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병무 기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은 무대 왼쪽 끝에 섰다. 아홉번의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쥔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무대 가운데에 앉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도 솔로이스트의 자리에서 내려와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2010년 뷰티플마인드가 장애인과 소외계층 학생들의 지속 가능한 음악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창단한 장애·비장애 통합 오케스트라다. 뷰티플마인드 뮤직아카데미 재학생과 수료생 등 40여명의 멤버로 구성됐다. 임지영과 박규희는 특별 객원 단원인 셈이다.
이원숙의 지휘 아래 그들이 선사한 피날레 곡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 인류애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4악장 전부를 연주하지는 않고 하이라이트 부분(편곡 이원숙·김덕주)을 넣어 편곡한 버전으로 들려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율을 살짝 연주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울컥한다. 이어 발달장애 청소년들로 구성된 볼레드 합창단의 목소리를 타고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사회 곳곳에 드리워진 차별의 장벽을 넘어 화합하는 의미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연주자가 하나가 되어 희망의 노래를 전달했다. 브라보! 브라바! 조금은 틀리고 조금은 서툴렀지만, 최고의 감동이다.
사단법인 뷰티플마인드는 7일 오후 롯데콘서트홀에서 ‘뷰티플마인드와 함께하는 가을음악회’를 열었다. K클래식을 대표하는 임지영과 박규희의 협연무대로 꾸민 못잊을 콘서트다. 관객들도 모든 곡마다 연주자가 완전히 퇴장할 때까지 끝까지 박수를 치는 등 톱클래스 매너를 보여줬다.
오프닝은 소프라노 한슬아가 열었다. 볼레드 합창단과 호흡을 맞춰 동요 ‘가을’(백남석 시·현제명 곡)을 선사했다. 이렇게 큰 공연장에 처음 선 슬아는 조명이 비추는 지점을 찾지 못해 벗어나기도 하고, 오른 손에 마이크를 들었지만 정작 사용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등 귀여운 실수를 연발했지만 역시 ‘가수 한슬아’였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 솔솔 불어 오니 /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 입고서 /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 봄이 오면 다시오라 부탁하노라” 이내 침착하게 평정심을 찾고는 콘서트장을 단풍빛으로 물들였다.
이어 조성대가 지휘하는 볼레드 합창단이 뮤지컬 ‘레미제라블’ 메들리와 BTS의 ‘Dynamite’를 멋지게 소화했다. 단원들이 고개, 팔, 다리를 흔들며 자기 나름대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 예뻤다. 특히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I Dreamed a Dream’ 파트에서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는 의지가 읽혀졌다.
싱가포르 뷰티플마인드 소속의 장애인 아티스트 2명의 무대도 많은 환호를 받았다. 바이올리니스트 루오 망과 비올리스트 엔지 퉁 하이는 우지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두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중 1, 2, 4악장을 연주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뷰티플마인드 홍보이사인 아나운서 정지영은 “두 연주자와 같이 한국을 방문한 부모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눈물을 훔쳤다”며 “연주를 모두 마친 뒤 뜨거운 박수소리가 들리자 환한 미소로 기뻐했다”고 무대 뒤의 비하인드를 들려줬다.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와 뷰티플마인드 뮤직아카데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 중 하나는 아낌없이 재능 기부를 해준 선생님들의 힘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강소연도 2012년부터 뮤직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때 초등학생이었던 꼬마 강현이(이강현)을 만나 사제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현이는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얼마 전에는 뷰티플마인드 취업프로그램으로 한 유명 제약회사에 취업도 했다. 매달 월급 받는 당당한 직장인이다. 사회인으로 성장한 제자들을 볼 때마다 선생님들은 뿌듯하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3명의 스승과 3명의 제자가 파트너가 되어 비톨드 루토슬라프스키의 ‘세대의 피아노를 위한 파나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편곡 이용주)을 연주했다. 피아노1 이유빈·성보경, 피아노2 강소연·이강현, 피아노3 유혜영·김재영은 ‘손 12개의 마법’을 펼치며 사제케미를 뽐냈다.
강소연은 “6명이 호흡을 맞추려면 피아노 3대가 필요한데 마땅한 장소를 찾기 어려워 연습하는데 애를 먹었다”라며 “곡 자체도 어렵고 지휘자 없이 맞춰야 해 걱정이 많았지만 역시 무대 체질인 세 학생 덕에 잘 마칠 수 있었다”며 웃었다.
특히 재영(김재영)이는 멋진 감사 포즈를 선보였다. 오른손을 크게 들어 관객에게 인사한 뒤 고개를 숙이며 왼쪽 가슴에 갖다 대는 퍼포먼스를 여러 차례 보여줘 웃음을 선사했다.
박규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다. 세계적 권위의 벨기에 프렝탕 국제 콩쿠르에서 여성 및 아시아인 최초 우승자로 이름을 올렸다. 지금까지 발매한 열장의 음반은 클래식 기타 부문에서 예술적 성과와 판매량 모두 독보적 입지를 굳히고 있다.
박규희는 먼저 롤랑 디앙의 ‘가짜탱고’를 연주했다. 빙판을 미끌어지듯 아래 위로 능수능란하게 코드를 바꿔가며 다양한 테크닉과 사운드를 보여줬다. 이어 뮤직아카데미 학생인 심환·허지연, 그리고 뮤직아카데미 선생인 정욱과 힘을 합쳐 루이지 보케리니의 기타 4중주 라장조 ‘서주와 판당고’를 들려줬다. 두 프로 아티스트가 리드했지만 심환과 허지연 두 연주자도 뒤를 훌륭하게 받쳐주며 제몫을 다했다.
박규희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1악장(편곡 이원숙)을 연주했다. 정원 분수 주변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와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들라는 듯 절정의 기량을 펼쳤다.
임지영은 20세의 어린 나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21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30세 이하 아시아 리더’에 유일한 클래식 연주자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뮤직아카데미 학생·선생님과 함께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편곡 정욱)을 선물했다. 쌀, 감, 대추 등의 가을날의 풍성한 수확이 음악으로 멋지게 다가왔다.
그리고 임지영은 카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편곡 이원숙)를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클라리네티스트 김범순도 같이 무대에 서 곡 전반에 흐르는 두 가지 주제를 두 연주자가 교대로 연주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칼 젠킨스의 ‘팔라디오’(편곡 이원숙)도 연주했다. 창단 때부터 13년간 악단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이원숙은 시종일관 왼쪽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지휘를 했다. 뷰티플마인드 공연에는 포디움(지휘자가 서는 단상)이 없다. 아무래도 비장애인만큼 집중도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지휘자가 직접 연주자의 앞으로 다가가 음악 지시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원숙은 에너자이저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전체의 완벽한 하모니를 도출해냈다.
공연을 본 관객들은 “이렇게 멋지게 솜씨를 보여줄 정도면 그동안 흘린 땀방울이 얼마인지 짐작이 된다”라며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연주자 모두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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