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12월의 단골손님이다. 가난한 청춘 미미와 로돌포가 처음 만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다. 배경이 이렇다보니 캘린더의 마지막 달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연된다.
요즘은 한여름에도 자주 무대에 오른다. 찬바람 씽씽 부는 시즌의 작품을 무더위 한창인 7월과 8월로 가져와 땀이라도 식히려는 계절 역주행 노림수가 깔려 있다. 어느새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팬들을 만나는 1년 365일의 ‘라보엠’이 됐다.
그래서 연출가는 고민이 많다. 자주 공연되니 남들과 똑같으면 변별력이 없다. 관심을 끌 수가 없다. 흥행 성공이 더 어려워진 탓에 작품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지 머리를 쥐어뜯는다. 뾰족한 수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기본적으로 직업적 고충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술적 고충이다. 홍민정 연출은 프로그램북에 들어있는 작품 연출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받을 때면 나는 항상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오페라 전체를 지배하는 얼어붙은 계절의 한복판에서 난,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봄을 느끼기 때문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키워드와 묶이는 순간, 그 어떤 계절보다 가장 잔인한 계절이 된다. 하지만 오페라 속에서는 ‘불행’의 주인공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한 비극이 아닌 가슴 아련하지만 따뜻한 드라마가 된다. 가난하지만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배려가 있으며, 슬픔을 함께 나눠주는 친구가 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희망을, 꿈을, 나는 ‘봄’이라 부르고자 한다.”
라벨라오페라단이 관악문화재단과 협업해 지난 9일과 10일 ‘라보엠’을 관악아트홀에서 두 차례 공연했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다는 홍민정 연출의 의도는 이강호 예술감독(라벨라오페라단 단장)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라보엠’을 선보이겠다. 흔한 ‘라보엠’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포부와 맞닿아 있다. 이런 포인트에 주목해 10일 공연을 감상했다.
홍 연출의 무대 디자인은 심플했다. 관악아트홀은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과는 덩치를 비교할 수 없는 700석 규모의 아담한 사이즈다. 협소함 때문에 아트홀에는 악단이 들어가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따로 없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연주를 맡은 아르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아예 무대 뒤쪽에 배치했다. 박해원 지휘자는 가수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지만 찰떡호흡을 맞춰가며 음악을 조율했다.
성악가들이 노래하고 연기하는 앞쪽과 분리하기 위해 스크린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겸하는 가림막 세트를 설치했다. 완벽하게 가린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창문처럼 보이도록 구멍을 냈다. 독립되어 있지만, 또한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줬다.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다.
‘라보엠’은 1막부터 강력한 아리아가 나온다. 독일 하노버 극장의 주역 테너로 활약하고 있는 ‘로돌포 이현재’는 고음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미성으로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mina)’을 불렀다. 어둠 속에서 미미가 떨어뜨린 방열쇠를 찾는 척 하면서 슬쩍 손을 터치하며 부르는 ‘작업걸기용 노래’지만 안 넘어갈 사람은 없으리라.
‘미미 최윤정’도 ‘내 이름은 미미(Si. Mi Chiamano Mimi)’로 화답하며 로돌포의 은근슬쩍 수작을 받아들이는 여우짓을 보여준다.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과 가르니에 극장에서 활약한 소프라노는 관객을 사로잡으며 금세 모두의 고막여친이 됐다.
이어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이중창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를 선사했다. 여기서 홍 연출의 감각적 스킬이 돋보였다. 파리 뒷골목의 초라한 다락방에서 만났지만, 서로 마음이 끌리는 상태를 확인하며 부르는 듀엣송이 펼쳐지는 동안 가림막 세트는 스크린이 되어 나비가 날고 꽃이 피었다. 자신이 쓴 희곡 작품의 원고로 난로의 불을 지펴야 하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남을 담아낸 것.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야 할 처지지만, 사랑마저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로미 커플’의 노래 속에 흐르는 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센스가 빛났다.
비록 팍팍한 생활이지만 젊은 예술가 네 명에게도 즐거운 시간이 찾아왔다. 2막 모무스 카페에서의 행복한 순간이 그렇다. 시인 로돌포(테너 이현재), 화가 마르첼로(바리톤 최은석), 음악가 쇼나르(바리톤 오세원), 철학자 콜리네(베이스 양석진)는 미미(소프라노 최윤정)와 함께 흥겨운 파티를 즐긴다. 마르첼로의 옛 연인 무제타(소프라노 김연수)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Quando men vo(나 홀로 길을 걸을 때면)’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팜프파탈의 매력을 뽐냈다. ‘무제타의 왈츠’는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의 애간장을 녹였다.
3막은 슬픔과 아픔이 가득했다. 미미는 허름한 술집의 방 하나를 얻어 무제타와 살고 있는 마르첼로를 찾아온다. 얼굴이 창백하고 기침을 자주 하는 미미는 “로돌포의 질투가 심하고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정말 힘들다”며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미미는 로돌포와 마르첼로의 대화를 몰래 듣게 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그래 나는 진정 미미를 사랑해. 세상 무엇보다 그를 사랑해. 미미는 병들었네.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어. 내 방은 비참하고 황량해. 불도 못 피우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몰아쳐. 내 비참한 운명이 그를 죽이고 있어. 미미는 연약한 꽃 같아. 가난이 그를 시들게 하고 있어. 그를 다시 피어나게 하려면 사랑만으로는 부족해.”
미미는 로돌포가 왜 자기를 그토록 밀어내려 했는지 알게 된다. 가난이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미미를 떠나게 만들어야 했다. 절규를 지켜보던 미미는 고별의 노래인 ‘Addio...Donde Lieta Usci(안녕히...나 이제 돌아가렵니다)’를 토해낸다. 애끓는 심정이 절절하다.
“사랑으로 가득하고 즐거웠던 당신과의 시간에 이제 작별을 고해요. 저는 예전의 작고 쓸쓸한 제 보금자리로 돌아갈게요. 다시 향기 없는 꽃을 수놓을 겁니다. 안녕히...슬퍼하지 말아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우리의 방에 돌려받고 싶은 물건이 몇 개 있어요. 서랍 속에는 금팔찌와 기도책이 있어요. 모두 함께 정리해 두시면 사람을 보낼게요. 베개 아래 장밋빛 모자가 있어요. 원한다면 사랑의 징표로 간직해 주세요. 안녕히...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그리고는 미미, 로돌포, 무제타, 마르첼로의 사중창 ‘정말 이별인가요(Dunque E Proprio Finita)’가 이어졌다.
“이제 정말로 끝나는 건가. 당신이...내 사랑이 떠나가고 있네. 안녕히...사랑의 꿈들이여. 안녕히...함께 달콤하게 깨어나던 아침이여. 겨울에 혼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일. 하지만 봄에는 태양이 우리와 함께 하네. 누구도 4월에는 혼자가 아니에요. 봄이 피어나면 태양이 우리와 함께 한다네. 샘물들은 소리 내어 흐르고 저녁의 산들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네. 우리 봄이 올 때까지만 함께 있을까. 난 언제나 당신의 것이야. 꽃 피는 계절이 오면 우리는 헤어질 거야. 이 겨울이 영원했으면. 꽃 피는 계절이 오면 우리는 헤어질 거야.”
‘로미 커플’은 헤어짐으로 가슴이 찢어지는데, ‘마무 커플’은 그 옆에서 “왜 남자들에게 웃음을 흘리냐” “왜 이렇게 사사건건 간섭이냐”라며 티격태격 다툰다. 눈물 콧물 빼는 슬픈 멜로와 웃음폭탄 코미디가 한 무대에서 펼쳐진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상황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아이러니라니! 이런 부조화가 오히려 노래를 더욱 애절하게 만들었다.
두 주인공은 꽃 피는 계절이 오면 헤어진다고 했지만, 역시 스크린을 가득 채운 나비와 꽃 덕분에 이들의 이별은 어쩌며 이별이 아닐 것이라는 실낱희망을 품게 한다.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아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으니, 관객의 마음은 봄이다.
4막 초반부 로돌포와 마르첼로의 이중창 ‘미미는 돌아오지 않네(O Mimi Tu Piu Non Torni)’는 남성 듀엣송으로는 드물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줬다. 콜리네가 미미의 병원비와 약값에 보태려 자신의 외투를 팔면서 부르는 ‘들어라, 누더기 옷이여(Vecchia Zimarra, Senti)’에서는 비록 가난에 지쳐가는 청춘들이지만 친구를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놓은 찐우정에 뭉클했다. 미미는 ‘라보엠’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선율이 반복되어 흐르는 ‘모두 떠났나요(Sono Andanti)’를 부른 뒤 조용히 숨을 거둔다. “미미~”를 외치며 새드엔딩이 최고조를 찍은 순간에도 스크린에는 나비가 날고 꽃이 피었다.
홍 연출은 겨울 분위기를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각 막이 오르기 전에 차가운 바람 소리를 효과음으로 사용했다. 또한 막이 오르면 알림맨 역할을 하는 배우가 살짝 등장해 눈가루를 날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등 세밀한 연출이 빛났다. 특히 4막에서는 알림맨이 처음에 등장하지 않고 미미가 숨을 거둔 뒤에 나왔다. 이때 스크린에는 봄햇살이 바람처럼 흩날리는 풍경이 나왔고, 알림맨은 그 풍경을 가리켰다. 악으로 깡으로 힘든 시대를 견디어 내는 청춘들의 내일은 분명 화사한 봄빛이 가득할 것이라는 응원가다.
베이스 금교동은 1막에서 집주인 베누아를, 2막에서는 돈 많은 정부 고관 알친도르 를 맡아 4총사에게 삥을 뜯기는 코믹 연기를 소화했다. 삐삐놀 역의 테너 김병현은 2막에서 살짝 마술쇼까지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위너오페라합창단과 브랄란테어린이합창단도 멋진 무대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백브리핑> 관악아트홀 첫 오페라 공연 감동으로 물들다
라벨라오페라단의 ‘라보엠’ 무대는 관악아트홀 첫 오페라 공연이었다. 관객의 호평은 기대 이상이었다. 관악문화재단에 따르면 관객의 97.8%가 ‘공연이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다’고 답했으며, 96.6%가 ‘이번 공연의 예술성 또는 작품성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관악문화재단과 라벨라 오페라단의 기획이 통했다. ‘라보엠’의 배경은 19세기 프랑스 파리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젊은 예술가들의 순수한 사랑이야기는 관악구의 현실과 닮았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청년인구비율(42%)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신진등록예술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관악구이기 때문에 사랑과 낭만에 대한 공감이 높은 만족도로 이어졌다.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는 “이번 오페라 ‘라보엠’을 통해 정통 오페라에 대한 관악구 주민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주민의 클래식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앞으로도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유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관악문화재단과 라벨라오페라단이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4 순수예술을 통한 전국 공연장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