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녹음할 당시 많이 아팠어요. 가슴 아픈 음반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최대한 집중해서 제가 쏟아낼 수 있는 걸 다 쏟아냈어요. 앨범 타이틀 ‘리플렉션’처럼 그때의 제 모습도 회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의 본모습을 직면해야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앨범입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3년 만에 유니버설뮤직 산하 유명 클래식 레이블 데카에서 새 앨범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Rachmaninoff, A Reflection)’을 선보였다. 2020년 첫번째 앨범 ‘모차르트’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음반이다. 12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연세에서 열린 앨범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녹음 당시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힘들었던 마음 고생, 몸 고생이 생각나서다.
앨범은 지난 6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틀에 걸쳐 녹음했다. 당시 선우예권은 빡빡한 일정 속에 미뤄둔 예비군훈련까지 받느라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비동염과 편도선염 탓에 고열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녹음 첫날에는 중간에 수액을 맞으러 병원에 들르기까지 했다.
“녹음 직후 빨리 피드백을 줘야 하는데 제가 꽤 긴 시간 ‘잠수’를 타버렸어요. 연락이 안 되니 회사에서는 제가 죽은 줄 알고 걱정했을 정도였다니까요. 다시 앨범을 들으면 녹음 당시 힘들었던 상황들이 떠오르면서 복잡한 생각이 밀려와 다시 듣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몇 주가 지나버려서 스태프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됐어 죄송했어요. 하지만 재료(녹음 원본)를 잘 다듬어줘 지금 들었을 때는 만족도 높은 앨범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음반 타이틀 ‘리플렉션(반사·투영)’의 탄생 스토리도 소개했다. 그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 앨범이 저를 투영하기도 하고, 앨범을 보면서 저를 점검하겠다는 의미도 있다. 거울을 바라보듯 어떤 때는 보기 싫기도 하지만, 그 또한 내 모습이기에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고 싶었다. 애정과 애착이 가는 동시에 가슴 아픈 앨범이다”고 말했다.
통영의 바다도 제목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줬다. “어두운 밤바다의 잔잔한 물결에 반영된 달빛을 좋아한다. 녹음을 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밤바다와 꽉 찬 달을 봤다. 그때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을 끌어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소망했고, 많은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링거 투혼’ 끝에 완성한 앨범에는 모두 6곡을 수록했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곡으로만 채웠다. 그가 남긴 단 두 개의 변주곡인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Op.42)’과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Op.22)’을 넣었다. 또한 로맨틱한 선율로 널리 사랑받는 첼로 소나타 g단조(Op.19)의 피아노 편곡 버전 3악장,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편곡한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그리고 프렐류드 c단조(Op.3) 중 2번과 플렐류드 g단조(Op.23) 중 5번을 담았다.
한 곡 한 곡 모두 소중하지만 변주곡에 더 힘을 쏟은 이유를 밝혔다. 그는 “변주곡은 작곡가들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를 쓸어 담아 꾸리는 장르다. 라흐마니노프를 더 잘 들려주기 위해 메인 곡으로 두 변주곡을 초이스했다”며 “나머지 곡들은 라흐마니노프를 생각했을 때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멜로디나 제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 작품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감상팁도 덧붙였다. “보통 클래식 음악은 정신없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듣게 된다. 퇴근길 운전을 하거나 버스나 지하철에 혼자 있는 상황에서 이 음악을 듣는다면, 음악이 한 분 한 분의 마음과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선우예권에게 아주 특별한 곡.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배웠던 곡으로, 일종의 거리감·외로움·그리움·소망을 담았다고 말했다.
“저는 영재가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음악을 시작했고, 천천히 가는 아이였죠. 만 15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어려움을 겪었어요.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죠. 심지어 음악을 듣고 감동을 느끼기도 어려웠어요. 그러다 17~18살쯤 코렐리 변주곡을 만났죠. 지금도 상상하면 세이무어 립킨(커티스 음악원 교수) 선생님의 연주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아요. 정말 따뜻한 은사님이었어요. 이 곡을 통해 표현력을 키워나가고 성장할 수 있었어요. 라흐마니노프는 감정을 들끓게 만들죠.”
이처럼 라흐마니노프는 선우예권에게 의미 있는 작곡가다. 2017년 한국인 최초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안겨준 곡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피아노를 너무 잘 아는 작곡가였어요. 물감을 가지고 자신의 스타일로 다양하게 색칠 하는데, 그 속에 연주자가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슬쩍 남겨 두었어요. 이 때문에 연주자는 고충을 겪을 수밖에 없기도 해요. 제가 손이 큰 편이 아니다 보니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 종종 불편함을 느끼지만 신기하게 어떤 부분은 어려운데도 제 손엔 잘 맞아요. 그의 곡을 들으면 대서양의 넓은 바다를 저공비행하는 느낌이 들어요. 길게 길게 호흡하는 부분이 곡선을 이루는 게 아니라, 선율 안에서 힘의 완급 조절이 이뤄지는 게 특징이죠. 그 힘의 밸런스를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우예권은 “평생 가장 큰 목표이자 꿈은 죽기 전까지 연주 활동을 계속하며 살아가는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골 마을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는 등 야외 이색 무대 공연 경험도 많다. “예상치 못한 작은 마을이나 소박한 야외 무대의 분위기는 애틋하면서도 연주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져다준다”며 “댓글에 제가 황송해질 정도로 따뜻한 표현이 많아서 마음이 충전된다”고 강조했다.
“콩쿠르 이후에도 음악에 대한 확신, 열정, 애정을 돌이켜보면서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많은 연주 기회가 생기지만 정신적, 감정적으로 고갈돼 연주를 포기하는 사람도 간간이 있어요. 그러지 않기 위해 음악에 대한 마음을 언제나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해요.”
선우예권은 앨범 발매를 기념해 총 11번 전국 투어 리사이틀에 선다. 서울 공연은 10월 18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오는 23일 화성 반석아트홀을 시작으로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부산문화회관, 김해문화의전당, 대전예술의전당, 성남아트리움, 함안문화예술회관, 익산예술의전당, 안양 평촌아트홀을 거쳐 10월 20일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마무리된다. 이번 투어에서는 사인회 등 대면 접촉도 늘린다. 프로그램으로는 라흐마니노프뿐 아니라 슈베르트·바흐를 함께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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