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지난해 5월, 피아니스트 한지민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이날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재미작곡가 박희정에게 직접 곡을 위촉한 ‘The Little Blue Bird Dance Suite(꼬마 파랑새 춤 모음곡)’. 세계 초연이었다.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우리민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모티브로 해 만들었다. 피아노와 타악기가 호흡을 맞추는 듀엣곡이다.
박희정은 프로그램북에 이렇게 적었다.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을 담았다.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거시적 규모든, 아니면 학교나 가정에서의 미시적 규모든, 폭력은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 이 곡은 아직 세상의 위험을 모르는 순진한 꼬마 파랑새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모습을 통해 폭력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파랑새 민요’ 주제에 의한 일종의 변주곡이다. 각 장면에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꼬마새의 날갯짓과 불길한 운명의 대립이 펼쳐진다.”
한지민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의 손끝을 타고 새벽녘 어두운 숲에 남겨진 어미 잃은 파랑새가 날아올랐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기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총총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미를 찾는다. 그 모습 뒤로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사냥꾼이 보인다.
꼬마새가 빠른 걸음과 비행으로 도망치는 추격전이 장난스럽다. 사냥꾼을 피해 숨지만 큰 위험인지 모르고 숨바꼭질을 즐기는 듯하다. 멀리 날아가 혼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노는 모습을 재미있는 왈츠로 표현했다. 곧 닥칠 비극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꼬마새와 사냥꾼이 다시 조우한다. 불길한 분위기가 가득한 가운데 꼬마새가 예쁜 꽃 앞에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사냥꾼의 총에 맞는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멀지 않은 나무 가지 위로 날아간 새는 어미를 그리워하며 힘들어 하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죽음의 음악이 음산한 가운데 절규하는 울음이 가슴 아프다. 마지막 날갯짓 후 꼬마새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피아노 연주 중간 중간 타악기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심지어 악보까지 펄럭펄럭 흔들어 날갯짓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입체적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았다.
선천적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유명한 젊은 피아니스트 한지민이 미국 관객들에게도 ‘The Little Blue Bird Dance Suite’를 선보인다. 이번엔 타악기는 빠지고 피아노 솔로곡으로 선사한다. 장소도 의미가 있다. 세계 최고의 공연장으로 불리는 뉴욕의 카네기홀 젠켈홀이다. 오는 11월 24일(일) 오후 7시 30분이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년예술가 도약지원’ 사업에 선정돼 열리게 됐다. 한지민이 피아니스트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카네기홀 데뷔 무대는 ‘피아노 솔로곡을 위한 한국과 미국의 위대한 현대 작곡가들(The Great Contemporary Composers of Korean and United States for Piano Solo)’이라고 공연타이틀을 달았다. 제목에 걸맞게 한국과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곡으로만 구성했다.
박희정의 곡뿐만 아니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작곡가,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한 진은숙의 ‘Completed Piano Etudes(피아노 연습곡)’ 6곡 전곡을 연주한다. 김범기의 ‘The Wave for Piano Solo(피아노 솔로를 위한 물결)’도 들려준다.
사무엘 바버의 ‘Ballade Op.46(발라드)’과 ‘Nocturne Op.33(녹턴)’에 이어 아론 커니스의 ‘Lullaby(자장가)’, 폴 쇤필드의 ‘Peccadilloes(페카딜로에스)’를 연주한다.
한지민은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졸업 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8년 미국 하트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Artistic Diploma)을 마치고, 2019년에는 연주학 박사(Doctor of Musical Arts)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활동하며 더컬쳐앤 음악감독, 선화예중·고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국내외 콩쿠르에서 우승 및 입상 경력을 쌓아온 한지민은 박사과정 중 학교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인 것은 물론 학교가 위치한 코네티컷주의 여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2019년 파라노프 협주곡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미국 코네티컷 링컨 씨어터에서 사무엘 바버 피아노 협주곡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귀국 후 2022년에는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세종체임버홀, 금호아트홀에서 독주회 및 실내악 연주를 했다.
2023년에는 중국 항저우 현대음악 페스티벌에 초청돼 진은숙의 ‘피아노 에튀드 전곡’을 포함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중국 구이양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고, 2024년에는 삼성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등 최근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9월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독주회를 가진 뒤, 11월에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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