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4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는 김봄소리는 “바둑과 음악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바이올린에 마음을 빼앗긴 건 다섯 살 때였어요. 정경화 선생님 공연에 갔는데 음악의 강렬한 힘에 홀리듯 빠져들었죠. 부모님을 졸라 악기를 선물 받고 기쁨에 들떴던 것은 잠시였어요. 호락호락 쉽게 소리를 내주는 악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죠. 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바이올린은 늘 제 안에 있는 꺼내기 힘든 내면과 상상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해 준 존재입니다. 솔직한 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게 해줬어요.”
김봄소리(34)는 최근 세계 클래식계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다. 2021년 세계적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소프라노 박혜상에 이어 국내 아티스트 세 번째로 ‘노랑 딱지’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오는 1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이스라엘 출신의 라하브 샤니가 지휘하는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 연주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포디움에 서는 라하브 샤니와는 1989년생 동갑내기다. 첫 만남이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은 예술적 선구안이 뛰어납니다. 역대 지휘자를 보면 발레리 게르기예프, 야닉 네제-세겡, 그리고 지금의 라하브 샤니 등 젊은 지휘자의 가능성을 보고 발탁한 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음악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어요. 라하브 샤니는 음악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가 아주 깊은 진중하고 무게감이 있는 연주를 합니다. 그의 지휘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면 시너지가 엄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이 곡은 제가 제안했어요.”
아마 4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는 김봄소리는 “바둑과 음악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브람스는 친숙한 곡이다. 2013년 ARD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고, 2017년에는 요엘 레비 지휘로 KBS교향악단과 협연했다. 그는 “ARD 결선은 브람스의 구조적인 음악을 어떤 사운드와 방식으로 연주하는지 깊이 알게 된 무대였다. 그때부터 브람스에 더 빠지게 됐다”며 “10년 전과 지금의 연주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동안 새로 배우고 연주했던 작품을 제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의미를 정립했다는 것이다. 또한 수많은 지휘자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호흡하며 배웠던 경험도 10년 전과 다른 연주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색깔, 즉 ‘김봄소리 스타일’을 형성했음을 내비친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한때 ‘콩쿠르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장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비에냐프스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등 수많은 경연에서 수상했다.
“쑥스러운 별명이죠. 세계무대에 서는 날을 꿈꾸며 고군분투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애칭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의 간절하지만 무지했던 열정이 생각나 초심을 다잡게 하고요. 콩쿠르는 많은 단점과 장점이 있지만 전문 연주자를 꿈꾸는 후배들이 단시간 내에 많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훈련과 무대 경험을 쌓고 싶다면 도전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김봄소리는 ‘K클래식’ 열풍을 여러 곳에서 체감하고 있다. 한국 아티스트에 대한 해외 음악계의 관심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지고 있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을 만큼 세계가 한국적인 것에 열광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 자랑스럽다”며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으니 부끄럽지 않은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뽑아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국가대표 아티스트’로의 책임에 무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봄소리는 음악일기를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학생 때부터 생긴 습관이다. “제 자신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데에 매일 조금씩 시간을 할애한다는 생각으로 노트를 쓰고 있다. 기록을 남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그리고 세상과 음악을 이해하는 관점이 어떻게 얼마나 변화해왔는지를 볼 수 있다. 연주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나라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니 잊고 싶지 않은 많은 일들을 적어두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기억은 메모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셈이다.
아마 4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는 김봄소리는 “바둑과 음악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그는 유난히 쇼팽 콩쿠르 출신들과 친분이 깊다. 먼저 라파우 블레하츠(2005년 우승)와 인연을 맺었고 가장 가깝게 소통하는 음악인 중 한명이다. 그리고 율리아나 아브제예바(2010년 우승)는 아주 좋아하는 친구이자 음악인이고, 가장 최근 2021년에 우승한 브루스 리우는 같은 기획사에 있어 자주 소통한다.
“서로의 음악을 얼마만큼 존중하는 지가 호흡을 잘 맞추는 것에 큰 영향을 줍니다. 라파우 블레하츠와 처음 만나 대화하고 케미를 맞추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그의 놀랍도록 겸손한 면과 음악에의 지대한 존경, 그리고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었어요. 음악적 측면뿐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연주자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듀오 연주를 하는 것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김봄소리는 바이올린 못지않게 바둑도 사랑한다. 여덟 살 때부터 기원에 다녔고 대학 시절엔 바둑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서울대·도쿄대 바둑 교류전에도 출전했다. 아마추어 4급 정도의 실력이다.
“초등학교 때 기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며 바둑만 뒀어요. 승패 기록에 따라 급수를 정하는 시스템이어서 급수를 올리기 위해 몰두했어요. 바둑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죠. 대학 때는 어릴 때 즐거웠던 추억으로 바둑을 다시 두기 시작했는데, 동아리 선배들은 실력자들이 많아 정말 많이 배웠죠. MT에 가서도 밤새도록 바둑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게임을 섭렵하며 즐겁게 생활 했습니다. 바둑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임이라 요즘은 거의 두지는 못하고, 가끔 선수들 기보를 보거나 심심풀이로 문제를 풀기는 하는데, 솔직히 기력이 거의 다 죽은 것 같아요.”
그는 이창호 기사가 전성기 때 보여준 무겁고 끈질긴 스타일의 기풍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중반까지 상대에게 유리한 바둑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다가 끊임없는 계가와 수읽기로 끝내기에서 치열하게 반집승을 해내는, 사나워 보이지 않지만 고요하게 무서운 바둑 스타일을 선호한다. 바둑을 통해 배운 답들이 음악을 하는 데엔 어떤 도움이 될까 궁금했다.
아마 4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는 김봄소리는 “바둑과 음악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바둑 한판을 보면 기사의 기풍과 성격, 그리고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고 하죠.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곡가의 작품이나 연주자의 음반을 들으면 그 작곡가와 연주자 개인의 삶을 엿볼 수 있어요.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음악 안에서 절대로 숨기거나 위장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바둑과 음악, 둘 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이 있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바둑은 늘 맞은편 대국자의 수를 미리 읽어야 한다.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수를 두었을 때 그로 인해서 대국의 흐름이 바뀌기도 하고 분위기가 전환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라며 “바이올린은 리사이틀에서 주로 피아노와 함께하게 된다.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때, 또는 실내악을 연주할 때에도 늘 다른 연주자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연 때 연주하는 작품자체가 한편의 소통과 대화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면들도 흥미로운 공통점 중에 하나다”라고 말했다.
김봄소리는 하반기에도 스케줄이 빼곡하다. 세계 최대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 BBC 프롬스와 LA 할리우드 보울, 파리 오케스트라에 데뷔한다. 또 DG에서 파비오 루이지가 지휘한 덴마크 국립 교향악단과 녹음한 칼 닐센 바이올린 협주곡도 발매된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봄소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당당하면서도 힘찬, 그리고 희망에 가득 찬 소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추구하는 음악의 소리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봄의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고 싶어요. 연주의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면서 가슴 벅찬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의 인생에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남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kim67@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