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③] 반지하 깜깜 굴속서 ‘종이 피아노 건반’으로 손가락 연습

끊임없이 질문한 카츠 선생과 6개월간 레슨
계속 우물쭈물 답변 못하자 ‘금붕어’로 불러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1 08:00 의견 0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연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피난을 온 시골 마을에서 나이 어린 당 타이 손이 맡은 일은 아주 많았다. 어머니 타이 티 리엔이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로 바빴기 때문에 어린 아들은 이런저런 가사 일을 도맡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술이 필요한 일은 밥짓기다.

손은 불을 지피는 방법, 가장 효율적으로 밥을 짓는 방법 등을 동네 어른들에게 열심히 배웠다. 불을 때는 연료는 댓잎이었는데, 마을 뒤편에는 넓은 대나무 숲이 있었다. 한밤중에 바람이 불면 대나무 잎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와삭와삭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남달리 예민한 귀를 갖고 있던 손은 그 음을 듣고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곤 했다. 당연히 거센 바람이 부는 밤을 좋아했다. 밥 지을 연료인 댓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서 그걸 모으는 일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댓잎은 너무 빨리 타버리는 특성을 지녔다. 이 때문에 밥 짓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불길이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일정한 화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일곱 살 소년이 이런 테크닉을 마스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한 가지 특기가 더 있었다. 바로 민물게를 잡는 솜씨. 전쟁통에 먹을 것, 특히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지자 마을 어린이들은 모두 민물에 사는 작은 게를 잡으러 다녔다. 특히 더운 날이 게를 잡기에 제격이었다.

● 마을서 민물게 가장 잘 잡아...비결은 ‘쇼팽 루바토’처럼 손가락 살랑살랑

민물게는 날씨가 더우면 깊숙한 구멍을 파고 진흙 안에 몸을 묻는다. 거기에 손을 넣어서 약간 진동을 일으키면 위험을 감지한 게가 손가락을 문다. 그러나 큰 진동으로 흔드는 것은 금물이다. 진동이 너무 커지면, 게가 엄청난 힘으로 손가락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상처가 난다. 몸집이 작고 가늘었던 손은 게가 숨은 진흙 구멍에 팔을 넣을 때 무척이나 유리했다. 또한 피아노를 친 것은 게잡이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손은 게를 잡을 때마다 어머니가 쇼팽의 루바토(연주자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템포를 조금 느리게 하거나 빠르게 하는 것)는 부드럽게 살며시 쳐야 한다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루바토처럼 슬그머니 손가락을 흔들면 백발백중 게가 딸려 나오곤 했다.

이즈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멀리 하노이까지 가서 식량 배급을 받아오는 일이다. 손 앞으로 배급되는 음식 재료는 한달에 설탕 100g, 고기 200g, 쌀 10kg이었다. 이는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관악기나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보다 체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돼 고기를 400g으로 늘려주었다.

손과 어머니 리엔은 자전거로 2~3개월에 한번씩 반나절 정도 걸려서 하노이까지 갔다. 갈 때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짐이 무거워지고, 어린이용 자전거는 불안정해서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달리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어느 날인가, 손은 식량 배급을 타오던 길에 자전거 핸들을 놓쳐서 짐과 함께 도랑에 처박힌 일이 있었다.

배급 타온 식량과 자전거까지 더러운 물에 빠졌다. 그는 울면서도 지금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꼴이 된 아들을 리엔은 눈물 글썽이며 안아주었다. 물을 길어다 쓰는 처지에 도랑에 빠진 아들을 마땅히 씻길 곳도 없었다. 리엔은 손을 데리고,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며 아들이 샤워를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고개를 떨구고 서서 치욕을 삼켜가며 어머니의 간절한 애원소리를 듣고 서있어야 했다.

마을에서는 모든 일을 주민들이 협동해서 했다. 나이 든 노인이라고 해서, 어린 아이라고 해서 빠지는 일이 드물었다. 누군가가 문제를 안고 있으면 모두가 해결을 위해 같이 노력했다. 손은 흡사 하나의 대가족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맛보았다. 이 때의 생활을 통해서 그의 뇌리 속에는 인간과 인간의 따뜻한 관계, 인간과 자연의 만남 등이 깊이 각인됐다. 너무나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그것이 고통스럽다고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음악은 있었습니다. 장난감이 아무 것도 없으니 음악에 집중할 수가 있었지요. 그 때는 음악이 나의 버팀목이 돼주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런 고백을 했다.

● ‘보물 1호’ 종이 피아노 건반은 음악 이미지화하는데 도움

당 타이 손은 종종 “만약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했겠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농사”라고 답한다. 지난 2020년 6월 페이스북에 ‘나의 실내정원에서의 첫 수확: 태국 바질’이라는 사진을 올렸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피난 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즐거운 일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 열리는 콘서트였다. 어머니 리엔이 학생들에게 “오늘밤에 피아노 연주를 할테니까 듣도록 해라”하고 이야기했던 밤이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마을 주민들 모두가 나와서 풀밭 위나 흙 위에 앉아 콘서트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리엔은 집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쇼팽의 마주르카와 녹턴 등을 연주했다. 손도 풀더미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음악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 시간에 느껴지는 신비함은 대단한 것이었다. 달빛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자연과 음악이 하나가 되며, 쇼팽과 빛과 바람과 어둠이 일체가 되는 듯했다. 리엔은 이런 음악회를 가끔씩 열곤 했다.

손은 학교에 다니며 어머니와는 음악 공부를 계속했다. 피난 초기엔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반지하의 깜깜한 굴속에서 종이에 그려진 건반으로 손가락 연습을 하곤 했다. 어릴 때 아버지 당 딘 훙이 그려주었던 오선지를 떠올리며, 손은 스스로 모양과 크기를 가늠해가며 종이에 검정색과 흰색 건반을 그렸다. 이 종이 건반을 소중히 다뤘다. 학교에 들고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이부자리 위에 놓고 매일 손가락 연습을 했다. 이것은 단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고, 음악을 이미지화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종이 건반은 보물이었고, 중요한 친구도 됐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유일한 재산이기도 했다.

마을 초등학교에서 그는 모범생이었다.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한 생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예의바른 아이였다. 아무리 힘든 일에 처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교실은 좁았다. 다섯 명씩 앉게 되어 있는 의자가 학생 수에 비해 모자라 한 의자에 여섯 명이 나란히 앉아야 했다. 모두 몸을 움츠리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했다. 왼손잡이였던 손은 다른 친구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른 손으로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했는데 매우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로부터 이가 옮는 거였다.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있기 때문에 이를 잡아도 바로 머리가 가려웠다. 이것이 심각해지자 피부에도 염증이 일어났다. 리엔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렸다. 피아노를 치려고 의자에 허리를 대면 습진 난 자리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워지면서 제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곧 익숙해졌다. 집집마다 어린이들이 자꾸 병에 걸리고,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옮겨지곤 했지만, 곧 면역이 생겨서 마을 주민 전원이 그런 상태에 익숙해져갔다. 그곳 마을에서의 생활은 전쟁이 시작된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계속됐다. 그 후 하노이로 잠깐 돌아와 있다가 또 다시 1972년에 그곳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그것이 1973년까지 계속됐다.

육체적으로는 큰 고생을 겪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했다. 피난 온 시골 마을 생활에서 그가 얻은 것은 컸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게 됐다. 인내력이 길러졌고 자립심이 강해졌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배우게 됐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인생에서 우선 순위를 두는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단순하고 겸허하게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풍요로운 것에도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조용한 생활을 좋아하고, 나의 페이스대로 생활해나가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내 성격에 맞다고 생각했지요.”

● 1974년에 만난 스승 아이작 카츠...1999년 파리에서 감격 재회

당 타이 손이 2021년에 열린 제18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제자 브루스 리우(왼쪽)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손의 이러면 면모는 어머니 리엔에게도 영향을 받은 결과다. 리엔은 그에게 항상 겸손할 것을 강조했다. 성적이 오르거나 칭찬받을 일이 생겨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와준 덕분이므로 어른들과 선생님들을 따르고 자신을 낮추라고 늘 얘기했다.

동양적인 의미에서 ‘겸손’과 ‘약간의 수줍음’ 등은 미덕이 되겠지만, 이것이 서양의 경우에도 꼭 적용되진 않는다. 손의 이런 성격 때문에 일어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손은 1974년에 소련에서 베트남에 파견되어 온 피아니스트 아이작 카츠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원래 카츠의 임무는 하노이 음악원의 선생들을 재교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노이 음악원 학생들의 연주에도 적잖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손의 비범한 재능이 그의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카츠는 손에게 자신이 베트남에 파견 나온 반 년 동안 함께 공부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뛸 듯이 기뻤던 손은 카발레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등 그 시점에서 자신이 칠 수 있는 모든 곡의 악보를 들고 카츠의 레슨실을 찾아갔다. 차례차례 손의 연주를 주의 깊게 끝까지 다 들어본 카츠는 숙제를 내주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라벨의 ‘거울’ 중 몇 곡을 연습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수준에 비해 너무 어려운 난곡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숙제로 나오자 손은 많이 놀랐지만, 카츠는 “너한테 이 곡들은 어렵지 않으니, 열심히 연습해라”는 격려를 해주었다. 이 소문은 하노이 음악원 구석구석까지 금세 퍼져나갔고, 손은 이 일로 음악원 학생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됐다.

우리나라의 레슨실 풍경도 그렇지만, 베트남 역시 어린이들이 레슨을 받으러 가면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들을 뿐 질문을 한다거나, 작품에 관련한 얘기를 꺼내거나 하지 않는다. 학생은 언제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유태인이었던 카츠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레슨 도중 그 곡을 어떻게 연주하고 싶은지, 작곡가가 이것을 썼을 때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이 곡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등등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손은 무슨 질문을 들어도 입술만 달싹달싹할 뿐 도대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죽어라 연습을 해갖고 오면 그것으로 충분했는데, 이 선생님은 도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카츠는 제자의 묵묵부답을 그냥 눈감아주지 않았다. 다음 레슨 때, 또 그 다음 시간에도 손에게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레슨 시간에 손은 연주가 끝나면 몸이 긴장됐다. 작품에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미지를 묘사해서 그것을 자유롭게 말로 표현해보라고 했을 때 손은 또 위를 쳐다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유태인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을 좋아했던 카츠는 곧 손에게 ‘금붕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의 조크는 매우 지적이고 유머와 위트가 넘쳐흘렀다. 손은 그날 이후로 카츠에게는 이름 대신 ‘금붕어’로 불렸다.

6개월 동안의 레슨이었지만, 카츠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연주할 때의 ‘유연성’과 ‘자유로움’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하노이에서의 공부가 끝나갈 무렵, 카츠는 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1975년에 프랑스에서 롱-티보 콩쿠르가 있으니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손 스스로도 콩쿠르 참가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 리엔이 반대를 표시해서 결국 이 일은 제안으로 끝나고 말았다.

카츠는 나중에 손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할 때에도 여전히 그에게 관심을 쏟으며 콩쿠르에 참가하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지도교수였던 나탄슨 교수는 신중한 편이어서 완벽하게 되지 않으면 손을 다음 단계로는 나가게 하지 않았지만, 카츠는 손의 등을 자꾸 떠밀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카츠는 손의 지도교수가 된 나탄슨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를 1978년의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꼭 내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음악원 1학년 때의 일이다.

하지만 나탄슨은 정중히 거절하는 답장을 썼다. 소련에 유학해서 3년째에 손이 쇼팽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고 나탄슨 교수에게 밝혔을 때에도 그는 좀 더 작은 콩쿠르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 번에 좋은 결과가 나오면 다행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학생들이 충격을 받아서 음악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거나 열의가 사라지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던 것이다.

손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누구보다도 가장 기뻐해주었던 사람은 카츠 선생이었다. 카츠는 “내가 우승한 것보다도 더 기쁘다”라는 말로 손의 우승에 대한 기쁨과 감격을 표현했다. 손이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있을 당시 카츠는 모스크바 북쪽에 위치한 고리키 시에 살고 있었다. 그 땅에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손과 카츠가 다시 만난 것은 1999년 파리에서다. 손이 카츠 부부를 파리에서 열리는 자신의 연주회에 초대했던 것. 당시 카츠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카츠는 손의 연주회를 보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밤새도록 제자와 음악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옛날의 그 작은 ‘금붕어’가 어느새 큰 물고기가 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