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조용주 변호사는 30여년을 법조인으로 살고 있다. 사법 연수원생 시절에도, 법무관으로 일할 때도, 판사로 근무할 때도, 또 지금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책 몇 권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틈만 나면 시간불문·장소불문 읽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루틴이다. 그렇게 매년 100권 쯤 읽는다. 사흘 반나절 만에 한권씩 독파하는 셈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꼬박꼬박 독후감도 15년째 쓰고 있다.
그가 이렇게 책에 진심인 이유는 누구나 그렇지만 법조인도 독서로 세상을 통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한 법조인에게 책만큼 큰 가르침을 주는 스승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기 주문을 외운다. “나는 앞으로도 올바르게 걷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올바르게 제안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그에게는 사람의 됨됨이를 만드는 최고의 비결은 독서다.
조용주 변호사는 동네 헌책방의 쿰쿰한 공기에 파묻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그가 살았던 인천 구도심은 책 읽는 아이들보다 어렵게 살아가는 부모를 돕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책이 좋았다. 배다리(작은 배가 다닌다는 의미로 붙여진 동인천의 지명. 70년대에는 헌 책방이 40여곳 있었다)의 헌책방에 종일 서서 책을 보곤 했다. 책은 그의 자양분이었고, 친구였고, 어른이었다.
법대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전공과는 동떨어진, 일명 대학생 필독서를 ‘독식(讀食)’하는 책벌레였다. 그는 요즘말로 가방끈이 길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과 연세대학교 경영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도시 공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사법 연수원생, 법무관 시절을 거쳐 판사가 됐다.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지금까지 쌓아온 자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왔다. 변호사로 변신했다. 서울과 인천에 법무법인 안다를 설립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우수 변호사로 선정된 바 있으며 사단법인 착한법만드는사람들의 사무총장으로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법을 제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조용주 변호사가 책을 출간했다. ‘책 속을 걷는 변호사’(궁편책·224쪽·2만2000원)다.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책 읽어 주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사실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읽다 보니 함께 읽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무시로 책 속을 걷는 저자는 이 시대를 다 함께 걸어 나가는 독자들에게 그가 지나온 길목마다 발견한 ‘독식’의 묘미를 나누고자 한다. 오늘을 만든 변화들, 또 내일을 그리는 변화를 담은 책 58권을 주제별로 나누어 소개한다. ‘한국사’ ‘세계사’ ‘인류사’ ‘환경’ ‘인간’ ‘사회’로 큰 분류를 한 다음, 그가 읽은 책들에서 느낀 감동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삶의 지혜가 가득하다.
시식하듯 이 책을 읽어 보고, 감칠맛을 느껴 한 권씩 찾아 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리라. 그는 ‘내 안의 물고기’(닐 슈빈), ‘나무의 죽음’(차윤정), ‘아픈 몸을 살다’(아서 프랭크)를 읽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칼 세이건이 “별을 들여다보는 것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별빛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져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도 별을 보는 것과 같다. 인체는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인간의 몸속에는 지구 역사의 결정적 흔적들, 고대의 바다나 숲에서 벌어진 사건들, 대기에 생긴 변화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세포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협동하여 몸을 형성해 나갔는지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 고대 숲과 평원을 무대로 한 삶이 인간의 눈과 코를 만들었고, 고대 강의 환경이 팔다리의 기본 구조를 만들었다. (중략) 우리는 개조된 물고기다. 물고기의 몸에 포유류의 옷을 입은 뒤 미세한 조정을 거쳐 진화한 존재다. 오늘날 인간이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몸에 고스란히 남은 그 역사와 다르게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지만 지구의 다양한 변화 가운데서 우연히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을 내 안의 물고기가 일깨워 준다.>
-107~108쪽 ‘인간은 결국 개조된 어류일 뿐이다’ 중에서
<참 멋진 책이다. 인간의 죽음만 생각하며 살아온 내게 나무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 죽음이 얼마나 신비한 현상인지 가르쳐 주었으니. 숲속을 걸을 때면 죽은 나무가 쓰러져 부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생명이 다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무의 죽음은 숲을 살리고 수많은 존재들이 그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까, 꼭 필요하면서도 유익한 죽음이다. (중략) 이 책을 읽은 후로 숲에서 마주치는 죽은 나무들에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사람도 매 순간 각 부분의 세포들이 죽고 새로 생겨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나무처럼 몸속에 죽음을 품고 사는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죽음도 지구 생태계 안에서 다른 누군가의 몸이 되거나, 어느 나무의 조직이 되거나, 곤충의 날개가 되는 과정에 재사용될 뿐이다. 우리는 나무의 죽음 앞에서 자연의 순환이라는 더 큰 차원에 눈을 뜰 필요가 있다. 소멸하여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났다고 영원한 것도 아니니 다만 겸허히 살다 가는 게 최선이리라.>
-132~134쪽 ‘죽음과 생명을 한 몸에 품고 사는 나무 이야기’ 중에서
<푸른 하늘과 빛나는 물결을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 일인지, 아프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가치를 질병이 일깨워 준 것이다. 그렇다. 절대적으로 해롭기만 한 것은 없다. 질병조차. 어쩌면 우연으로 이 세상에 오게 된 우리의 삶은 부서지기 쉬운 한 조각 행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삶은 그 순간마저 특별한 가치로 존재한다.>
-170~171쪽 ‘병으로부터 깨달은 삶의 가치’ 중에서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책의 분야를 나누어 놓은 팻말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이 팻말들은 때때로 책의 구역뿐 아니라 사람의 시선이 닿는 구역까지도 본의 아니게 선을 긋는다. 저자가 소개하는 58권은 그 선 너머에서 스르륵 스쳐 지나간 것일 수도 있음을 고백한다. 왠지 모를 거리감에, 혹은 어쩐지 앞서는 부담감에 말이다.
먼저 읽어 본 저자도 이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선뜻 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생을 열렬한 독서가로 살아온 저자가 책을 읽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읽고 싶어서, 그리고 읽어야 함을 알아서. 운전할 때 사각지대를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듯이 읽는 것도 그러하다. 잘 보이지 않거나 딱히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니까. 저자는 역사, 사회, 환경, 그리고 인간의 변화를 살피고 사유하는 책들을 조명함으로써 독서의 사각지대, 나아가 우리 삶의 사각지대를 비춘다.
무엇이든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믿는 저자는 책 속을 거닐며 갈피를 잡곤 한다.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어디론가 계속 걸어 나가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길 위에 선 순례자들이다. 이따금 넘어지고 헤매다 주저앉을지라도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는 이들에게 이 책이 한 줄, 한 장의 쉼이자 길잡이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