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의 기욤 디옵(알브레히트 역)과 도로테 질베르(지젤 역)가 11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내한공연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낭만발레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지젤’은 2막에서 더욱 빛났다. 어두운 숲속에 짙은 안개가 깔려있다. 스멀스멀 땅에서 올라온 하얀 기운은 더 올라가지도 못한 채 바닥을 떠돈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방황하는 가엾은 영혼 같다. 무대 왼쪽에 덩그러니 지젤의 무덤이 있다.

순백의 튜튜(발레용 치마)를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윌리들이 군무를 춘다. 이들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처녀들의 영혼이다. 윌리의 여왕 미르타와 26명의 윌리는 깊은 밤마다 청년들을 어둠의 세계로 유혹한다. 가슴 깊이 새겨진 복수심에 불타 젊은이들을 홀려 죽게 만든다.

하지만 어쩌랴. 처녀귀신이라는 생각이 하나도 안든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히려 천사 같다. 공중부양 하듯 까치발로 사뿐사뿐 걷는 ‘부레부레’와 한쪽 발끝으로 서서 순간적으로 멈추는 ‘발란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발 동작 하나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파리오페라발레의 기욤 디옵(알브레히트 역)과 도로테 질베르(지젤 역)가 11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내한공연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파리오페라발레의 기욤 디옵(알브레히트 역)과 도로테 질베르(지젤 역)가 11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내한공연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파리오페라발레(POB)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내한 공연을 열었다. 199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후 30년만의 재방문이다. 350년이 넘는 긴 역사보다도 오늘날까지 연 200회에 가까운 공연의 객석을 꽉 채울 만큼 최고 수준의 실력으로 높이 평가받는 단체다. 이번 공연은 지난해 개관한 LG아트센터의 올해 시즌 프로그램 ‘콤파스 23(COMPAS 23)’의 시작을 알리는 첫 무대다.

11일 오후 2시 공연을 감상했다. 2007년 24세의 나이로 에투알이 된 이후 16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간판스타 도로테 질베르가 지젤 역을 맡았다. 지난해 말 쉬제로 승급한 23세의 신예 기욤 디옵은 알브레히트로 변신했다.

질베르는 오랜 시간 주연을 맡은 베테랑이다. 기술과 감정이 조화를 이룬 노련함은 시골 처녀 지젤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연인 알브레히트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젤이 정신을 잃는 ‘매드신’은 1막의 하이라이트다. 질베르는 눈동자 가득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채 손을 떨며 배신당한 여인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명장면으로 꼽히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2막 파드되(2인무)는 아련했다. 윌리들의 포로가 된 알브레히트와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지젤이 진실한 사랑을 깨달아가며 한 몸처럼 펼쳐내는 몸짓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파리오페라발레의 기욤 디옵(알브레히트 역)이 11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내한공연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앞뒤로 빠르게 교차하는 32회의 ‘앙트르샤 시스’를 선보이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디옵은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앞뒤로 빠르게 교차하는 32회의 ‘앙트르샤 시스’를 유려하게 선보였다. 20회를 넘기고서도 흐트러짐 없이 도약하는 젊은 무용수의 기술에 여기저기에서 ‘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들의 삶에는 매우 희귀하고 집단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의 실현, 에투알 지명입니다. 오늘 기욤 디옵을 에투알로 임명합니다.”

호세 마르티네즈 예술감독은 커튼콜 무대에서 디옵을 수석 무용수격인 에투알로 지명했다. 파리오페라발레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에투알이 탄생한 순간이다. 1년에 많아야 1∼2차례밖에 해외투어를 하지 않는 파리오페라발레가 프랑스가 아닌 해외 공연에서 에투알을 지명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디옵에겐 서울이, 특히 LG아트센터가 행운의 장소가 됐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이 11일 LG아트센터에서 '지젤' 내한공연을 열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파리오페라발레단이 11일 LG아트센터에서 '지젤' 내한공연을 열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파리오페라발레단이 11일 LG아트센터에서 '지젤' 내한공연을 열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디옵은 프랑스가 주목하는 차세대 스타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세네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파리오페라 발레학교에 입학했고, 2018년 파리오페라발레에 입단했다. 2021년 21세의 나이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를 맡았고, 지난해 말 쉬제가 됐다. 이번 지명으로 프리미에르 당쇠르를 거치지 않고 에투알로 직행했다.

파리오페라발레 무용수들의 등급은 카드리유(군무)부터 코리페(군무 리더), 쉬제(솔리스트), 프리미에르 당쇠르(제1무용수), 에투알(수석무용수)까지 5개 등급으로 나뉜다. 프랑스어로 ‘별’을 뜻하는 에투알은 발레단 최고의 자리다. 에투알은 경쟁방식으로 선발하지 않고 발레단 예술감독의 추천을 받아 파리국립오페라 극장장이 지명한다.

디옵은 이번 공연에 참여키로 했던 위고 마르샹의 갑작스런 무릎 부상으로 ‘대타 출연’했다. 그는 에투알로 지명된 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로운 별의 탄생을 목격한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새 에투알을 축하했다. 막이 내리고도 오랫동안 무대 뒤에서는 시끌벅적 축하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가는 디옵은 당장 비즈니스로 좌석이 조정된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