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⑤] 1990년 전설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의 만남 ‘인생 최고의 순간’

콩쿠르 우승 뒤에도 더 배우려 대학원 진학
바슈키로프 교수에게 올바른 연주자세 습득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3 08:00 의견 0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연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당 타이 손이 가장 즐거워했던 일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당시의 모스크바는 국가가 모든 사회 시스템과 문화까지도 철저하게 통제를 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정보도 매우 제한돼 있었고, 영화나 연극도 흥미를 끌 만한 작품들은 아예 상영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화가나 음악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평론가, 철학자, 연극인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지식인 그룹이 몇 개 있었다. 이들은 암암리에 모이고 행동하면서 통제된 사회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문화·자유에의 갈증을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갔다.

손이 유학하던 당시에 그의 형 챤 탄 빈도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서로 아버지가 다른 이들 형제는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손이 수줍음을 많이 타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었던 데 반해, 빈은 활발하고 외향적이어서 언제나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 형 쫓아다니며 영화에 매혹...배경음악으로 쓰인 관현악곡 등에 관심

형은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헤아려서인지 자신과 친구들의 모임에 손을 곧잘 끼워주곤 했다. 비밀리에 모이는 지식인 그룹에서 서방세계의 영화 비디오를 보는 모임이 있는 날이면, 손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손은 재빨리 자신의 동료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친구 몇몇에게 함께 가자고 청해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손은 이런 비밀 모임에서 영화를 볼 때는 언제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금지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늘 그러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처음 접해보는 서방세계의 문화에 숨이 멎을 만큼 감동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이탈리아 영화에 매료됐다. 루키노 비스콘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빅토리오 데 시카, 피에트로 제르미니 감독 같은 사람들의 작품에서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보았던 작품들이 ‘길’ ‘붉은 사막’ ‘종착역’ ‘철도원’ ‘달콤한 생활’ ‘8과 1/2’ ‘기적의 언덕’ ‘아폴론의 지옥’ 등이었다.

손이 가장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비스콘티 감독이었다. 그의 작품인 ‘여름의 폭풍우’ ‘들고양이’ ‘지옥에 빠진 용사들’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트비히/신들의 황혼’ ‘가족의 초상’을 보면서 내용 면에서도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배경에 흐르는 영화음악이었다. 그때까지 줄곧 피아노곡 위주로 치고 들으며 살아왔던 손의 귀에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관현악 작품이나 오페라들은 경이로웠다. 영상의 아름다움을 음악이 이끌어내고 있는 것에 압도당했다.

이 모임에서는 이탈리아 영화뿐 아니라 르네 클레망, 로제 바딤, 루이 말,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를루슈 등 프랑스 감독들의 작품도 많이 상영됐다. 그리고 영화 비디오를 빌려주어 서로 돌려가며 보기도 했는데, 손은 이때에 본 잉그리드 버그만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기도 했다. 손은 이 모임에서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나 발레 공연 티켓을 구해 같이 보러 가기도 했고, 사교 파티도 가끔씩 열렸으며 거기서는 여러 가지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정부가 공인하는 것에는 젊은이들이 흥미를 갖지 않았고, 문제시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지하활동도 활발했고,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소규모 연극 공연장도 많이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 열리는 연극은 홍보를 전혀 하지 않아도 매일 만원이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손은 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남겼던 장편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불가코프는 그로테스크한 면과 함께 풍자를 작품에 자주 담아 현대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키예프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였지만, 진보적인 그룹에 가담해 문필활동을 시작하면서 소설과 희곡 등을 썼는데 결국 그의 작품들은 출판금지와 연극 상연중지 등을 당하게 되어 생전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손은 이렇듯 문학과 영화, 연극 등을 통해 그 나라 고유의 향기가 가득한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 리히테르 초청으로 푸시킨 미술관 홀서 쇼팽 리사이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이다. 당 타이 손은 1990년 리히테르와의 만남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인터넷 캡처


손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영어식으로는 ‘리히터’)와의 만남이다. 리히테르는 1915년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독일인이었던 아버지 테오필은 빈에서 유학하며 피아노와 오르간, 작곡을 공부했던 음악가였다. 나중에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서 그곳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자신의 제자였던 안나와 결혼한 뒤 오데사 음악원 교수가 됐다.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의 기본을 배웠던 리히테르는 그 후 독학으로 피아노 공부를 하고 16세 때 오데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소속의 피아노 반주자가 됐다. 또한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가 겐리히 네이가우스(1888~1964)를 사사했다. 스승 네이가우스는 리히테르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는 음악원의 보통 학생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 즉 시험을 치른다든지 일반 교과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 등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이 뛰어난 제자에 대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아, 나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리히테르의 재능에 감탄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리히테르로부터 계속 무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리히테르는 1945년 전 소련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955년에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음반 녹음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서방세계에서 리히테르의 존재는 소문으로만 들려올 뿐 ‘철의 장막에 가려진 피아니스트’였다.

진정한 거장의 면모를 갖춘 피아니스트의 출현에 서방 세계는 열광했다. 그는 솔로뿐 아니라 성악 반주나 실내악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독일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과 함께 자주 공연했다.

부인인 니나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성악가였는데 두 사람 곁에는 많은 음악가들이 모였다. 보로딘 현악사중주단,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카간의 아내이자 첼리스트였던 나탈리아 구트만, 피아니스트 앨리스 뷔르사라제 등이었다.

이들은 ‘리히테르 패밀리’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 유리 바슈메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히테르 패밀리라니요, 제겐 너무 과분한 얘깁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리히테르는 신과 같은 존재거든요. 하지만 연주를 할 때는 리히테르도 한 사람의 겸허한 인간이 됩니다. 그가 처음 대하는 작품일 때는 제게 작품에 대한 것들을 물어옵니다. 그리고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지요. 이건 거장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나탈리아 구트만의 평가 역시 리히테르가 여러 가지 면에서 ‘대가’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리히테르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잘 읽어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은 곧바로 멀리하지요. 음악에서도 이러한 인간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장식하지 않고 억지로 힘을 넣지 않고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상태의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진실된 삶의 태도와 음악이 존경스러운 겁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어요.”

리히테르는 1960년대부터 세계 각지를 돌며 순회연주를 했고 음반 녹음도 늘어났다. 1964년에는 파리에서 음악제를 시작했고, 1981년부터는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 내부의 홀에서 ‘12월의 타베’라는 겨울 음악제를 주관했다.

1990년 겨울, 손에게 ‘12월의 타베’ 출연 의뢰가 들어왔다. 손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선배이기도 하고, 피아니스트로서도 인간적으로도 존경하고 있는 리히테르로부터 음악제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이 음악제는 해마다 한 가지씩의 주제를 정해서 열리고 있었는데 그 해의 테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다. 소련이 낳은 위대한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리히테르는 파스테르나크가 생전에 사랑했던 3인의 작곡가 브람스, 쇼팽, 스크랴빈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꾸몄다.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는데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서 수상을 사퇴했던 인물이다. 겐리히 네이가우스의 아내였던 지나가 재혼 상대자로 택한 사람이 파스테르나크였는데, 이들은 지나가 데리고 온 두 명의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아들들 가운데 차남은 피아니스트가 된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고, 이 사람이 바로 스타니슬라프 부닌(1985년 제11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아버지다.

리히테르는 스탈린 체제 아래서 예술가, 문학가 등 지식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작품을 발표할 수 없게 된 채로 박해를 받았던 파스테르나크의 심정을 생각하고, 탄생 100주년인 해에 음악으로나마 천상의 파스테르나크를 추모하고자 했다. 그러한 기분을 손은 아플 만큼 잘 느낄 수 있었다.

손의 담당은 물론 쇼팽 연주였다. 이 음악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지만,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푸시킨 미술관의 홀은 400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에 맞춰 개최되는 ‘12월의 타베’는 리히테르의 친한 음악동료나 지인들로 자리가 메워지는 것이다. 손은 이때의 쇼팽 리사이틀과 너무나 아름다웠던 홀, 무거운 존재감으로 다가오던 리히테르의 생전 모습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 “연주는 인상적인데, 참으로 이상한 주법이군”...잘못된 자세 교정 진땀

당 타이 손은 쇼팽 콩쿠르 우승 후에도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해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교수에게 배웠다. 2021년 바슈키로프가 세상을 떠나자 손은 페이스북에 “마법의 음악 세계로 날아갈 날개를 달아준 그대여”라고 글을 적어 추모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모스크바 음악원 첫 해에 손은 나탄슨 교수로부터 지금까지 해온 피아노의 테크닉을 모두 고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프레이징도 기본부터 다시, 포르테도, 피아노도, 드라마틱한 선율도, 서정적인 부분도 모두 고쳐야 한다고 했다. 지시부호가 정확하게 되지 않고서는 소용없다는 거였다.

베트남의 전통음악은 선율이 중시되고 수평적인 흐름이 음악의 형상을 만든다. 수직적인 요소인 리듬은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고 종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별로 필요치 않다고 여겨졌다. 손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음악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약점은 리듬에 있었다. 그것을 나탄슨 교수는 하나부터 다시 바로잡아주었다.

약점을 극복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최초에는 리듬을 몸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나탄슨 교수는 이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야 되고 등등을 직접 쳐가면서 예를 들어가며 보여주었지만 그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시부호가 정확히 지켜지지 않는 것은 베트남 시절에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습했던 데서 기인하는 것도 있었다. 그 피아노는 조율도 불완전하고 건반도 덜걱거릴 정도였으며 페달 상태 역시 엉망이었다. 지시부호대로 정확히 맞추어 건반을 누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탄슨은 프레이징을 만드는 방법과 노래하는 마음도 중요시했다. 여러 테크닉을 사용해서 선율을 노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음악을 배우는 러시아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바르게 치는 자세를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손이나 손가락의 포지션, 어깨에서 힘을 빼는 방법, 악기를 향했을 때의 자세 등을 논리적인 방법으로 완전히 몸에 익힌다.

손은 이런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좋을 대로 자유로운 자세와 그 나름의 방법으로 피아노를 쳤다.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입학시험을 볼 때 교수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적으로는 매우 인상적인 연주인데, 뭔가가 이상하다. 피아노를 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참으로 이상한 주법으로 치고 있다.”

나중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에도 손이 프로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했던 데에는 이런 경험들이 영향을 끼쳤다. 그는 대학원에서 드미트리 바슈키로프(1931~2021)를 사사했다. 바슈키로프 교수는 러시아적인 사상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제자들을 육성하는 일 외에 콘서트 활동 또한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손은 스승을 통해 무대에 서는 음악가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다. 바슈키로프는 전통적인 러시아 주법을 손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즈음의 손은 쇼팽에 대해서도 그렇고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매우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감정을 넣어 치고 있었다. 몸의 움직임도 매우 크게 하고 자세는 앞으로 많이 기울어져 건반에 거의 엎드려 있는 것처럼 연주했다.

이에 대해 바슈키로프는 어깨와 등의 근육을 반듯하게 펴고 자세를 똑바로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어깨와 손에 여분의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며 몸도 너무 많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아주 기본적인 이 사항들도 오랜 동안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연주를 했던 손에게는 어려운 주문이었다. 굳어져온 악습을 올바르게 고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손은 2021년 3월 바슈키로프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함께 찍은 사진 여러 장을 올리고 “마법의 음악세계로 날아갈 날개를 달아준 그대여”라는 뭉클한 글을 남겼다.

손이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이다. 등 근육을 곧게 편 그의 아름다운 연주 자세를 언제나 동경했다. 손이 ‘자세 교정’의 장벽을 넘게 되자, 바슈키로프는 다음의 장벽을 내놓았다. 머리로 작품 전체의 구성을 잘 연구해서 그것을 손가락에 전해주는 방법이었다.

● 모스크바 음악원 4개 유파 중 2개 유파의 스킬 습득

일찍이 타티아나 니콜라예바(1924~1993)는 이러한 주법들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이 기둥이 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니콜라예바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육 전통을 네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것은 위대한 피아니스트 네 사람과 그들에게 교육 받았던 제자들이 면면히 이어 내려오면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전통이 지켜진 것이다.

네 개의 유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겐리히 네이가우스,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 콘스탄틴 이그무노프, 사무엘 페인베르크다. 특히 쇼팽과 스크랴빈 연주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네이가우스, 아카데믹한 연주 스타일로 정확한 기교와 악보에 충실한 것으로 주목받았던 골덴바이저, 시적이고 아름다운 울림과 노래하듯 섬세한 뉘앙스를 가진 개성적 스타일의 이그무노프, 그리고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표정에 빛나는 연주로 39세 때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전곡녹음해서 바흐의 제1인자로 인정받았던 페인베르크. 이 가운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처음 손을 가르쳤던 나탄슨은 페인베르크의 제자였고, 대학원에서 만난 바슈키로프는 골덴바이저의 문하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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