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어서오세요! 쇼팽·푸치니·포레·드보르자크·스메타나”...대가들 추억해준 고택음악회

2024년 기념일 맞은 작곡가들 곡으로 프로그램 구성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시그니처 콘서트 올해도 히트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소음도 음악이 된 핫플레이스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5.03 17:36 | 최종 수정 2024.05.04 08:37 의견 0
현악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안국동 윤보선고택서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스무 살 때 이 곡을 처음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을 훌쩍 넘어 이번이 두 번째 연주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기분이 묘하게 다릅니다. 스메타나가 청력을 잃은 뒤에 작곡했기 때문에 중간에 삐 소리 같은 것도 실제로 들려요. 개인적으로 3악장을 좋아합니다.”

지난 27일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으로 손꼽는 종로구 안국동 북촌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 지어진지 150여년쯤 되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38호)다. 올해 19회를 맞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의 시그니처 콘서트인 고택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실내악단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이 마이크를 잡고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현악 4중주 1번 e단조’를 소개했다. SSF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연주자들이 직접 자신들이 연주할 곡을 설명해준다는 것. 친절한 배려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과 김영욱, 비올리니스트 김규현, 첼리스트 이원해로 구성된 노부스 콰르텟이 고택음악회 피날레 곡으로 스메타나의 현악 4중주를 연주했다.

스메타나는 2개의 스트링 콰르텟을 남겼는데, 첫 작품에 ‘나의 생애에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말년에 청각을 잃어 고통 속에서 살았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상하며 이를 자서전적으로 묘사했다. 전통적인 형식보다는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 삶을 돌아보는 표제음악이기 때문에 각 악장에는 제목이 붙어있는 것도 특징이다.

현악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안국동 윤보선고택서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1악장(젊은 날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동경)은 첼로의 지속음과 바이올린의 계속되는 3도 진행을 배경으로 비올라가 강렬하고 단호하게 제1주제를 연주했다. 스메타나는 이를 ‘운명의 경고’라고 불렀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일으켰다. 그 뒤에 서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제2주제가 등장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안정을 찾았다.

2악장은 ‘즐거운 소년시절’이다. 체코의 민속춤곡인 폴카가 특징적으로 사용됐는데, 춤곡에 빠져있던 스메타나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 것이라고 한다.

‘첫사랑의 행복’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3악장은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된 소녀와의 사랑의 축복을 묘사했다. 느리게 진행되는 첼로의 독주로 시작되는데 애달픈 선율이 회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먹먹한 슬픔이다.

‘민족음악, 성공, 그리고 파국’이라는 표제의 4악장은 힘찬 투티로 시작됐다. 이것이 제1주제를 이루며, 제2주제는 민속적인 동기들로 이루어졌다. 작곡가로서의 성공과 명성, 그리고 민족주의 음악에 대한 인식을 각각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귓병으로 인한 고통을 상징하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진행됐다.
고택음악회의 묘미는 온갖 자연의 소리가 음악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또 소음과 잡음까지도 음악이 된다. 음악회가 열리는 동안 새소리와 바람소리는 기본이고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스피커 소리까지 당당한 연주자로 활약했다.

올해 고택음악회 주제는 ‘기념일(Anniversaries)’. 2024년은 여러 작곡가들에게 기념할 만한 해다. 쇼팽 서거 175주년, 푸치니와 포레 서거 100주년, 드보르자크 서거 120주년, 요한 슈트리우스 서거 125주년,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이다. 윤보선고택에서 이들을 기리는 음악회를 준비해 더욱 뜻 깊은 무대였다. 따뜻한 봄날 오후, 대작곡가들의 넋이 고택을 찾아와 함께 음악을 즐겼다.

플루티스트 윤혜리가 쇼팽의 ‘로시니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음악회의 오프닝은 윤혜리(플루트)와 김다솔(피아노)이 열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2막6장으로 이루어진 오페라 ‘신데렐라’(실제 제목은 ‘라 체네렌톨라’)를 작곡했다. 쇼팽은 이 오페라에 나오는 소프라노의 아리아 ‘더 이상 슬프지 않아’를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으로 만들었다.

윤혜리는 “아주 귀여운 곡이다. 쇼팽이 아마추어 플루티스트였던 아버지를 위해 썼다. 화려한 기교의 곡으로 연주자에게도 도전적인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윤혜리와 김다솔은 주제에 이어 네 개의 변주를 제시한 뒤 다시 원주제로 돌아갔다. 첫 변주는 셋잇단음표 위주로 진행됐고, 두 번째 변주는 e단조로 되어 있고 한층 느리다. 세 번째 변주는 한층 활기차며 다시 장조를 취했다. 마지막 변주는 따른 스타카토 음형을 지녔다.

배턴을 이어 받은 노부스 콰르텟은 자코모 푸치니의 현악 4중주 ‘국화’를 들려줬다. 사보이 공작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하룻밤 새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곡이다. 어두운 분위기의 단악장 곡인데, 푸치니는 나중에 오페라 ‘마농 레스코’에 이 ‘국화’의 선율을 재활용했다.

첼리스트 조영창과 피아니스트 김다솔이 포레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첼리스트 조영창과 피아니스트 김다솔은 가브리엘 포레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Op.24)’를 연주했다. 비가적인 분위기와 함께 포레 특유의 우안한 감성이 빛났다.

“아직도 3분이나 남았네요. 이거 쉽지 않은데요.” 해마다 고택음악회가 한창 진행되는 오후 6시 무렵이 되면 옆에 있는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때문에 5시 55분쯤 무대에 오른 비올리스트 김상진은 교회 종소리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곡을 해설해줬다. 그는 한 회도 빠지지 않고 19회째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 개근하고 있다. 그러나 6시가 되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회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는 “저 지금 뭐한 거냐”며 멋쩍게 웃어 보이며 연주를 시작했다.

김상진(비올라), 조진주(바이올린), 양정윤(바이올린)이 드보르자크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3중주 테르체토’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김상진(비올라), 조진주(바이올린), 양정윤(바이올린)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3중주 테르체토(Op.74)’를 선물했다. 서주의 성격을 지닌 1악장은 서정적인 보헤미아의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중간에 어두운 색조의 음악이 등장하면서 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느리게 연주되는 2악장은 보헤미아 시골의 평화로움과 전원의 맑은 정기가 느껴졌다. 3악장은 비올라의 피치카토 반주 위에 활기차고 리드미컬한 비장미가 제시되고 그 뒤로 짧은 10개의 변주가 이어졌다.

호른 연주자 에르베 줄랭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이어 호른 연주자 에르베 줄랭은 피아니스트 김다솔과 호흡을 맞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를 선사했다. 리하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이에른 궁정 오페라의 호른 수석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호른 주자였다. 리하르트는 아버지를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 기교면에서는 어렵지 않으나 곡 특유의 낭만적 안온함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연주자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감미롭고 따뜻한 화성을 엮어낸 에르베 줄랭의 솜씨가 돋보였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는 ‘나보다 나은 반쪽’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비극의 피날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5월 5일까지 계속된다. 클래식 초심자부터 마니아까지 두루 아우르며 아름다운 실내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