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산타모자 인형 덥석 받아든 임윤찬...‘3000석 1분 매진’ 실력 입증했다

정명훈 지휘 뮌헨필하모닉과 호흡 맞춰 세종문화회관 데뷔
프로그램북 1500부 불티·포토월 사진촬영 대기줄 등 진풍경

박정옥 기자 승인 2023.11.30 19:18 | 최종 수정 2023.12.08 00:23 의견 0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콘서트장 로비에서부터 분위기가 확 달랐다. 손에 프로그램북을 들지 않은 사람을 오히려 더 찾기 어려웠다. 1500부를 준비해 5000원씩 팔았는데 일찌감치 동났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든 1장짜리 홍보 전단지도 금세 사라졌다. 포토월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팬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일부는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 다른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 앞에서 셀카를 찍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세종문화회관 좌석은 휠체어석 등을 포함해 총 3022석이다. 지난 8월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1분 만에 유료 판매 2954석이 매진 됐다. 유료 객석점유율이 99%에 달했다. 대단한 기록이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몇몇은 로비에 설치된 모니터 TV를 보며 직관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피아니스트 임윤찬이기에 가능한 현상들이다. ‘임윤찬 신드롬’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한 그는 29일 마에스토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필하모닉과 환상 케미를 선사했다. 세종문화회관 데뷔 무대다. 뮌헨필은 이번에 일곱 차례 한국 단독 투어를 펼친다. 그 중 다섯 번을 임윤찬과 협연한다. 두 번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호흡을 맞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 뒤 정명훈과 포옹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임윤찬이 연주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Op.58)’. 이미 독일과 한국에서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몇 차례 손발을 맞춰서인지 여유롭고 안정감이 있었다. 4번은 악성이 남긴 5개의 피아노 콘체르토 가운데 가장 온화하고 유려하다. 3연으로 된 시를 닮았다.

협주곡은 통상적으로 관현악 제시부가 나오며 시작되지만, 이 곡은 특이하게도 피아노가 다섯 마디 주제부를 차분하게 제시하며 리드한다. 임윤찬이 건반을 터치하며 1악장이 시작됐다. 겉은 오케스트라에게 “곧 달릴 테니 준비들 해요”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지만, 속내는 관객들에게 “여러분 들을 준비 되셨죠”라는 다정한 귓속말이었다.

임윤찬의 주제부 선율을 이어받은 오케스트라는 첫 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를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베토벤은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던 요제피네를 사랑했다. 하지만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요제피네의 삶도 기구했다. 백작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20대 중반의 잚은 나이에 아이 넷 딸린 과부가 됐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때의 행복과 환상이 1악장에 투영됐다. 아름답고 풍부한 선율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고 하강했다.

카덴차(피아노 독주) 파트는 빠르게 내달렸으면서도 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깨끗했다. 다이내믹한 구간에서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파워풀하게 건반을 내리쳤고, 비통감을 담아낼 땐 음을 짧게 컨트롤하며 감정의 진폭을 키웠나갔다.

2악장 안단테 콘 모토는 채 5분이 되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감정이 녹아 있다. 관현악의 육중함이 포문을 열자 2004년생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날렵함을 앞세워 대항했다.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며 밀당을 펼쳤다. 반쯤 지나 임윤찬은 더없이 서글픈 선율을 토해냈다. 가슴 철렁 내려앉는 슬픔이다. 더 듣고 싶은데 소리는 점점 잦아들며 사라졌다. 응달에 남아있던 자투리 눈이 햇볕에 금세 녹듯, 그렇게 소리가 떠났다.

마지막 3악장 론도 비바체는 협주곡 고유의 불꽃 경쟁을 보여줬다. 이제껏 침묵했던 팀파니와 트럼펫까지 가세하며 베토벤 특유의 열정과 활력을 힘차게 드러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주를 마친 뒤 객석의 환호와 박수에 몇 차례 입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인사한 임윤찬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앙코르로 들려줬다. “추운 겨울, 더 많이들 사랑하세요”라는 연말 인사였다.

한 관객이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작은 인형을 건네자 임윤찬은 덥석 받았다. 26일 예술의전당 공연에서는 ‘레고 장미’를 선물 받아 악장에게 줬는데, 이날은 가지고 들어갔다. 1열에 앉은 관객은 제대로 팬심을 전달한 셈이 됐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30대 여성 관객은 “클래식에 문외한이다. 친구 10명의 도움으로 정말 어렵게 티켓팅에 성공했다”며 “임윤찬의 연주를 실황으로 처음 봤는데 마치 두 사람(임윤찬과 정명훈)이 한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서로 대화가 오고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명료한 연주가 정말 놀라웠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 거주 40대 여성 관객은 “이미 26일 예술의전당 연주를 감상했다.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티켓을 구하지 못해 로비에 나와 모니터 TV로 연주를 듣고 있다”며 “무아지경에 빠져 연주하는 임윤찬의 모습을 보며 저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며 웃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연주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2부는 뮌헨필의 시간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8년 내한 공연한 이후 약 5년 만에 다시 같은 무대에 섰다. 독일 정통 사운드의 계승자답게 투명하고 명료한 음색, 완벽에 가까운 음향 밸런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목관 악기의 진가를 입증했다. 이들은 베토벤 교향곡 3번 내림E장조(Op.55) ‘영웅’을 선보였다.

영웅의 출현을 알리는 듯한 두 번의 짧고 강력한 화음으로 1악장이 시작됐다. 첼로 파트에서 흘러나오는 주제선율은 영웅의 풍모를 표현하는 것처럼 늠름하다. 유장한 흐름이 전체에 걸쳐 흐른다. 2악장은 유명한 ‘장송 행진곡’. 악장 내내 깊은 비애와 고뇌가 서린 장중한 발걸음이 계속된다. 3악장은 활기찬 스케르초. 중간부에서 3대의 호른이 앙상블을 이뤄 뿜어내는 팡파르가 인상적이다. 4악장은 독창적 피날레가 귀를 사로잡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명훈은 특유의 힘 있고 섬세한 지휘로 뮌헨필을 이끌었다. 손동작 하나만으로도 최상의 사운드를 뽑아내며 베테랑의 실력을 보여줬다. 중간 중간 지휘를 멈춘 채 악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포즈를 취할 땐 이심전심 사운드의 극치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공연의 대미는 ‘아리랑’이 장식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곡”이라는 정명훈의 설명과 함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팀파니의 둥둥둥 신호에 따라 클라리넷, 플루트, 트럼펫이 우리 귀에 익숙한 선율을 펼쳐냈다. 3명의 관악 연주자가 차례대로 일어나 연주하는 모습은 강렬했다.

이번 무대을 기획한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공연 포스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로 극장 로비가 북새통을 이뤘다”며 “이는 그간 클래식 공연장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매우 긍정적인 진풍경이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임윤찬을 비롯한 한국 클래식 연주자가 더 많은 관객을 공연장으로 유입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한번 강북 클래식 전용 공연장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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