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역시 멀티바리톤 정승기...리트·멜로디·한국가곡·오페라 무엇을 부르든 감동

피아니스트 박진우와 호흡 맞춰 귀국 후 첫 독창회
말러·플랑크·이재문의 가곡으로 고막남친 마법 선사
​​​​​​​소프라노 임세경과는 베르디 오페라 이중창 불꽃배틀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2.26 13:57 | 최종 수정 2024.02.26 14:44 의견 0
바리톤 정승기가 리사이틀을 마친 뒤 특별출연해 함께 이중창을 노래한 소프라노 임세경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경페이스북 캡처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바리톤 정승기가 씩씩하게 무대로 걸어 나왔다. 객석에서 와아~ 일제히 함성이 쏟아졌다. 16년 동안의 유럽 활동을 마무리하고 2022년 9월부터 모교인 중앙대 음악학부 성악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스승을 응원하기 위해 제자들이 많이 왔다. 국내 무대를 쥐락펴락하는 동료 선후배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소프라노 서선영, 메조소프라노 백재은, 테너 강요셉, 바리톤 강형규, 바리톤 박정민, 오페라 연출가 김숙영, 인천시향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이병욱, 피아니스트 백순재 등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지난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정승기의 국내 첫 리사이틀이 열렸다. 모두 4곡으로 구성된 구스타프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로 공연이 시작됐다. 말러는 자신이 쓴 가곡의 선율을 나중에 교향곡에도 자주 이용했다. 요즘말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선구자인 셈이다. ‘방황하는 젊은이 노래’는 자신의 첫 교향곡 ‘거인’에 활용했다. 1악장은 제2곡을 자유롭게 풀어 쓴 환상곡이고, 3악장 중간에는 제4곡의 주제선율이 나온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결혼식을 한다면’(제1곡)은 도입부부터 쿵쿵~ 둔탁한 피아노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제1곡을 지배하는 시그니처 선율인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모두 열 번 정도 등장한다.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옥이다. 피아노가 그때의 심장 내려앉는 고통을 표현한 것 같았다. 그 아픔 위로 정승기는 한없이 절망적인 슬픔을 토해냈다.

‘오늘 아침에 들판에 나섰는데’(제2곡)와 ‘나의 가슴에 박힌 뜨거운 칼’(제3곡)을 지나 ‘내가 사랑하는 이의 파란 두 눈동자’(제4곡)에 이르렀다. 독일어는 된소리와 거센소리가 유독 거칠게 느껴지는데 바리톤의 목청에서 나오는 발음은 뜻밖에도 서정적이다. 전체적인 노랫말과 분위기는 쓸쓸한 애상조인데 ‘고막남친’이라니. 정승기의 마법이다.

바리톤 정승기가 리사이틀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자 소프라노 임세경과 피아니스트 박진우가 박수를 치고 있다. ⓒ민은기 기자


리트의 묘미는 역시 피아노와 노래의 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손발을 맞추는 것도 좋지만, 피아노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눠야 온전히 맛을 느낄 수 있다. 정승기와 박진우(중앙대 음악학부 피아노전공 교수)가 합동으로 빚어내는 소리는 엑설런트했다. 정승기는 “평소에도 박진우 교수와 자주 어울려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는다”고 말했는데, 둘의 사이를 제대로 입증했다.

특히 제4곡은 백아와 종자기가 보여준 지음(知音)의 경지에 가까웠다. 환상 케미가 반짝였다. 노래 중간 피아노가 살짝 멈추는 포인트와 끝 부분에서 피아노가 긴 여운을 끌어나가는 장면은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정승기는 피아노 소리를 받아들인 뒤 자신의 온몸에서 한 바퀴 순환시킨 후, 노래를 섞어 다시 관객에게 전달했다. 아름다운 브로맨스다.

정승기는 독창회를 앞두고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성악가의 여러 분야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리트(독일 예술가곡), 멜로디(프랑스 예술가곡), 한국 가곡, 오페라 등을 두루 잘 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풍부한 감성의 가곡부터 빌런 아리아까지 모든 것을 담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40여 편의 오페라에서 500여 회 주역을 맡아 ‘음침한 남자’를 도맡았지만 이번엔 ‘서정적 사나이’ ‘달콤 가이’로 변신한 것. 구색 맞춰 한 두곡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집중해 가곡집에 들어있는 전체 곡을 불렀다. 정성 가득한 선곡이다.

그는 지난 학기에 전공 실기 제자 16명을 가르쳤다. 그들에게 늘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대하는 자세다.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목말라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을 배울 때 스펀지처럼 쭉 빨아들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각별한 후배 사랑·제자 사랑이 묻어나는 멘트지만, 자신의 모토이기도 하다.

바리톤 정승기가 피아니스트 박진우와 호흡을 맞춰 리사이틀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정승기와 박진우는 말러의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5 Rückert-Lieder)’으로 다시 짝꿍을 뽐냈다.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5편을 뽑아 말러가 곡을 붙였다. ‘나의 노래를 엿보지 마세요’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았네’ ‘아름다움을 사랑하신다면’ ‘한밤중에’ ‘나는 세상의 삶을 잃어버렸다오’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렀다.

‘한밤중에’는 폭풍고음이 일품이다. 잠결에서 깨어나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하지만 그 어느 별도 내게 미소를 짓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결국 직면하는 근원적 고독감이 살짝 엿보인다. 한 남자의 절절한 외침은 슬픔을 더블로 만들었다.

“나는 세상의 삶을 잃어버렸다오/ 내가 많은 시간을 악착같이 살아온 세상이건만/ 세상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으니/ 아마도 내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설혹, 그렇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미련이 없으니/ 내가 죽었으리라 믿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사실을 아니라고 버텨낼 수 없으니/ 사실 나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승기는 ‘나는 세상의 삶을 잃어버렸다오’에 대해 “특히 가사가 마음을 울려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상 풍파를 겪은 한 남자의 나지막한 고백이 뭉클하다. 체념이 아니라 달관이다. 영화 ‘가면 속의 아리아’에도 이 노래가 주제곡으로 쓰였다. 영화 속 조아킴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 피아노와 노래의 케미가 또 한 번 폭발했다.

프랑스 예술가곡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프란시스 풀랑크의 ‘명랑한 노래들(Chansons gaillardes)’은 반가웠다. ‘명랑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흐린 데 없고 밝고 환하다’ ‘유쾌하고 활발하다’라고 풀이돼 있다. 비교적 짧은 8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랫말이 정말 명랑했다. 구김살이 없다. 엄숙하고 진지했던 독일 예술가곡과는 결이 다른 매력이다.

이놈 저놈을 죄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여친 때문에 속상하고(‘바람둥이 애인’),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마시고 마셔 달콤한 술향기로 몸을 방부제 처리해 미라가 되자고 소리치고(‘권주가’), 천사같이 아름답고 작은 양처럼 부드러운 애인에게 홀딱 반하고(‘마드리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것임을 맹세하는(‘운명에의 기원’) 등 시시콜콜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정승기의 해학적 해석이 돋보였다.

어디 이뿐인가. 빈 포도주 병을 볼 때는 슬프고 술병이 가득 찼을 때는 즐거워지고(‘음주가’), 사랑의 신에게 양초를 드리며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고(‘봉헌’), 큐피트의 화살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상처받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충고하고(‘세레나데’), 지갑의 두께를 보고 직업의 위치를 확인하고 난 뒤에 마음을 보는 여심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는(‘적령기의 아름다움’) 등 생활밀착형 가곡에 웃음이 절로 났다. 정승기에게 ‘적령기의 아름다움’은 행운의 곡이다. 이 노래로 콩쿠르에서 몇 번 우승을 차지했다.

정승기는 공연에 앞서 “말러와 풀랑크의 가곡은 독일 활동 당시 칼스루에 극장 기획공연으로 독창회를 열어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레퍼토리다. 유럽무대에서 쌓은 경험과 많은 거장에게 전수 받은 다양한 가창법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 오페라 무대에서 만날 수 없었던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음색과 기교, 표현과 기품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리사이틀을 통해 그의 말을 그대로 증명했다.

바리톤 정승기가 리사이틀을 마친 뒤 피아니스트 박진우와 소프라노 임새경과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한국 가곡도 한 곡 넣었다. 김지하의 시에 이재문(중앙대 음악학부 작곡전공 교수)이 곡을 붙인 ‘줄탁’을 불렀다. ‘줄탁’은 중국 송나라 때 서적 ‘벽암록’에 나오는 ‘줄탁동기(啐啄同機)’의 줄임말이다. ‘줄’은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기 위해 쪼는 것이고, ‘탁’은 어미 닭이 도와주려고 알을 쪼는 것을 뜻한다.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 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국립극장과 칼스루에 국립극장 전속 주역가수로 유럽을 종횡무진 누빈 정승기가 한국으로 컴백한 후의 미래가 그려지는 노랫말이다. ‘껍질 깨고 나가,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는’ 정승기를 만날 수 있으리.

정승기는 지난해 ‘로베르토 데브뢰’(노팅험 공작 역) ‘라 트라비아타’(제르몽 역) ‘토스카’(스카르피아 역) 등 굵직한 오페라 무대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가곡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기인 오페라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실력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나오는 볼프람의 아리아 ‘고귀한 이 모음을 둘러보면 (Blick ich umher in disem edlen Kreise)’과 ‘오 그대 고귀한 나의 저녁별이여(O du mein holder Abendstern)’를 불렀다. 비록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는 엘리자베트지만, 그의 앞날을 굽어 살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볼프람 정승기의 ‘저녁별의 노래’는 뭉클했다.

또 한 명의 든든한 지원군이 정승기 독주회에 특별출연했다. 소프라노 임세경이다. 두 사람은 함께 중앙대 음악학부 성악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같은 학교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이다 보니 케미가 장난이 아니다.

먼저 아버지(아모나스로)와 딸(아이다)로 변신해 주세페 베르디 ‘아이다’ 중 ‘하늘이여, 나의 아버지(Ciel! mio Padre!)’를 들려줬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 노래를 시작했다. 곧 엄청난 갈등이 찾아옴을 상징하는 복선이다.

나라를 빼앗긴 에티오피아의 왕 아모나스로는 아이다에게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의 병사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알아오도록 설득한다. 사랑 앞에서 아이다가 머뭇거리자 아모나스로는 “정복당해 고통 받는 백성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다”라며 딸을 닦달한다.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는 목소리 배틀이 박진감 넘쳤다. 결국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부녀는 포옹하지만, 이내 더 큰 비극이 닥쳐옴을 눈치챌 수 있다.

이어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들리느냐? 가혹한 눈물의 소리를(Udiste?... Mira di acerbe lagrime)’을 노래했다. 이미 만리코를 사랑하는 레오노라와 그런 레오노라를 연모하는 루나 백작의 갈등을 보여줬다. 불꽃 배틀이었다. 만리코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레오노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는 간교한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은 오싹할 정도였다.

바리톤 정승기가 리사이틀을 마친뒤 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승기페이스북 캡처


프로그램북에 나와 있는 곡을 모두 부른 뒤 정승기는 “이번 공연은 귀국 후 준비한 첫 번째 독창회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 부모님, 스승님들, 그리고 팬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했다.

앙코르는 두 곡을 선사했다. 들어갔다 나왔다는 반복하기보다는 곧바로 준비한 보너스 곡을 노래했다. 노영심이 작사하고 작곡한 ‘시소타기’를 성악곡에 맞게 편곡해 불렀다. “네가 별을 따오거든/ 난 어둠을 담아 올게/ 너의 별이 내 안에서/ 반짝일 수 있도록/ 니 미소가 환히 올라 달로 뜬다면/ 너를 안아 내 품은 밤이 되야지” 우직한 목소리가 더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프러포즈송으로 안성맞춤이다.

이어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세니에’에 나오는 ‘조국의 적(Nemico della patria)’을 들려줬다. 바리톤의 역량을 시험하는 테스트용 노래로 자주 언급되는 곡이다.

정승기의 리사이틀이었지만 임세경, 박진우, 이재문 등 ‘중앙대 3총사’가 힘을 보태준 덕에 더 반짝이는 독창회였다. 제자들도 한몫했다. 열띤 박수와 환호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플래카드까지 준비해 스승을 응원했다. 흐뭇한 독창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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