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앞으로 14번의 공연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첫 공연부터 막강했다. 3중주, 4중주, 5중주 등 다양한 명품조합 실내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요즘 자주 쓰는 ‘밀당’ ‘단짠’ ‘티키타카’ ‘케미’ 등의 신조어가 모두 들어있는 음악회. 바로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다. 올해는 60여명의 음악가가 참여하는데, 첫날 12명이 한방을 날렸다.
제19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개막공연이 24일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렸다. 올해의 전체 주제는 ‘가족의 모든 것(All in the Familly)’이다. 가족의 범위를 확대해 다양한 종류의 음악 가족을 탐구한다.
개막공연의 테마는 ‘클래시컬 패밀리(Classical Family)’. 공연에 등장하는 작곡가 가운데 세 명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들이다. 페르디난트 리스는 베토벤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만났다는 일화는 아직도 진위가 불분명하지만, 모차르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실제로 베토벤을 만나 격려를 받은 적이 있다.
쥘 드메르스망은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고전파 작곡가들을 깊이 존경했고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습득했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고전파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가족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 네명의 작곡가들은 클래시컬 패밀리다.
무대 조명이 켜지자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강동석 예술감독이 걸어 나왔다. 그는 “올해의 주제는 가족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골라보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넘친다. 앞으로 2주 동안 자주 방문해 달라”며 정겨운 호객행위를 했다.
스프링실내악축제의 또 다른 묘미는 연주자들이 직접 곡을 소개한다는 점. 강 감독은 “어떤 분들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올해는 1분~2분 정도로 짧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말해 웃음을 안겨줬다.
첫 팀이 나왔다. 마티어 듀프르(플루트), 대니 구(바이올린), 이한나(비올라), 김민지(첼로)는 페르디난트 리스의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1번 C장조(Op.145)’를 연주했다. 리스는 뛰어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Op.145’는 리스가 말년에 쓴 세 개의 플루트 4중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제1번’은 본질적으로 고전주의 음악에서 살짝 한 걸음 벗어나 있는 정도의 곡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큰 소리도 유쾌하게 인사했다. 최근 MBC TV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도 출연한 에너지 넘치는 연주자다. 그는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의 매력 중 하나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날 수 있는 것인데, 저도 프로그램을 받아보고 리스라는 작곡가를 처음 알게됐다”며 “상큼 발랄하고(1악장), 아름답고(2악장), 농담이라는 뜻의 스케르초가 나오고(3악장), 스페인의 영향도 나타난다(4악장)”고 곡을 설명했다.
정말 그랬다. 1악장 발전부는 단편적 선율들이 반짝였고, 2악장은 모차르트의 ‘불협화음 4중주(K.465)’의 느린 악장을 인용했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모든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 3악장은 쾌적하고 산뜻했다. 플루트 특유의 가볍고 맑은 음색이 잘 드러났다. 어떤 때는 해학적 사운드를, 또 어떤 때는 서정적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이올린의 개인기도 좋았다. 악기들의 적절한 밀당이 인상 깊었다. 4악장은 ‘스페인풍의 알레그로’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는데, 실제로 경쾌한 스페인풍의 리듬이 흘렀다. 끝나는지도 모를 정도의 자연스러운 종결도 돋보였다.
두 번째 주자로 임효선(피아노), 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 로망 귀요(클라리넷), 로랭 르퓌브레(바순), 에르베 줄랭(호른)으로 구성된 팀이 나왔다. 이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5중주 내림E장조(K.452)’를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임효선은 “흔한 편성은 아니다. 모차르트가 28세 때 작곡했다. 초연 후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지금까지 쓴 작품 가운데 최고입니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베토벤도 이 곡에 감동을 받아, 똑같은 조성으로 곡을 만들었다. 각자가 솔리스트면서도 또한 하모니가 잘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이 ‘후~’ 짧은 숨으로 곡의 시작을 알렸다. 1악장은 라르고의 긴 서주로 지니고 있으며, 이어지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는 우아한 분위기를 뽐냈다. 2악장 라르고에서는 각 악기들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서로 주고받으며 유기적 결합과 균형감을 펼쳤다. 클라리넷-오보에-호른-바순의 순서로 이어진 두 차례의 티키타카 연주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3악장은 기본적인 론도 형식을 따르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피아노와 목관악기들의 기교적 표현과 함께 실내악적 긴장감을 보여줬다.
배턴을 이어받은 문지영(피아노), 강동석(바이올린), 강승민(첼로)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1번 내림B장조(D.898)’를 들려줬다. 이 곡을 쓸 당시 슈베르트는 삶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지만(그는 이 곡을 쓴 뒤 1년여 밖에 더 살지 못했다), 원숙한 음악성으로 위대한 걸작을 연이어 쏟아냈다. ‘피아노 3중주 1번’이 대표적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은 “비극적인 마지막 인생을 보내던 시기인데 곡은 한없이 경쾌하고 밝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고 말했다.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슈베르트가 ‘나는 살고 싶다’는 속마음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담아낸 것은 아닐까.
소나타 형식의 1악장은 슈베르트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쾌하고 태평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2악장 안단테 선율은 다분히 베토벤 ‘비창 소나타’의 유명한 아다지오 칸타빌레 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두 작품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피아노와 첼로의 단짠 궁합에 바이올린의 MSG 가세는 감칠맛을 살렸다.
3악장 스케르초 섹션은 명랑하고 낙천적이지만 춤곡 요소가 한층 더 부각됐다. 힘찬 파워도 느껴졌다. 마지막 4악장은 론도라고 적혀 있지만 소나타 형식에 더 가깝다. 이 악장을 여는 바이올린의 우아하고도 유쾌한 선율은 슈베르트의 전형적인 리듬을 지녔다. 발전부의 섬세하고 정교한 대위법은 슈베르트가 후기 작품에서 도달한 독자적 경지를 보여줬다.
마티어 듀푸르(플루트), 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 문지영(피아노)은 쥘 드메르스망의 ‘플루트,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윌리엄 텔’을 연주했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 텔’에 나오는 주제들에 기초해 작곡한 일종의 환상곡이다. 러닝 타임이 12분 정도인데 피아노를 배경으로 플루트와 오보에가 화려한 활약을 펼친다.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연주자들의 케미스트리가 황홀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는 개막공연 ‘클래시컬 패밀리’를 시작으로 모두 14번의 공연이 열린다. ‘방랑자’ ‘친불파’ ‘비극의 패밀리’ ‘선민’ ‘기념일’ ‘바람만이 아는 대답’ ‘선구자’ ‘몰토 에스프레시보!’ ‘뮤지컬 패밀리’ ‘나보다 나은 반쪽’ ‘유머레스크’ ‘비극의 피날레’ 등 흥미진진 콘서트가 대기하고 있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