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이별의 왈츠 흐르자 “마리아 조앙 피레스! 이게 마지막 아니죠”

80세 거장 피아노 소리에 “다시 와줘요” 한마음 기도
​​​​​​​시적표현 넘친 쇼팽·순수함 가득한 모차르트 뚜렷 비교

함혜리 객원기자 승인 2024.10.04 18:18 의견 0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S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클래식비즈 함혜리 객원기자] 좀처럼 물러설 줄 모르는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듯 세찬 비가 내리던 지난 20일 저녁.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가진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는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의 한 페이지를 선사했다.

1944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5세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 피레스는 자그마한 체구에 작은 손을 지녔지만 자신만의 스타일과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쇼팽, 드뷔시, 모차르트 전문가로 명성을 굳혔다. 올해 80세지만 나이가 무색할 만큼 완벽한 연주력으로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는 ‘클래식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나이를 감안할 때 또 다시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만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과 기대를 품고 공연장을 찾은 팬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주시간이 되어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의 조명이 피아노(파지올리 F278)를 비추면서 묘한 긴장감이 도는 순간, 피레스가 걸어 나왔다. 짧은 머리에 부드러운 자연 소재의 짙은 올리브색 니트와 같은 컬러의 천연 린넨 롱 스커트 차림의 그가 등장하자 관객들이 환호하며 ‘작은 거장’의 등장을 반겼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S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트레이드 마크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피레스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건반에 손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쇼팽의 녹턴(야상곡) Op.9의 1번이 흘러나왔다.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여유 있으면서 명쾌한 터치로 지어내는 피아노 소리는 순식간에 홀을 가득 채워주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고 따뜻한 음색이었다.

2년만의 내한공연에서 피레스는 그가 가장 즐기고 자신 있어 하며 팬들의 갈채를 받는 프로그램으로 채웠다. 쇼팽의 초기작에 속하는 녹턴 작품번호 9번의 세 곡은 작곡가의 순수한 판타지와 상상력이 솔직하게 녹아있으며, 작품번호 27의 두 곡은 어둠과 밝음을 표현하며 심오한 피아니즘을 추구한다.

유작으로 남은 작품번호 72-1번 e단조 녹턴은 사색적이면서 슬픈 곡이다. 피레스는 특유의 맑고 담백한 음색과 감성으로 피아노의 시인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의 정수를 건드리는 시적인 표현으로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비 내리는 초가을 밤에 딱 어울리는 피레스의 연주는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S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레스는 쇼팽의 녹턴 6곡을 묶어서 연주한 뒤 잠시 퇴장했다 들어와 모차르트의 소나타 10번 C장조(K.330)과 13번 B플랫장조(K.333)을 이어 연주했다. 똑같은 연주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쇼팽 녹턴에서는 시적인 표현과 우아함이 돋보였던 반면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활달하고 순수하게 연주했다.

수많은 피아니스트 가운데서 피레스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서 단연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연주를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투명한 톤 컬러 속에서 무지개빛 다채로움이 공존하는 마법 같은 표정변화, 세공된 다이내믹이 암시하는 작곡가의 감성 속 명암의 흥미로운 표출은 피레스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포인트다.’(김주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리는 평가가 실감됐다.

모차르트 소나타 10번은 가볍고 귀족적인 갈랑 양식의 대표적인 곡으로 그 안에 담긴 명랑한 기분과 민감한 뉘앙스들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사랑스러운 곡이다. 피레스의 손은 젊은 날의 에너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활기차게 건반을 두드리며 영롱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피레스는 모차르트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곡이 지닌 감성을 제대로 표현해냈다.

모차르트 소나타 13번은 대규모이면서 협주곡을 연상시키는 스케일로 청각적 포만감을 선사하는 곡이다. 라틴계의 활달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의 본성이 손가락 끝에서 요동치듯 깨끗하고 투명하면서도 거침없이 곡을 마무리했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S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쇼팽의 녹턴도 엑설런트 했지만 변화무쌍한 감정 표현을 버무린 명확한 타건으로 이어진 모차르트 연주가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공간에 압도되지 않고 연주곡을 통해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연주에는 연륜,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간미가 녹아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은 이럴 때 쓰는 단어일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다운 완벽한 연주였다.

피레스는 앙코르 곡으로 쇼팽의 왈츠 두 곡을 들려주었다. 첫번째 곡은 ‘이별’이라는 부제가 달린 왈츠 9번 Op.69-1으로 쓸쓸함이 진하게 다가오는 곡이었다. 계속된 커튼콜에 피레스는 왈츠 7번 Op.64-2를 연주했다. 빠르지만 선명하게, 그리고 강한 인상을 남기는 연주였다. 곡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80대에도 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피레스의 연주를 보면서 그의 내한 공연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리란 기대를 자연스럽게 품게 된 것은 비단 나뿐 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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