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박승정은 의사다. 심장내과를 담당하고 있다. 세계적인 심장 스텐트 시술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황순원의 ‘소나기’를 꿈꾸며 자랐다. 소설 속 풋풋한 사랑이 자기에게도 곧 생길 일로 생각했으니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랐다.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늙으신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으로 의과 대학에 진학했다. 인턴 시절 한 일간신문에 글을 연재하면서 자신이 글쟁이가 된 줄 알았다. 그래서 레지던트 때 병원을 뛰쳐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과장님의 배려로 어렵게 심장 전문의가 됐다. 그때 글쓰기를 포기했다. 글쟁이는 평생 자신의 삶을 글로 고민하는 언어의 전문가란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연구 강사를 끝내고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겨 와 지금까지 30년 넘게 이곳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심장 혈관 치료 분야에 대한 조금은 엉뚱했던 생각들이 학계에서 인정돼 국내외 학회의 큰 학술상을 여러 번 수상했다. 최근에는 국민 훈장도 받았다. 시대와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시스템과 후배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연구에 대한 열정은 본능처럼 남아 있다.
박승정이 첫 포토 에세이를 내놓았다. 제목은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반복되어도 싱그럽다’(궁편책). 500쪽을 넘어가는데다 표지가 하드커버로 되어 있어 두툼하다. 잦은 출장길과 틈틈이 떠난 가족과의 여행길을 죽 이으면 300만 마일의 비행 거리로 환산된다. 세계 곳곳에서 카메라로 기록한 25년이 무수한 사진으로 남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99년부터 2023년에 이르는 저자의 내밀한 시간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 고요해지고, 마침내 뭉클하다. 이 책의 찐매력이다.
어떤 길은 동료 혹은 친구와 걸었다. 또 어떤 길은 늦둥이 딸과 함께했다. 때때로 혼자 거닐기도 했다. 어떤 곳은 여러 해에 걸쳐 들렀다. 어떤 해는 유난히 분주하게 여러 곳을 다녔다. 일상과 동떨어진 시간과 장소에 놓였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을 캐치하기 위해 쏘다녔다.
“같은 장소, 같은 사물일지라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담는다. 렌즈의 차이, 구도의 차이, 각도의 차이, 빛의 밝기, 셔터 스피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차이들이 모여 생경한 인상을 자아낸다. 사사롭고 근소한 차이들이 똑같은 대상의 전혀 다른 존재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반복되어도 싱그럽다.”
박승정은 책의 본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를 찾아가면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300일쯤 영상이나 사진으로 그 장면을 찍어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반복되어도 싱그럽다’로 책 제목을 정했다. 매일 매일이 선물이고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새롭게 과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중략) 나를 아는 이들의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오래 남고 싶다는 욕심은 동물의 본능에 가깝고, 앞으로 나를 기억해 줄 늦둥이와 집사람을 위한 사랑 이야기를 조금 남겨 놓고 싶었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 책의 시작점을 적었다. ‘나를 기억하게 할’ 지극히 사사롭고 소박한 이유로 25년의 세월을 취합하는 대대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직업 특성상 우리 모두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있다는 간명한 사실을 자주 목도하는 그는 더 지체할 것이 없었다. 그간 스스로를 기억하기 위해 찍어 온 사진을 엮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기억되기 위한 또 다른 기록을 남기고자 했고, 그렇게 책이 탄생했다.
이처럼 사적인 활자와 개인적인 시각으로 남긴 사진을 보면서 뭉클함을 비롯한 이런저런 감정의 교차를 느낄 수 있는 건, 누구나 유한함이란 섭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목차가 있지만 목차가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본문 전체를 몇 갈래로 나눠 각각 타이틀을 달아 묶는 일반적인 구성을 벗어났다.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인 내밀한 기록에 초점을 맞춰 일기장처럼 사진으로 남긴 나날의 날짜와 내용만이 연거푸 이어진다.
구태여 연도나 장소별로 정리하지도 않았다. 집을 청소하다 우연히 찾은 앨범은 왜 항상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지. 기어코 앨범을 꺼내 들고는 아무렇게나 앉아 손끝에 걸리는 대로 펼쳐 보게 된다. 저자가 여러 밤을 지새우며 사진을 뒤적이고, 기억을 더듬어 끄집어낸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저자의 호흡에 발맞춰 이 책의 일상성을 더욱 밀착해 느낄 수 있도록 다소 두서없는 구성을 과감히 택했다.
<서연이랑 아내랑 고베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삿포르에 왔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산세가 놀라울 정도로 웅장했는데, 그 위를 한참 돌다 아주 작은 구석에 착륙했다. 공항으로 나오니 서연이가 피곤했는지 칭얼거리며 팔에 안겼다. 몸무게가 부쩍 늘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어깨가 아파 오고 지친 허리가 버거울 때쯤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빠, 힘들면 말해. 나 내려갈게.”
이제 세 살밖에 안 된 늦둥이한테 배우는 게 있었다. 이놈은 따듯한 말 한마디의 힘을 안다. 세상에 저밖에 없는 듯 투정만 부리다가도 문득 아빠가 힘들 걸 걱정했다. 허리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꿋꿋이 버티고 섰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힘드셨을 몸사랑을 늦둥이를 통해 이제야 뒤늦게 배워 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통해 다시 배우는 몸사랑,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자라는 이야기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늦둥이의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자고 일어났더니 밖에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외딴 산속 시간이 어느 한 순간에 정지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남아서 눈을 치우고 그래도 누군가는 길을 나섰다.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던 눈 덮인 작은 집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226쪽에 나와 있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늦둥이의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글이다. 사진은 2008년 삿포르에서 찍은 것을 넣었다. 울컥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께 전화를 하고 싶게 만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며칠 동안 말 한마디도 섞지 않은 아들 딸에게 슬쩍 말을 건네고 싶게 만든다.
책 앞부분에 다섯 명의 추천 글이 있다. 최재천(이화여자대학교 석좌 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김별아 (소설가), 김철중(조선일보 의학 전문 기자), 김폴리나 (사진작가), 김찬기(한국현대소설학회장)의 글을 읽으면 인간 박승정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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