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봉숭아’부터 ‘저녁빛’까지, ‘작별’부터 ‘마중’까지...고성현·김영미의 심쿵 21곡

'세일 한국가곡의 밤' 예당서 열네번째 콘서트 진행
바리톤 김성길 ‘세일 한국가곡상 수상’ 깜짝공연
장서영·이동준·유형재 세일콩쿠르 수상자 무대도

박정옥 기자 승인 2022.10.29 11:14 | 최종 수정 2023.03.20 10:23 의견 0
소프라노 김영미와 바리톤 고성현이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에서 열창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이인선. ⓒ세일음악문화재단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봉숭아’부터 ‘저녁빛’까지, ‘작별’부터 ‘마중’까지. 한국 성악계의 두 전설은 여전히 싱싱했다. 팔딱팔딱 뛰었다. 바리톤 고성현은 11곡을, 소프라노 김영미는 7곡을 불렀다. 또 듀엣으로도 3곡을 선사했다. 만만치 않은 레퍼토리지만, 힘이 넘쳤고 기술은 뛰어났고 예술성은 하늘에 닿았다. 두 사람은 ‘세일 한국가곡의 밤’에서 초기 한국가곡과 요즘 현대가곡을 모두 아우르며 빅2쇼를 펼쳤다.

세일음악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한국가곡 100년을 기념해 우리 가곡의 역사를 한 무대에서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콘서트였다. 한국가곡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설립한 세일음악문화재단의 정수연 이사장은 “온갖 기계음과 마이크 소리에 익숙해진 우리의 청각을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로 정화시켜주는 소중한 시간이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음악평론가 손수연이 사회를 맡아 매끄러운 진행을 이끌었다.

한국 최초의 가곡을 놓고 ‘봉숭아’와 ‘동무생각’이 팽팽하다. 1920년 홍난파는 바이올린을 위해 곡을 썼고, 6년 후 김형준 시인이 이 선율에 노랫말을 달아 ‘봉숭아’가 탄생했다. 원래 기악곡이었는데 나중에 가사를 붙여 성악곡이 된 케이스기 때문에, 1호 타이틀을 차지하기엔 살짝 약점이 있다. 이에 반해 박태준의 ‘동무생각’은 1922년 이은상의 시에 곡을 붙였다. 출생만 놓고 보면 ‘동무생각’이 1호에 더 가깝다. 세일 한국가곡의 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논란을 고려해 두 작품 모두 프로그램에 넣는 절충을 택했다.

공연의 문은 ‘앙상블 모브’(바이올린 안세훈·바이올린 김태형·비올라 한연숙·첼로 정윤혜·피아노 이주현)가 열었다. 유명 한국가곡의 선율을 바탕으로 작곡한 ‘서곡’(장석진 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띄었다.

최근 오페라 데뷔 40주년 리사이틀을 마친 고성현은 ‘홍난파의 시간’을 준비했다. 앙상블 모브의 반주에 맞춰 ‘봉숭아’ ‘그리움’(이은상 시) ‘봄처녀’(이은상 시) ‘옛 동산에 올라’(이은상 시)를 노래했다. 각각 고유한 컬러를 가진 독립된 곡이지만, 네 곡을 논스톱으로 부르자 기승전결로 연결된 하나의 곡으로 느껴졌다. 온몸에 힘을 확실히 빼고, 적절한 곳에서 한번 슬쩍 액센트를 주는 실력이 빛났다.

다음은 ‘박태준의 타임’. 고성현은 이번엔 피아니스트 박진아와 호흡을 맞춰 ‘동무생각’ ‘산길’(양주동 시) ‘봄바람’(김안서 시) ‘가을밤’(이태선 시)을 잇따라 연주했다. “하늘 하늘 잎사귀와 춤을 춥니다 / 하늘 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 하늘 하늘 불며 도는 하늘 바람은 / 그대 잃은 이 마음의 넋들 이외다” 짧은 가사로 이루어진 ‘봄바람’에서는 일부러 큰 율동을 선보여 시각적 풍성함을 더했다. ‘가을밤’에서는 피아노 반주를 최소화해 목소리 하나 만으로 아트의 경지를 보여줬다. 역시 고성현이라는 찬사 박수가 쏟아졌다.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곡)와 ‘산아’(신홍철 시·신동수 곡)는 고성현의 시그니처곡이다. 그윽한 바리톤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는 새롭게 편곡돼 귀에 착착 감겼고, 서울대 3학년때 MBC대학가곡제에 출전해 대상을 거머쥔 “산아 사랑하는 내 고향의 산아 / 종내 너를 두고 나는 가누나”는 절절했다.

소프라노 김영미와 바리톤 고성현이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에서 열창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박진아. ⓒ세일음악문화재단 제공

김영미는 ‘동양의 마리아 칼라스’로 불린다.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에 앞서 세계로 본격 진출한 한국인 소프라노 1호다. 그는 이인선의 피아노에 맞춰 ‘작별’(김경 시·안기영 곡) ‘산들바람’(정인섭 시·현제명 곡) ‘꿈’(황진이 시·김안서 역·김성태 곡) ‘꽃구름 속에’(박두진 시·이흥렬 곡)를 들려줬다. ‘작별’은 뭉클했다. 이 곡을 만든 한국 최초의 테너 가수 안기영이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다. 월북 꼬리표 때문에 오랫동안 불리지 못했다. 선율이 단조로워 깊이 있는 목소리가 더 돋보였다. 외조부의 곡을 노래하는 외손녀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다. ‘꽃구름 속에’는 피아노와 재잘재잘 대화하는 듯 했다.

이어 김영미는 ‘청산리벽계수야’(황진이 시·이영조 곡)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김순애 곡) ‘마중’(허림 시·윤학준 곡)을 연주했다. 2030의 한국가곡 최애곡인 ‘마중’은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라고 저절로 소리치게 만들었다.

고성현과 김영미의 듀엣케미도 빛났다. ‘오빠생각’(최순애 시·박태준 곡)에서는 오누이처럼 “뜸북뜸북” “기럭기럭” 등 서로 화음을 넣어 주었고, ‘냉면’(박태준 시·외국 곡)에서는 “한참이나 맛있게 잘 먹다가 재채기 나왔네 / 한 오라기 콧구멍에 나오는 걸 손으로 빼냈네 / 줄줄이 빼낸다 또 빼낸다 아직도 빼낸다”라고 해학미 가득한 무대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새로운 버전으로 선보인 ‘눈’(김효근 시·곡)은 곧 우리 곁으로 날아올 설레는 첫눈이 오버랩됐다.

베이스 바리톤 이동준, 소프라노 장서영, 소프라노 김영미, 바리톤 고성현(왼쪽부터)이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에서 노래하고 있다. ⓒ세일음악문화재단 제공


세일 한국가곡의 밤의 또 다른 재미는 내일의 성악스타를 미리 만나는 일이다. 지난 6월 열린 ‘제14회 세일 한국가곡 콩쿠르’ 여성부에서 1위없는 2위를 차지한 소프라노 장서영은 ‘고풍의상’(조지훈 시·윤이상 곡)을, 남성부 1위를 차지한 베이스 바리톤 이동준은 ‘별 하나’(도종환 시·강홍준 곡)를 불렀다. 이어 두 사람은 ‘서풍부’(김춘수 시·이지현 곡)를 이중창으로 들려주며 “우리를 주목해주세요”라고 메시지를 날렸다. 또한 고성현은 작곡부문 1위 수상작인 ‘저녁빛’(남진우 시·유형재 곡)을 노래했다.

2부가 시작되기 전 ‘세일 한국가곡상’ 시상식이 열렸다. 올해의 수상자는 성악가 김성길. 그는 한국가곡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고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상금 1000만원을 받았다. 올해 81세의 바리톤은 깜짝무대도 선사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사공의 노래’(함호영 시·홍난파 곡)를 불러 감동을 안겨줬다.

정수연 이사장, 소프라노 장서영, 바리톤 고성현, 소프라노 김영미, 베이스 바리톤 이동준(왼쪽부터)이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을 마친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세일음악문화재단 제공


#에필로그1. 제14회 세일 한국가곡의 밤은 출연자와 청중들이 ‘동무생각’과 ‘고향의 봄’을 합창하면서 마무리됐다. 프로그램북에 악보가 들어있어 모두들 따라 불렀다. 1층 C블록 19열에 앉았는데, 뒷좌석 20열에 있는 관객의 목소리가 범상치 않다. 내공이 느껴졌다. 시원시원한 소리가 폭포수처럼 귀로 들어왔다.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덕에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세일음악문화재단 정수연 이사장이다. 그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메조소프라노다. 가까이에서 라이브를 들은 셈이니 개인적으로 횡재한 콘서트였다.

#에필로그2. 세일음악문화재단은 매달 세 번째 목요일마다 세일아트홀에서 ‘세일 한국가곡 상설무대’를 연다. 내년 라인업이 공개됐다. 1월 테너 이승묵과 베이스 김채찬을 시작으로 12월 소프라노 박은주와 테너 전병호까지 이어진다. 국내외 정상급 성악가들의 공연을 ‘바로 눈앞에서’ 직관할 수 있다. 소규모 공연장의 메리트다. 2월 소프라노 박하나·메조소프라노 김정미, 3월 소프라노 서선영·베이스 송일도, 4월 소프라노 이상은·메조소프라노 양송미, 5월 소프라노 박미혜·테너 신동호, 6월 바리톤 유동직·베이스 손혜수가 출연한다. 하반기도 기대된다. 7월 소프라노 최세정·바리톤 성승욱, 8월 소프라노 장혜지·테너 허영훈, 9월 소프라노 김성은·베이스 박준혁, 10월 테너 이원준, 11월 소프라노 서혜원·매조소프라노 제니퍼 라모어가 준비한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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