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테너 김우경이 언터처블 미성을 뽐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목소리다. 윤기 흐르는 품격까지 갖추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래를 이렇게 쉽게 부를 수도 있구나’를 보여준 점. 힘들이지 않고도 고음을 내달렸다. 성악가들이 힘껏 볼륨을 높일 때마다 조마조마했는데, 그에게는 그런 걱정이 없다. 느긋하고 편안하다.
김우경이 지난 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연가(戀歌)’라는 주제로 사랑의 달콤함과 인생의 씁쓸함을 아우르는 곡들을 골랐다. 2008년 첫 독창회 후 무려 15년 만에 열린 두 번째 독창회다.
그는 공연에 앞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말 좋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그동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모든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 성격이 단박에 드러났다.
첫 곡은 모두 16곡으로 이루어진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슈만이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에 들어있는 16개의 시를 발췌해 곡을 붙였다. 당시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시기 슈만에게 하이네의 시들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김우경은 15년 전 첫 리사이틀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찐팬들은 30대 때와 40대 때의 보이스를 비교 감상할 수 있어 뜻 깊은 무대였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예술 작품들이 더욱 기품이 생기고 아름답게 변모하듯이 제 노래도 다양한 음악적 경험, 그리고 인생의 깊이와 함께 변화했을 겁니다. 동시에 20대, 30대, 40대 등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달라지는 음색을 그 시기가 아니면 팬들에게 들려드릴 수 없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40대 김우경의 목소리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31세 첫 독창회 이후 15년을 훌쩍 지나 47세에 준비한 ‘시인의 사랑’은 16부작 드라마였다. 주인공은 테너 김우경과 피아니스트 방은현. 두 사람은 퍼펙트 케미를 이뤄 첫 곡 ‘아름다운 5월에’로 시작해 마지막 곡 ‘옛날의 불길한 노래’를 드라마틱하게 엮어냈다. 건조한 콘서트장의 공기를 뚫고 사랑의 기쁨과 실연의 번민, 그리고 지나간 청춘에 대한 후회와 향수를 전달했다.
김우경은 이번 공연에서 문학적 재능도 드러냈다. ‘시인의 사랑’의 독일어 가사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해 자막으로 선보였다. 그는 음악의 목적은 결국 ‘소통’이라며 “클래식 음악가로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래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소리와 음악은 영감이 있어야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봄날에 ‘연가’라는 주제로 제 노래 인생을 여러분과 이야기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김우경은 한양대학교 성악과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노이에 슈팀멘 국제 콩쿠르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모차르트 아리아를 놀라울 만큼 능숙하게 소화해낸 그에게 독일의 신문기자는 20세기 최고의 테너라고 칭송받는 프리츠 분더리히에 견줘 “분더리히가 환생했다”고 극찬했다.
또한 그는 2004년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테너 최초로 우승했다. 노래를 들은 도밍고는 “테크닉은 완벽했고, 음악의 해석은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놀라웠다”고 호평했다.
스페인 비냐스 국제 성악콩쿠르 1위, 핀란드 미리얌 헬린 국제 성악콩쿠르 1위 등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30세였던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최초로 한국 소프라노와 테너가 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김우경은 소프라노 홍혜경과 함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으로 노래했다. 이듬해에는 영국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주역으로 홍혜경과 한 무대에서 노래하며 화제가 됐다.
이후 밀라노 라 스칼라 등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을 비롯해 세계 메이저 무대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현재 모교인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경은 이밖에도 이탈리아 가곡을 예술가곡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가곡 ‘여름의 달이여(Luna d'estate!)’ ‘어부의 노래(Il pescatore canta!')’, 그리고 영어 가곡 ‘어제(Yesterday)’ ‘분리된(Parted)’을 불렀다.
프랑스 자연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평론가로 잘 알려진 레이날도 안의 서정적이며 섬세한 가곡 ‘감미로운 시간(L’heure exquise)’ ‘사랑에 빠진 여인(L’énamourée)’도 함께 선사했다.
마지막은 한국 노래였다. ‘섬집아기’ ‘오빠생각’ ‘나뭇잎배’ ‘꽃밭에서’ ‘반달’ ‘엄마야 누나야’ ‘과수원길’ 등 친숙한 동요들을 엮어서 하나의 환상곡처럼 새로 편곡한 최영민의 ‘한국 동요의 향수(Nostalgia for Korean Songs)’를 불렀다.
앙코르는 체사레 안드레아 빅시오의 ‘사랑한다 말해줘요 마리우(Parlami D’amore Mariu)’와 손경민의 ‘여정’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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