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갈림길에서 쓴 ‘톨스토이의 가출’...이정식 작가 열두번째 저서 출간

집 뛰쳐나가 열흘 후 숨진 82세 톨스토이
문학에세이 형식으로 대문호 생애 입체분석
저자의 암투병기 다룬 9쪽 분량 ‘후기’ 울컥

민은기 기자 승인 2024.10.04 16:44 | 최종 수정 2024.10.05 08:52 의견 0
이정식 작가가 열두번째 저서 ‘톨스토이의 가출’을 출간했다. 표지 사진은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식 작가. ⓒ황금물고기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대작을 쓴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8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출을 감행했다. 부인 소피야와의 오랜 불화 끝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결국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독’이 됐다. 톨스토이는 소피야를 ‘자신의 목에 매달린 맷돌’이라고 적을 정도로 관계가 안좋았다.

톨스토이는 집을 뛰쳐나온 지 열흘 만에 모스크바 남쪽의 조그만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차 여행에서 걸린 폐렴이 결정타였다.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소피야가 아스타포보로 남편을 찾아 왔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흥분할 것을 우려한 측근과 막내딸 사샤가 접근을 막았다.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소피야가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는 빛바랜 사진이 남아있다. 48년을 함께 산 부부는 끝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이별을 했다.

토스토이는 요즘 말로 ‘금수저’였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글재주와 건강도 타고났다.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았다. 내면의 사람됨도 훌륭했다. 평생 인간에 대해 고민했다.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려고 애썼으며 약자에 대한 연민도 놓지 않았다. 이쯤이면 ‘다이아수저’ 급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실패했다.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으나 행복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행복의 조건으로 건강, 재력,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것 등을 이야기 하지만, 톨스토이의 사례를 통해 본다면 부부간의 사랑이 다른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이정식이 ‘톨스토이의 가출’(황금물고기·2만원)을 출간했다.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톨스토이의 흔적을 찾아 러시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톨스토이가 태어난 야스나야 폴라냐 영지는 물론, 그가 숨을 거둔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도 찾아갔다. 관사는 현재 톨스토이 박물관이 됐고, 지역의 이름도 아스타포보에서 레프 톨스토이로 바뀌었다. 아스타포보역의 시계는 항상 아침 6시5분에 맞춰져있다. 톨스토이가 숨진 시각이다. 대문호를 추억하고 기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톨스토이 부부의 불화의 원인은 재산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 있었다. 톨스토이는 50대에 들어서면서, 재산은 죄이므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피야는 “그러면 처자식과 손주들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며 맞섰다. 가진 것을 모두 나눠 주자는 남편의 높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소피야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 물어보면 대부분은 소피야의 처지를 동정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남편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아내의 판정승이다.

부부갈등을 부추긴 인물도 있었다.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1854~1936)라는 톨스토이 추종자다. 그는 근위장교 출신의 젊은 귀족으로, 톨스토이보다 26세가 적으니 아들뻘이었다. 체르트코프는 톨스토이 사후 유일한 원고관리자가 되기를 원했고, 나중에 취소됐지만 실제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비밀유언장을 받아내기도 했다. 영민한 톨스토이가 어떻게 별다른 재능도 없는 체르트코프에게 휘둘렸는지 모르겠지만, 요즘말로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모두 4부로 구성됐다. 작가 스스로 문학 에세이라고 정의한 이 책은 편하게 읽힌다. 카프카스에서 시작된 톨스토이 문학, 톨스토이를 ‘전쟁과 평화’로 이끈 데카브리스트, 아내를 죽이는 ‘크로이체르 소나타’, 톨스토이 소설의 삽화를 그린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 톨스토이의 인생과 작품에 끼친 루소의 영향 등 재미있는 스토리가 가득하다.

특히 파스테르나크, 루소, 위고, 솔제니친은 모두 톨스토이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거나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는 소년 시절에 십자가 대신에 루소의 초상이 들어 있는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그만큼 루소의 톨스토이에 대한 영향은 지대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 드러난 루소의 사상, 그리고 루소의 모순에 가득 찬 생애에 대해서도 현대의 시각으로 흥미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정식 작가는 이번이 12번째 저서다. 그는 40여 년을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CBS·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 워싱턴 특파원·정치부장·사장과 CBS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 한국방송협회 부회장·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기자 시절부터 틈틈이 책을 냈다. 언제부터인가 러시아 문학에 빠져들었다. ‘시베리아 문학기행’으로 러시아 문학을 탐구한 그는 도스토옙스키에 포커싱을 맞춘 ‘러시아 문학기행 1, 2’ 등을 펴냈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모두 348쪽이다. 제법 두툼하다. 직접 촬영한 현장 사진과 자료 사진도 잘 배치돼 있어 단숨에 독파할 수 있다. 그중 책 말미 339쪽에서 348쪽까지 이정식 작가의 후기가 실려 있다. 그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대장암은 어느새 간암과 폐암으로 번졌고, 다시 담도암으로 전이됐다. 이번 열두 번째 책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울컥한다.

<의사가 “더 이상 항암 치료를 계속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오다니. 그러면 나의 생명은 얼마나 남은 것인가. 의사가 치료 포기 선언을 하면 환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난 4년 이상 지니고 있었던 희망의 불꽃이 한 순간 꺼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책으로 내려고 써 놓은 원고도 잔뜩 있는데... “원 세상에! 인생 마감시간에 쫓기다니...” 간호사가 호스피스 상담실에 들렀다 가란다. 호스피스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평생 처음으로 동네 헬스장에 등록하고 다음날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트레이너로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며 가장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으나 그것도 조금 하면 힘이 들어 쉬엄쉬엄했다. 중단했던 맨발걷기를 다시 시작했다. 항암주사 후유증으로 발바닥과 뒤축이 이리저리 너무 갈라져 하다말다 할 수 밖에 없었다. 항암주사 안 맞으니 발바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근력운동과 더불어 맨발걷기도 매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생 처음 종일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있다. 12시간 지속되는 진통제를 12시간 간격으로 계속 먹어도 통증이 중간 중간 찾아온다. 어떤 때는 한참 머문다. 통증이 오면 모든 것이 올 스톱이다. 통증이 오는 순간은 몸에 힘을 줄 수 없으므로 신체가 순식간에 오그라드는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모두가 기적을 기대한다. 나는 암 발생 이후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톨릭 의과 대학에 시신을 기증하신 어머니의 뜻을 따라, 3년 전 어머니의 유골을 받아 오던 날 나의 시신 기증을 의과대학측에 약속했다. 나의 육신은 사후에 의대생들의 공부를 위한 해부학 교실에 올려질 터이니 그것도 살면서 세상에서 받은 어러 혜택과 빛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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