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처음엔 웃었다. 부유한 보석상인으로부터 아름다운 귀금속을 선물 받으니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날 듯이 기뻤다. 그러나 금세 감정이 다운되며 울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반짝이는 보석을 통해서만 위안을 받는 처지가 슬프다. 자괴감이 밀려온다. 무대 위 소프라노는 노래를 통해, 또한 표정과 몸짓을 곁들여 이런 미묘한 심정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웃다 우는, 울다 웃는 여주인공 퀘네공드로 ‘완전 빙의’했다.
김성혜가 ‘극한직업 소프라노’의 세계를 보여주며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한국 데뷔 15주년 리사이틀에서 프로그램 마지막 곡으로 ‘Glitter and be gay(화사하고 명랑하게)’를 불렀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캔디드>에 나오는 퀘네공드의 아리아다. 감정변화의 기복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다니! 이 곡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충분히 입증했다.
김성혜의 변신은 놀라웠다. 콘스탄체로 시작해 줄리에타, 루치아, 엘비라를 거쳐 퀘네공드로 마무리하는 2시간 30분의 독창회는 ‘역대급’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다양한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캐릭터를 바꿔가며 엑설런트 무대를 뽐냈다.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변검’처럼, 빈틈하나 없이 100% 미션 클리어했다.
이날 공연의 타이틀은 ‘라 보체(La Voce)’. 독창회에 앞서 김성혜는 “제가 성악가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분발하라며 격려해준 사람이 여러분이었고, 어느 정도 완성된 가수로 활동했을 때 늘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넨 이도 여러분이었다”라며 “결국 저의 목소리를 만든 건 여러분의 목소리였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홀로 빡쎄게 연습’해서 성취한 줄 알았지만, 지금은 모든 성과물이 ‘여러분의 사랑’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는 고백이다. 그런 고마움을 담아 이탈리아어로 ‘목소리’를 뜻하는 라보체로 제목을 달았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김성혜가 지휘자 김광현과 함께 들어왔다. 1부의 첫 곡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크레도’ 중 ‘Et incarnatus est(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고)’. 아내 콘스탄체와의 결혼식을 셀프축하하기 위해 만든 미사곡에 들어있는 소프라노 독창곡이다.
생명의 탄생과 신비를 예찬하는 노래는 찌든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줬다. 싸늘함을 포근함으로 바꿔주는 부드러운 담요 같았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잠시의 멈춤 뒤에 오보에, 플루트, 바순과 어우러져 “아~ 아~ 아~” 맑고 섬세한 목소리가 흘렀다.
결혼에 반대한 아버지(레오폴트 모차르트)와 누나(마리아 안나 모차르트·‘난네를’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까지 찾아가 초연했다. ‘며느리 콘스탄체’가 소프라노 솔로까지 맡았지만, 끝내 냉랭해진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콘스탄체 대신에 지금처럼 김성혜가 불렀다면 갈등과 오해를 풀고 가족의 화합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지휘자 김광현과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서곡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튀르키예 스타일이 가득한 곡이다. 당시 오페라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심벌즈, 트라이앵글, 피콜로 등의 악기를 서곡에 등장시켜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높였다. 오케스트라의 촘촘하고 견고한 사운드는 F1급 스피드와 세단급 승차감이 혼용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어 김성혜는 이 오페라 속 아리아 ‘Ach, ich liebte(아, 나는 사랑했었네)’를 들려줬다. 주인공 콘스탄체가 튀르키예의 고위관리인 젤림의 구애를 거부하며 “제 사랑은 오직 벨몬테뿐입니다”라고 일편단심을 드러내는 엔드리스 러브송이다.
빈첸조 벨리니의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는 ‘이탈리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도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해 카풀레티가의 줄리에타와 몬테키가의 로메오로 적었다.
내일이 결혼식이다. 김성혜는 거울에 비친, 혼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줄리에타가 됐다. 로메오를 사랑하지만 가문의 뿌리 깊은 원한 때문에 사랑을 드러낼 수 없다. 왈칵 밀려오는 슬픔을 담아 ‘Eccomi in lieta vesta...Oh! quante volte(행복의 옷을 입고 있어요...아, 몇 번이던가)’를 토해냈다. 살짝살짝 좌우로 몸을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보거나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필링을 극대화하는 스킬이 빛났다. 하프·호른과 케미를 맞춘 목소리는 정교한 감성이 반짝였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오페라를 하나 꼽으라면 가에카노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맨 앞쪽에 위치한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A부터 Z까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김성혜도 늘 주인공 루치아 배역을 탐낸다. 그래서였을까. 1막에 나오는 네 곡을 잇달아 연주해 정식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무대를 선물했다.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1막 전주곡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 금관악기를 대거 보강했다. 비극의 탄생을 예고하듯 팀파니에서 출발한 사운드는 호른과 트럼본이 음침하고 어두운 소리로 뒤를 이었다. 세 번의 강한 심벌즈가 가슴을 때렸다. 귀를 찢는 금속성 소리 또한 아프게 몰려왔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가여운 루치아가 아른거리는 서곡다.
빨간색 수트 상의를 입은 바리톤 김동섭이 나왔다. 루치아의 오빠 엔리코 역할이다. 엔리코는 루치아의 가정교사 겸 성직자인 라이몬드에게 “루치아가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울면서 거절했다”라며 버럭 화를 낸다. 루치아의 처지를 알고 있는 라이몬드는 “루치아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 것이다”라며 변명을 해준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엔리코의 부하는 “루치아는 대대로 원수 집안인 에드가르도와 비슷한 사람과 비밀리에 만난다”고 폭로한다.
이 말을 들은 엔리코는 ‘뚜껑’이 열린다. ‘Cruda, funesta smania(잔혹하고, 비통한 이 괴로움)’을 부르며 격분한다. 오빠에게 마냥 비난을 퍼부을 수도 없다. 갈수록 쇠락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가장의 삶의 무게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노래를 마친 김동섭이 오른쪽 문으로 퇴장함과 동시에 왼쪽 문에서 파란 드레스를 입은 김성혜가 등장했다. 성 안의 조그만 공원이다. 달이 밝은 밤이다. 루치아는 시녀 알리사와 함께 에드가르도를 기다린다. 두 사람의 비밀 연애를 알고 있는 알리사는 그 사랑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사랑에 취한 루치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루치아는 분수를 바라보며, 예전에 한 시녀가 성주를 연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저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데 그 여인의 흔드는 손이 보인다면서 ‘Regnava nel silenzio(깊은 침묵은 밤을 덮고)’를 불렀다. 분위기는 으스스하지만 하프와 플루트 소리에 맞춰 흐르는 노래는 황홀하다. 소프라노들의 사랑을 받는 <람메르무어 루치아>의 시그니처 아리아 중 하나다.
노래를 마친 김성혜가 무대에 그대로 서있고, 왼쪽 문에서 김동섭이 편지를 들고 나왔다. 단조로운 리사이틀 구성에 ‘편지 퍼포먼스’를 가미해 살짝 변화를 준 것. 엔리코는 루치아를 설득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프랑스로 간 에드가르도가 마치 루치아에게 보낸 것처럼 “헤어지자”는 내용으로 편지를 위조한 것. 루치아는 편지를 받고는 ‘Soffri va nel pianto(눈물로 고통 받고)’하면서 비통한 소리로 쓰러져 운다.
이 틈을 타 엔리코는 루치아를 밀어 붙인다. 궁정의 세력가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거절한다면 나의 정치적 생명을 잃으며, 사형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도 루치아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남매의 갈등이 고조된다. 그런데 음악은 아름답다. 그래서 더 비극적인 이중창이다.
2부의 시작은 특별 게스트가 열었다. 발달장애 청년 음악가들로 구성된 ‘파라솔 클라리넷 앙상블’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파라솔에서 이름을 땄다. 지난해 열린 제7회 전국 발달장애인 음악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연주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들은 ‘섬집아기’(한인현 시·이흥렬 곡)를 연주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비록 가사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을 속으로 모두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를 따라 불렀으리라. ‘다 못 찬’ 굴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11명의 단원들이 펼쳐내는 하모니는 뭉클했다.
다시 흰색 드레스를 입은 김성혜가 나왔다. 한국가곡을 두 곡 선사했다. 그리움을 상징하는 대표곡 ‘얼굴’은 음악교사 신귀복과 생물교사 심봉석이 새 학기 중학교 교무회의시간에 교장 선생님 말씀이 길어지자 딴 짓을 하며 5분 만에 완성했다는 ‘전설의 가곡’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을 생각나게 해주는 마법의 노래다.
이어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를 불렀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김효근 작곡가(그의 본업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다)의 아트팝 장르에 속하는 곡이다.권정은이 출간한 그림 에세이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곡가는 직접 가사까지 지었다. 피아노까지 가미해 풍성한 선율을 더했다. 마지막 고음처리에서는 찌릿 전율이 엄습했다. 팍팍한 세상살이를 견디게 해주는 순수한 동심이 저절로 생겼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은 뒤 같은 제목으로 오페라를 작곡한다. ‘폴로네즈(Polonaise)’는 3막에서 주인공 오네긴이 3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도회장에 나타나는 장면에서 나온다.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트럼펫의 흥겨운 팡파르를 신호탄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3박자의 짧은 리듬동기가 특징인 폴란드의 민속춤곡은 콘서트장을 환하게 만들었다.
김성혜는 흰색 드레스에 깃털로 멋을 냈다. 레오 들리브의 가곡 ‘카디스의 처녀들(Les filles de Cadix)’에 딱 들어맞는 의상이다. 캐스터네츠와 탬버린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속사포 랩을 연상시키는 소프라노의 빠른 속도감이 흥겹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카디스 지방의 뜨거운 햇볕이 이글거렸다. 김성혜는 집시 처녀였다. 열정적인 춤과 노래로 객석을 후끈 달궜다.
검정 수트를 입은 김동섭은 ‘마부 알피오’가 되어 돌아왔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나오는 ‘Il Cavallo Scalpita(말은 힘차게 달려)’를 불렀다. 아내 롤라가 옛 연인 투리두와 밀회를 즐긴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마차를 몰고 나타나 사랑스러운 아내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일한다며 룰루랄라 노래했다. 죽음을 몰고 오는 시칠리아 섬의 치명적 사랑이 달려오고 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생각하니 숙연하다.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페도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2막에서 로리스가 페도라의 매력에 사로잡혀 정열적인 사랑의 고백을 쏟아내는 ‘Amore ti vieta(금지된 사랑)’다. 2분이 채 안되는 짧은 곡이지만 관객 마음을 단박에 빼앗는다. 밀라노에서 조르다노의 지휘로 초연했을 때 남자 주인공은 25세의 젊은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다. 그가 ‘Amore ti vieta’를 부르자 박수와 환호가 멈추지 않았다. 앙코르 요청을 받아들여 한 번 더 노래했고 카루소의 명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임택트 있는 곡인데 러닝타임이 짧아 속상했을까. 조르다노는 이 노래를 활용해 간주곡을 만들어 작품 속에 넣었다. 똑같은 곡을 두 번 듣게 만든 셈이다. 코리아쿱의 연주는 한번 뿐이었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지휘자 김광현은 스마일맨이다.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날리며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포근했다.
김성혜가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리사이틀에서 그는 곡의 분위기에 맞게 화이트→블루→화이트→레드 드레스로 변화를 줬다. 의상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꼼꼼함이 돋보였다.
벨리니 <청교도>에 나오는 ‘Qui la voce sua soave...Vien diletto(그의 다정한 목소리가...오라 사랑이여)’를 불렀다. 엘비라는 아르투로가 다른 여자와 도망(사실은 왕비를 구하기 위해 탈출한 것임)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다. 조로조(삼촌)와 리카르도(엘비라를 흠모하는 청교도파 기사)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아르투로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미친 상태’에서 노래한다. ‘매드신(Mad Scene)’, 이른바 ‘광란의 장면’이다. 김성혜는 벨리니 최고의 선율이 총집합된 아리아를 최고의 소리로 선물했다. 언터처블 보이스다.
앙코르는 세 곡을 불렀다. 오페라 ‘마이 페어 레이디’ 속 넘버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빅토르 허버트의 오페레타 ‘말괄량이 마리에타’에 나오는 ‘Italian street song’, 그리고 랜디 울프 작곡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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