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앙코르 4곡으로 미니 오페라 만들었다...디아나 담라우 ‘역대급 리사이틀’

‘동심초’ 애절한 감정 살리려 악보에 빼곡
고음 내려놓자 더 좋은 소리 '감동 3시간'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5.19 19:02 | 최종 수정 2023.05.21 00:48 의견 0
디아나 담라우가 18일 내한공연에서 노래를 마친 뒤 관객의 환호에 환하게 웃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역대급’ 내한 리사이틀이다.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52)가 앙코르 4곡으로 한 편의 미니 오페라를 만들었다. 프로그램북 속 모든 노래를 마친 뒤, 관객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담라우가 다시 무대로 나왔다. 베이스인 남편 니콜라 테스테와 지휘자 파벨 발레프도 함께 등장했다.

먼저 1막. 테스테가 베르디 오페라 ‘도적들’에 나오는 ‘Un ignoto, tre lune or saranno(잃어버린 3개월)’를 부르자 담라우는 왼쪽으로 가더니 계단 끝에 살며시 앉아 노래를 들었다. 조용히 지켜볼테니 여보! 잘해요라는 응원이다. 2막은 담라우의 차례.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O mio babbino caro(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부를 때 테스테가 아래로 껑충 뛰어 내려갔다. 모두 깜놀이다.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아내와 눈을 맞췄다. 난 여기서 응원할게요라는 퍼포먼스다. 3막은 듀엣곡. ‘도적들’에 나오는 ‘Mio Carlo, Ei sogna(나의 카를로, 그는 꿈을 꾼다)’를 불렀다. 주거니 받거니 찰떡 금실이다.

디아나 담라우가 남편 니콜라 테스테가 노래하는 동안 왼쪽 계단에 앉아 감상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하이라이트는 4막. 세 사람은 잠시 퇴장했다 들어왔다. 담라우가 재치 있게 ‘마에스트로, 빨리 포디움으로 올라가세요’라는 듯한 손동작을 취하자 와~ 함성이 쏟아진다. 손에는 악보가 들려있다. 돋보기를 꺼내 악보를 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김성태 작곡의 한국가곡 ‘동심초’다.

2017년 첫 내한 때도 앙코르로 이 곡을 불렀다. 지난 방문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곡을 다시 연주한 것. 다만 새로 편곡된 버전이다. 당시엔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노안을 불러온 모양이다. 테스테는 왼쪽 끝에 서서 아내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봤다. 꿀 떨어지는 광경이다.

디아나 담라우는 감정을 촤대한 끌어내려 '동심초' 악보에 빼곡하게 중요한 내용을 메모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발음은 서툴렀지만 가사 전달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놀라운 것은 노랫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2절 첫 부분에서 살짝 박자를 놓쳤을때는 악보를 손가락으로 치는 등 재치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밀은 악보에 있었다. 제목 위에 빨간색 펜으로 하트를 두 개 그려 넣었다. ‘Ko-nipeun Ha Yeo Map Shi’ 처럼 가사는 발음대로 적혀 있었지만 군데군데에 가사의 의미를 영어로 메모한 게 보인다. ‘기약이 없네’ 부분엔 영어로 ‘I don’t know when I see you’라고 적었다. 노래의 애절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대로 보여줬다. 그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공연하는 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멋진 일이다”라고 말했다. 정말 멋지게 준비했다.

디아나 담라우와 니콜라 테스테가 1부 마지막에서 듀엣곡을 부르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1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담라우의 공연 타이틀은 ‘오페라의 왕과 여왕(Kings and Queens of Opera)’이다. 유명 오페라 속에 들어 있는 왕과 여왕의 노래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부부가 번갈아 가며 한곡씩 불렀다.

그는 ‘레전드 밤의 여왕’으로 통한다. 지금까지 20여개 버전의 ‘마술피리’에 출연해 매번 다른 모습의 여왕을 선보였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더 이상 여왕을 맡지 않고 있다. 성대에 큰 무리를 줄 수 있는 작품인 만큼 오래도록 좋은 목소리를 지키며 활동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밤의 여왕은 일정 기간 동안만 맡아야 하는 역할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소리는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벨칸토에서 주요 역할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젠 올림픽에서 100m 달리기와 같은 극한의 도전적인 역할을 그만두고 미래와 성장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이제 밤의 여왕으로는 서지 않아도 충분히 ‘그레이트’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고, 거기에 맞춰 목소리를 내려놓았다. 그게 더 울림이 컸다. 천장 뚫어져라 뽑아내는 고음보다 오히려 힘을 뺀 소리가 2층과 3층까지 더 세밀하게 전달됐다. 톱클래스의 경지다. 비록 밤의 여왕은 스톱했지만 새로운 여왕들로 커리어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성악 공연으로는 드물게 소리를 듣는데 어려움이 있는 합창석과 사이드석도 사람들로 빼곡하다.

포디움에 선 파벨 발레프도 이런 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뽐내는 서곡에서는 빵빵하게 사운드를 높였지만, 성악가가 노래할 땐 한음 한음 그의 노래를 빛내주는 서포트 역할에 충실했다. KBS교향악단도 그런 의도를 잘 따라줘 엑설런트 콘서트를 만들었다.

디아나 담라우가 1부에서 노래한 뒤 관객의 박수에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담라우의 이번 두 번째 내한은 조아키노 로시니의 ‘세미라미데’ 서곡으로 막을 올렸다. 12분 가량의 긴 곡이지만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쳐 오프닝으로 안성맞춤이다.

흰색 드레스에 노란색 숄더로 액센트를 준 담라우가 나왔다. ‘세미라미데’에 나오는 ‘Bel raggio lusingher(아름답고 매혹적인 꽃)’을 불렀다. 서핑 선수가 파도를 타듯 ‘음의 파도’를 잘 탔다. 물결이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몸을 맡기고는 유연하게 흘렀다. 테크닉이 빛났다.

이어 테스테가 나왔다. 앙브루아즈 토마의 ‘햄릿’ 중 클로디어스의 아리아 ‘Je tremble et soupire(나는 두려워 떨며 한숨 쉰다)’를 선사했다. 깊이 있고 풍성한 음색을 통해 죄책감으로 고통을 겪는 복합적 감정을 잘 드러냈다.

아돌프 아당의 오페라 코미크(연극처럼 대사가 들어있는 오페라) ‘내가 왕이라면’의 서곡은 밝고 명랑하게 귀에 꽂혔다. 도입부의 하프 소리도 좋았다. 악단의 케미가 정겹다.

‘마리아 데실리바’는 중세 불가리아 왕비 데실리바를 주인공으로 한 파라슈케프 하지예프의 작품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귀했다.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담라우는 ‘Veliki Bozhe, chui moiata molba(위대한 신이시여,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에서 미사곡이나 진혼곡에서 나타나는 순수하고 청아하고 엄숙한 가창을 들려줬다.

테스테가 샤를 구노의 ‘시바의 여왕’에 나오는 솔리만(솔로몬 왕)의 노래 ‘Oui depuis quatre jours...Sous les pieds d’une femme(그래 4일동안...여왕의 발 아래에서)’를 부르자, 오케스트라는 뒤를 이어 레오 들리브가 작곡한 극 부수음악 ‘왕은 즐긴다’ 중 제1곡 ‘가야르드’를 연주했다.

가에타노 도니제티는 튜더 왕가의 이야기를 다룬 ‘여왕 3부작’(안나 볼레나·마리아 스투아르다·로베르토 데브뢰)을 작곡했다. 담라우와 테스테는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나오는 스투아르다와 탈보트의 듀엣송 ‘Oh mio buon Talbot(오 다정한 탈보트)’를 노래했다. 부부의 합이 예술이다.

디아나 담라우가 관객의 박수에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디아나 담라우가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디아나 담라우가 18일 내한공연에서 베이스 니콜라 테스테, 지휘자 파벨 발레프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2부가 시작됐다. 테스테는 첼로 독주 파트가 매력적인 주세페 베르디의 ‘돈 카를로’ 중 필립 왕(펠리페 2세)의 아리아 ‘Elle ne m’aime pas!(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를 연주했다.

담라우가 배턴을 이어 받았다. ‘안나 볼레나’ 중 ‘Come innocente giovane...Non v’ha sguardo(아무도 나의 슬픔을 들여다보지 못해)‘를 불렀다. 아~아~아아악~ 고음 스킬을 뽐낼 땐 “나 콜로라투라야”라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KBS교향악단은 모두 6곡으로 구성된 표토르 차이콥스키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 중 제6곡 가보트를 들려줬다. 차이콥스키는 알렉산드로 푸시틴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토대로 오페라를 만들었다. 테스테는 오페라 속 그레민 공작으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사기꾼과 아첨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타치아나 같은 순수한 아내를 만나 너무 행복하다며 ‘Everyone knows love on earth(사랑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법이지)’라며 노래했다. 아! 베이스의 묵직함도 이렇게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노르마’는 벨칸토의 거장 빈첸조 벨리니의 대표작이다.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했다. 오페라 속의 주요 선율과 화성을 사용해 청중이 오페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미리 알 수 있도록 한 서곡이다. 긴장감 가득한 선율이 몸을 감쌌다.

예정된 프로그램의 피날네는 담라우가 장식했다. ‘노르마’의 시그니처 아리아 ‘Casta Diva(정결한 여신)’이다. 도입부 플루트 선율이 지나자 찬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스킬을 보여줬다. 깔리는 저음과 치솟는 고음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했다. 세밀한 뉘앙스를 살려 부르는 기교가 엑설런트하다. '고마워요! 담라우'가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아임 해피 3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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