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첫곡 연주했을 뿐인데 “트리포노프 언제 또 오나” 다음 공연 기대감 폭발

‘조성진의 라이벌’ 9년만에 세 번째 내한리사이틀
점차 짙어지는 음악의 세계 표현해 브라보 갈채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2.27 00:51 | 최종 수정 2023.03.16 19:42 의견 0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9년만에 세 번째 국내 리사이틀을 진행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수염을 기른 채 긴 머리카락을 치렁대며 서른두 살 피아니스트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1, 2, 3층 관객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고, 무대 뒤 합창석을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친절한 다닐 트리포노프(1991년생)다. 9년 만에 열린 세 번째 내한공연.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빈틈이 없었다.‘조성진의 라이벌’은 구름 팬을 몰고 왔다.

그리고는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Op.39)’을 첫 곡으로 초이스했다. 낯선 곡이다. 작곡가는 이 곡을 연주회장에 올릴 목적으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독주회에서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작곡가는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만이 ‘어린이 정경’을 남긴 것처럼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하늘에 있는 차이콥스키도 깜짝 놀랐으리라. 아이가 아닌 프로가 리사이틀에서 초심자용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짧게는 30초에서 길게는 2분 정도 걸리는 스물네 곡의 소품으로 구성됐다. 화성, 멜로디, 구성이 단순한 만큼 매우 정제된 음악어법을 사용했다. 감상 포인트를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하지만, 작곡가의 악보 순서에 따라 3단계로 나눠 듣는 것도 유용했다. 24곡 모두에 소제목이 붙어 있다.

트리포노프는 우선 어린이의 놀이라는 주제를 터치했다. 아이는 ‘아침 기도’를 올린 뒤 ‘장난감 목마’를 타고 ‘나무 병정의 행진’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낸다. 이후 ‘엄마’에게 ‘새로운 인형’을 선물 받고 함께 즐겁게 놀았다. 모음곡 1번에서 9번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10번에서 18번은 유럽 여러 지역의 춤곡을 펼쳐냈다. 잘 알려진 ‘마주르카’ ‘폴카’에 이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의 민요를 짧고 빠르게 선보였다. 마지막 18번 ‘나폴리의 노래’는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에도 등장한다.

세 번째 구간(19번~24번)에서 트리포노프는 유모로 변신했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공상’ ‘마법사’ ‘종달새의 노래’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어 모음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손풍금 연주자의 노래’와 ‘교회에서’를 연주하며 마무리 한다.

하지만 이런 3단계를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 모음곡의 전반적인 흐름에 그냥 마음을 맡기고 동심이 저절로 생기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친구들과 미끄럼틀을 타다가 싫증이 나자 말타기와 숨바꼭질을 한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도 빠지지 않는다. 슬쩍 심술도 부려 여자들의 고무줄놀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가끔은 구석에서 홀로 개미를 관찰한다. 이런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들을 상상하며 들었다.

옆에 앉은 관객은 나지막한 소리로 “언제 또 오나”라며, 트리포노프에게 마음을 빼앗겼음을 실토한다. 이제 첫 곡을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다음 리사이틀을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마친 뒤 마치 스프링이 튕기듯 의자에서 재빠르게 일어서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싫든 좋든 트리포노프는 국내에서 ‘조성진의 경쟁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조성진이 3위에 올랐다. 손열음은 2위였다. 트리포노프가 3위에 그친 쇼팽 콩쿠르(2010년)에서는 조성진이 2015년에 우승했다. 억지 대결 구도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지만 흥미진진하다.

트리포노프가 한국 팬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이다. 당시 앙코르 5곡 모두를 자신이 직접 만든 곡으로 연주해 빼어난 작곡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두 번째 내한인 2014년 콘서트홀 공연 때는 생각보다 빈자리가 많아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이번 세 번째 내한리사이틀은 확실히 달랐다. 차이콥스키, 슈만, 모차르트, 라벨, 스크랴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음악의 그라데이션’에 집중한 모습이다. 기술적으로 음악적으로 가장 투명한 상태(차이콥스키)에서 출발해, 점차 살을 덧붙여 제대로 된 형태(슈만)를 만들었다. 그리고 깊고 깊은 모차르트를 만나고, 미세한 묘사의 끝장을 탐구한 라벨의 모음곡에 이른다. 피날레는 극한으로 치닫는 스크랴빈을 연주해 트리포노프가 담고자 했던 풍경을 명확하게 펼쳐냈다. 조금씩 짙어지는 음악의 세계를 그렸다. 감성 돋는 음악회다.

두 번째 곡은 슈만의 ‘판타지 다장조(Op.17)’.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청년, 좋은 작품을 작곡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또한 좋은 비평을 쓸 수 있다고 기대했던 청년.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될 것이라고 낙관했던 청년이 183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슈만은 이 ‘판타지’를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트리포노프의 손끝을 타고 열정과 사색의 대비가 빛났다. 열정이 잘아들면 사색의 시간이 찾아오고, 이내 고요함 속에서 다시금 꿈틀거리는 열정이 불쑥 튀어 올랐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 모든 감정이 한바탕의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깊고 깊은 내면으로 침잠한다.(1악장) 행진곡 같은 당당한 화음이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경쾌한 리듬이 탄력감을 만들어내고, 두꺼워서 움직이기 어려운 화음들도 이에 맞춰 꿋꿋하게 발걸음을 옮긴다.(2악장) 느릿한 아르페지오로 시작한다. 밤하늘을 더듬어 별을 잡아보려는 듯한 움직임으로 채워져 있다. 결코 별은 손에 넣을 수 없다. 하지만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3악장)

세 번째는 모차르트의 ‘환상곡 다단조(K.475)’를 선사했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환상곡은 대체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작품을 지칭하는데 쓰였다. 모차르트가 1785년에 완성한 ‘환상곡 다단조’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당당하게 시작하지만 곧 이어지는 불안한 분위기는 따스한 선율을 멀리 밀어낸다. 몇 번이나 기쁨과 슬픔을 반복하며 기필코 마주해야하는 무언인가로 옮겨간다.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결정을 한 것일까. 거침없이 상승하는 다단조 스케일로 마무리 된다,

1908년에 라벨이 완성한 ‘밤의 가스파르(M.55)’는 넘칠 정도로 예술과 기술이 서로 경쟁하는 곡이다. 프랑스 시인 알루아시위스 베르트랑의 시집 ‘밤의 가스파르’에서 시세 편을 골라 음악화했다. 라벨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전에 없는 기술적 부담을 연주자에게 안기고, 텍스트로 삼은 시의 내용을 음악으로 온전히 옮기려고 했다.

역시 트리포노프였다. 작곡가의 이런 목적을 멋지게 완수했다. 1악장 ‘물의 요정(Ondine)’에서는 물의 움직임이 다채로워지는 순간에도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는 수면을 보여줬다. 수면이 잠잠해진 이후 찾아온 느리고 정적인 부분에서 물의 요정은 말한다. “나와 함께 가서 호수의 왕이 되자”고. 그러나 상처 입은 물의 요정은 파도와 같이 거대한 아르페지오를 일으킨 뒤 다시 잠잠해진다.

2악장 ‘교수대(Le Gibet)’는 적막함을 넘어선 황량한 풍경으로 시작된다. 끊임없이 울려 주변을 황폐하게 만드는 종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누구의 죽음 이후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이어질 비극을 예고하는 것일까. 뿌연 해가 하늘에 걸려 있지만 온기는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다.

3악장은 트레몰로 연타 이후 사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스카르보(Scarbo)’가 등장한다. 이 존재는 종종 작은 악마로 묘사되지만 악 그 자체는 아니다. 한동안 난동을 피우다가도 꿍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존재다. 손가락이 안보일 정도의 폭풍연주로 엑설런트하게 표현했다.

스크랴빈은 1907년에 ‘피아노 소나타 5번(Op.53)’을 썼다. 그는 처음에 쇼팽을 떠올릴 만한 작품을 썼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방향을 전환한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마음을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구체화했다.

연주 시간 약 10분 정도의 단악장이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친다. ‘소나타 5번’을 끊임없이 떠도는 신비와 광기는 조금씩 강도를 높여 갔다. 잠시 이어진 고요함 뒤로는 막바지에 다다른 듯 고통스럽게, 그러나 번쩍이는 광채를 발산하는 화음의 연타가 이어진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 소나타는 서두에 비췄던 주제를 재빠르게 제시한 뒤 끝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트리포노프는 관객의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더니, 끝날 때도 스프링 튕기듯이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액센트 있는 마침표다.

앙코르는 바흐의 ‘칸타타 BWV.147’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선사했다. 트리포노프의 앨범 ‘BACH: The Art of Life’에 수록되어 있는데 템포를 훨씬 더 느리게 잡아 울림이 컸다. 팬 사인회도 북새통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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