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친뒤 포옹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이스라엘 출신의 지휘자 라하브 샤니는 ‘1989년생 동갑내기’다. 두 사람은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다. 라하브 샤니가 이끄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김봄소리가 협연자로 무대에 선 것.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Op.77)’를 연주했다.
김봄소리는 공연이 열리기 전 이렇게 말했다. “로테르담필은 예술적 선구안이 뛰어납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야닉 네제-세겡, 그리고 지금의 라하브 샤니 등 젊은 지휘자의 가능성을 보고 발탁한 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음악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어요. 샤니는 음악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가 아주 깊은 진중하고 무게감이 있는 연주를 합니다. 그의 지휘로 브람스를 협연하면 시너지가 엄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이 곡은 제가 제안했어요.”
샤니도 김봄소리에 대해 “저와 처음 연주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유럽보다 관객층이 젊고 열정적이라 한국 공연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서른 네 살의 케미’는 1악장부터 빛났다. 비올라·첼로·바순의 유니즌으로 시작해 오케스트라가 비교적 긴 서주를 펼쳤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독주 바이올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앞으로 나올 주제를 미리 예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김봄소리의 전원풍 바이올린 선율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릴렉스의 시간이다. 조바꿈이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브람스의 숙련된 작곡 솜씨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의 힘찬 클로징도 인상적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라하브 샤니가 지휘하는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라하브 샤니가 지휘하는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2악장은 각 섹션과 독주자의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반짝였다. 오보에가 2분30초 동안 서정적 노래를 부른 뒤 바이올린과 대화를 나눴다. 달달한 속삭임이다. 평화롭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챘을까. ‘왜 니가 거기서 나와’가 발생했다. 이 악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오보이스트로 함경이 깜짝 출연했다. 함경은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를 거쳐 현재 핀란드 헬싱키 방송 교향악단의 제1수석 종신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테르담필의 오보에 수석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겨 이번 투어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무나 부를수는 없었다. 그래서 급히 함경에게 SOS를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스케줄이 비어 있었다. 대만 공연에서 합류한 뒤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다. 함경은 퍼펙트하게 빈자리를 메웠다.
멈춤 없이 곧바로 아타카(attacca)로 이어진 마지막 3악장은 분위기가 돌변했다. 집시풍 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는 치열한 티키타카(tiqui-taca)를 주고받았다. ‘독주자 김봄소리’는 어떻게 오케스트라와 대등하게 균형을 맞추며 클라이맥스에 이르는지를 보여줬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라하브 샤니가 관객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협연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수고했어요’라며 감사와 존경의 포옹을 나눴다. 로테르담필 단원들도 관객들처럼 김봄소리의 앙코르를 듣고 싶었다. 발로 바닥을 둥둥둥 구르며 ‘한곡 더!’ 퍼포먼스를 해 눈길을 끌었다.
김봄소리는 몇 차례의 커튼콜 뒤 2곡을 선사했다. 그라쥐나 바체비츠의 ‘폴란드 카프리스’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파르티타 2번 d단조’ 사라방드를 연주했다. 박수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자 김봄소리는 악장 옆으로 가 “그만 나가시죠”라고 말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재치 있는 '위기' 탈출이다.
공연을 마친 김봄소리는 인터미션 때 매니저와 함께 1층 객석으로 '잠입'해 2부 샤니와 로테르담필의 공연을 감상했다. 열심히 박수치며 동갑 친구를 응원했다. 흐뭇한 모습이다.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샤니는 29세이던 2018년 로테르담필의 역대 최연소 상임지휘자로 발탁됐다. 로테르담필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지휘자 선택으로 유명하다. ‘차세대 거장의 산실’이라는 별명이 헛말이 아니다.
1988년 35세의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수석 객원지휘자로 점찍었다가 7년 뒤엔 상임지휘자로 영입했다. 2006년엔 33세의 야닉 네제-세갱을 상임지휘자로 임명했다. 이후 두 지휘자 모두 톱클래스로 질주했다. 네제-세갱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겸하고 있다.
샤니는 로테르담필이 자신을 초이스한 이유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단순히 젊어서가 아닙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계에 이르도록 밀어붙이는 감각과 음악에 대한 관점, 그리고 에너지를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로테르담필을 이끈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아니라 이런 자질들입니다.”
그는 로테르담필에 이어 2020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취임했고, 2026년부터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음악감독도 겸직한다. 뮌헨필의 전임 음악감독 게르기예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 지지 행보’로 해임되자 샤니가 후임을 맡은 것.
이처럼 그가 30대 중반에 유력 3개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된 데엔 지휘계의 ‘큰손’ 다니엘 바렌보임과 주빈 메타의 어시스트를 받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메타의 후임으로 이스라엘 필하모닉을 이끌게 된 샤니는 원래 이 악단의 더블베이스 주자였다. 그를 지휘로 이끈 인물도 메타였다. 그는 “메타는 처음부터 저를 응원해줬고, 바렌보임도 스무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론과 실제 지휘를 가르치며 지지해줬다”고 말했다. 든든한 지원군이 뒤에 버티고 있는 셈이다.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샤니와 로테르담필은 표트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b단조(Op.74)’를 연주했다. 이 작품에 ‘비창’이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로 비극적이고 음울한 작품이다. 지휘봉을 들지 않은 그의 맨손을 타고 평생 우울증을 앓았던 작곡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1악장은 더블베이스가 아주 여린 음을 연주하고, 바순이 그 위를 침울하게 걸었다. 희망이라고는 1도 없는 음악이 진행되는데, 그 비극이 주체할 수 없이 커질 무렵 새벽이 오듯 새로운 주제가 고개를 내밀었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인 매혹적 선율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낸다. 이후 잠잠해졌던 비극적 정서가 오케스트라 전체로 퍼진다. 클라리넷은 고요히 아름다운 선율을 재현하지만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으며 1악장을 마무리한다. 먹먹하다.
2악장은 러시아 민요에서 따온 춤곡으로 시작된다. 우아한 선율이 귀로 들어오지만 그 색깔은 밝지 않다. 팀파니의 리듬을 타고 번지는 심장 박동 소리는 어딘가 불안함을 머금고 있다. ‘춤추는 슬픔’이다. 손과 발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추는 슬픔이다.
이어지는 3악장은 작품의 분위기를 180도 바꾼다. 활발하면서도 광폭하다. 팀파니, 심벌즈, 큰북이 열일을 하며 달리고 달렸다. 제시된 주제들이 반복되며 음악은 서서히 규모를 키워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듯 강렬하게 문을 닫았다.
아타카로 이어지는 4악장은 절망과 눈물이 가득하다. ‘탄식조로 느리게’라는 지시어처럼 가장 먼저 현악기에 의해 비극적 주제가 펼쳐진다. 왈칵 눈물을 떨군다. 교향곡 6번은 이전 교향곡과 달리 조용히 마무리 된다. 마치 심장이 천천히 멈춰가듯 저음현이 연주되면 서서히 박동을 멈춘다. 어떻게 보면 맥 빠지는 종결이다. 그래서 더 아련하다.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한 뒤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음악은 끝났지만 샤니는 오랫동안 몸을 풀지 않았다. ‘얼음’이다. 절망과 눈물이 다 지난간 뒤 ‘내 슬픔은 어땠는지’ 복기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서늘한 슬픔이다. 끝없이 속으로 속으로 삼키고 삼키는 슬픔이다.
앙코르로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를 깜끔하게 들려줬다. 샤니의 지명도가 아직 국내에서는 낮고 공연도 한번만 열린 탓에 객석은 꽉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이 더 기대되는 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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