이토슬라프 리히테르에 이어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있다. 아르헤리치의 연주에 강한 쇼크을 받았던 것은 1980년의 쇼팽 콩쿠르 오프닝 콘서트 자리에서였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아르헤리치는 오프닝 콘서트에도 출연해서 바르샤바 필과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연주 내내 너무나 강한 감동이 손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그는 오랫동안 망연자실해 있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유년기 그리고 청년 시절의 손에게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피아니스트로는 리히테르에 이어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있다. 1970년에 손의 어머니 리엔이 쇼팽 콩쿠르 참관인으로 초청됐을 때 그가 사갖고 돌아온 라이브 음반 속에는 1965년 이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아르헤리치의 본선 연주가 들어 있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속도감과 스릴이 느껴졌고 게다가 정열적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강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손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지칠 줄 모르고 레코드를 들었다. 이 레코드들은 중요한 선생이 되어 주었고 쇼팽의 음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됐다.

한 번 더 아르헤리치의 연주에 강한 쇼크을 받았던 것은 1980년의 쇼팽 콩쿠르 오프닝 콘서트 자리에서였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아르헤리치는 오프닝 콘서트에도 출연을 해서 바르샤바 필과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연주 내내 너무나 강한 감동이 손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그는 오랫동안 망연자실해 있었다.

아르헤리치는 피아니스틱한 부분을 전면에 내세우며 연주했다. 템포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오케스트라는 간신히 그를 쫓아가고 있는 형세였다. 특히 마지막 악장은 정말 대단했다. 무시무시한 속도에다 엄청난 힘, 광풍과도 같은 연주였다. 그때의 기억에 대해 손은 이렇게 회상한다. “두 번째로 아르헤리치의 대단함을 경험한 거였습니다. 이것은 내 생애에 잊지 못할 귀중한 체험이었지요. 쇼팽도 충격이 강했지만, 그때의 차이콥스키에는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아, 정말 대단했습니다.”

손은 아르헤리치의 모친인 호와니타 아르헤리치를 쇼팽 콩쿠르에서 만났다. 뚱뚱한 몸집에 넉살좋고 정열적이던 호와니타는 음악계에서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헤비 스모커였던 그는 언제나 담배를 입에 물고서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딸과는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호와니타는 파리, 마르타는 제네바에서 서로 떨어져 생활했다. 호와니타는 콩쿠르에서 만난 손에게 이후에도 다양한 도움과 조언을 해주었다. 모스크바와 서방세계는 음악 비즈니스의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고, 확실하게 일을 하는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것,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등도 필요하고 이런 홍보활동에 대해 피아니스트 자신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그때까지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해주고 자신은 깔아주는 멍석 위에서 열심히 피아노를 치기만 하면 됐던 손으로서는 프로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을 때 앞에 널린 여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호와니타는 이때 기꺼이 길 안내를 해주었다.

손이 만났던 또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인물은 피아니스트 이본느 르페브르(1898~1986)였다. 손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학원 과정에서 드미트리 바슈키로프에게 배우기로 결정하기 전에 여러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정부 측에 밝혔지만, 베트남 정부로부터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파울 바두라 스코다(1927~2019)가 배우고 싶은 선생님 제1후보였지만, 오스트리아 빈에 이주할 수가 없었다. 파리의 피에르 생캥도 희망했다. 그러나 역시 이주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주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르페브르에게도 몇 번인가 레슨을 받으러 다닐 수는 있었다. 그 레슨은 손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프랑스 음악의 매력에 눈을 떴다. 손은 이즈음부터 드뷔시, 라벨 등의 프랑스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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