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프연주자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가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이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 D장조 ‘거인’은 음악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교향곡의 개념을 확장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주제와 동기는 시간의 순환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간의 흐름이라는 피할 수 없는 본질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우리 자신의 여정, 기억, 세상 속에서의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이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2024 피날레 무대를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으로 장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시간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을 상기시킨다. 라일란트 예술감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시즌의 마지막을 말러 교향곡 1번으로 선택해 ‘끝’이 아닌 국립심포니의 ‘새로운 도약’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지난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선보인 ‘거인’은 드라마틱했다. 베토벤의 형식과 슈베르트의 선율에 영감을 받은 듯한 1악장(느리고 완만하게)은 변형된 소나타 형식을 구현하며 19세기 말에도 지속된 음악적 실험을 이어간다. 무대 오른쪽 출입문 안에서 3명의 트럼펫 주자가 내뿜는 ‘반다’는 인상적이었다.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이 7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시즌 피날레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이 7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시즌 피날레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왈츠 렌틀러에 기반한 2악장(힘차게 움직여서)은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빈의 왈츠와 대조를 이룬다. 이 극적 대비를 바탕으로 말러는 전통적인 춤곡을 재해석하고 인간 감정의 본질을 탐색한다. 쾅! 강렬한 한방으로 마감하는 클로징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다.
엄숙하고 장중하게의 3악장은 동요를 기반으로 한 장송행진곡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다. ‘팀파니+더블베이스’ ‘팀파니+첼로’로 시작되는 선율은 서늘하다. 말러는 친숙한 선율을 단조로 변형시켜 잊을 수 없는 음악적 경험을 안겨준다. 모순된 감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악장은 장엄함 속에 숨겨진 가벼움과 천진난만함 속에 깃든 심오함을 통해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표현한다. 이런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용함 마무리를 선택했다.
4악장(태풍처럼 움직여서)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과정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인간이 마주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희망과 긍정으로 나아가는 인간 불굴의 정신을 표현한다. 말러는 이를 통해 인생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변화와 도전, 그리고 힘겹게 얻은 승리와 모든 역경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호른, 트럼펫으로 구성된 9명의 ‘반다’도 결국 희망의 소리다.
‘집에 가고 싶어.’가 세계 초연된 뒤 노재봉 작곡가가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과 인사를 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집에 가고 싶어.’가 세계 초연된 뒤 노재봉 작곡가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이날 공연은 노재봉의 ‘집에 가고 싶어.’로 포문을 열었다. 2023년 작곡가 아틀리에 우수 작곡가로 선정돼 2024/25 국립심포니의 상주작곡가로 임명된 노재봉은 현재의 사회상에 관심을 뒀다. 국립심포니의 위촉으로 세계 초연된 ‘집에 가고 싶어.’는 고령화와 치매라는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일반적인 관찰을 넘어 경험자의 시선으로 기억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피콜로와 플루트의 연주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형태를 갖추어 가지만, 음악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는 메트로놈 소리만 들려온다. 이어지는 음악은 불협화음으로 가득하고, 짜임새도 두터워서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들린다. 현악기군의 글리산도(미끄러지듯 연주)가 음악을 점점 더 희미하게 한다.
그렇게 음악의 숨결의 영원히 꺼지는 듯한 순간, 처음 들었던 피콜로와 플루트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좋은 소리일까 싶었는데 음악이 꺼져가는 순간 다시 듣는 이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내 메트로놈 소리가 다시 들려오면서 이번에는 또 어디로 이어질 것인지, 다음은 있는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음악은 거기서 멈춘다. 연주를 마친 뒤 라일란트 감독은 무대로 노재봉 작곡가를 불러 관객에서 소개했다.

하프연주자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가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이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있다. ⓒ국립심포니 제공
‘하프 타는 남자’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는 라인홀트 글리에르의 ‘하프 협주곡 내림E장조(Op.74)’를 연주했다. 10여년간 빈 필하모닉의 수석 연주자로 있다가 과감하게 솔로 하피스트로 전환한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음색을 지닌 하프는 과거와 현재,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잇는 역할을 한다.
1악장은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하프가 서정적이고 유려한 선율을 연주해 독주악기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2악장은 주제와 변주로 구성돼 있다. 하프가 제사하는 주제는 단순하고 우아하지만, 이어지는 변주를 통해 부드럽게 흐르는 아르페지오 주법부터 기교적인 패시지까지 악가의 다양한 특성을 경험할 수 있다.
3악장에서는 악장 전체에 걸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쾌한 주제를 연주한다. 이 주제가 반복되는 사이사이에 하프는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나누며 협주곡의 매력을 발산한다.
여러 번의 커튼콜 뒤 고드푸루아의 ‘베니스의 축제’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라인란트 예술감독은 공연을 마친 뒤 모든 악기파트별로 연주자들을 일으켜 세워 관객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올 한해 저희 공연을 봐주신 관객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을 담은 세리머니였다. 객석에 앉아 있던 최정숙 대표도 일어나 인사했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