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지휘 펠로십에 참가한 최재혁(왼쪽) 지휘자가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지도를 받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의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 최재혁(31)이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5악장을 연주하자, 포디움 뒤에 서있던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방금 연주가 만족스러웠나”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질문을 잇따라 쏟아냈다. “어떤 음이 어긋났지? 어떻게 수정할 건가? 한번 고쳐 보게.” 최재혁도 강심장이다. 80여명 단원 앞에서 당황할 법도 했지만 “너무 부드러웠다”고 냉철한 셀프진단을 내놓았다. 판 츠베덴은 “그래 바로 그거야”라며 맞장구를 치고는 가르침을 이어 나갔다.
서울시향이 올해 재단법인 설립 20주년과 창단 80주년을 맞아 기획한 ‘지휘 펠로십’의 뜨거운 현장 풍경이다. 재능 있는 차세대 지휘자 양성을 위해 리허설 공연 지휘 등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군더더기도 없었다. 판 츠베덴은 “서서 지휘하는 건 잘했다” “지휘자가 앉아서 하면 오케스트라는 누워 버릴 것이다” “단원들이 널 지휘하게 두지 말라” “정확히 어떤 음이 어긋났는지 말해주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멘트를 선물했다. “방금 연주에서 바이올린 주자들이 활을 올려서 그었는지 내려서 그었는지 기억이 나느냐” “어떤 악기 소리가 잘못됐는지 말해보라”는 등 깜작 퀴즈를 내기도 했다.
지휘자의 태도, 손동작과 기술, 음악적 해석 등 하나하나 팁을 전수했다. 지휘자가 수정한 소리가 즉각 연주에 반영돼 굿 사운드로 돌아오자 단원들도 발을 구르며 화답했다. 흐뭇한 모습이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지휘 펠로십에 참여한 신주연의 지휘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서울시향은 지난해 7월부터 9월까지 두 달간 지휘 펠로십 지원자를 모집했다. 59명이 접수했고, 심사를 통해 총 8명이 선발됐다. 판 츠베덴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이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오케스트라와 작업을 한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뽑았다”고 밝혔다.
▲김리라(전 네덜란드라디오필하모닉 부지휘자) ▲김준영(현 독일 하이델베르크 시립극장 제2카펠마이스터) ▲김효은(현 독일 프랑크푸르트 극장 객원지휘자) ▲박근태(현 베를린노이에필하모닉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송민규(전 국립오페라단 펠로십 지휘자) ▲신주연(현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 펠로우지휘자) ▲최재혁(전 베르비에페스티벌오케스트라 지휘펠로우) ▲해리스 한(현 피에르몽퇴페스티벌 부지휘자)이 참여했다.
사흘(25~27일) 동안의 리허설 공연 지휘가 끝난 뒤에는 서울시향 단원들의 투표를 거쳐 2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지휘 펠로십 특별공연’을 지휘할 지휘자를 선발한다. 또한 최종 우수 참가자는 서울시향 부지휘자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는 특전도 부여받는다. 판 츠베덴은 “나는 가르칠 뿐이고 투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누가 선발될지 매우 궁금하다”며 웃었다.
참가자들은 리허설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총 세 곡을 지휘해 실력을 평가받는다. 특별공연에서도 이 곡을 연주하고 지휘한다.
판 츠베덴은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중 1악장 리허설을 진행한 송민규(32)에게도 “바이올린 섹션이 왜 이 부분을 어려워 하는지 말해볼래요?”라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흡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판 츠베덴은 원하는 사운드를 얻기 위해서는 보잉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다운보우(활을 위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긋는 것)는 빠르게, 업보우(다운보우의 반대)는 느리게 해야 한다”고 어드바이스했다. 송민규는 츠베덴 음악감독의 조언대로 바이올린 섹션에 보잉 변경을 요청하자 조금 전보다 풍부하고 또렷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뿐만 아니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팔을 계속 높이 드네요”라고 자세까지 짚어 줬다. 송민규가 피드백을 듣고 다시 지휘를 시작하자 “아주 좋아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서울시향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이 26일 지휘 펠로십에서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것이 음악가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리허설 후 판 츠베덴 감독은 기자들을 만났다. 자기에게 부여된 소명의식을 밝혔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오케스트라와 작업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의무다”라며 “제가 남기고 싶은 유산은 훌륭한 연주뿐만 아니라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훌륭한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절친한 사이인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 얘기도 들려줬다. 히딩크 감독은 판 츠베덴에게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새로운 세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판 츠베덴 감독은 참가자들의 잠재력을 묻자 “짧은 기간에 판단하기 어렵다”면서도 “성장 속도가 각자 다르지만, 모든 지휘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지휘자가 갖춰야 할 소양에 관해서도 연급했다. “참가자들에게 ‘지휘자는 음악의 대사(ambassador)라고 말했다”며 “지휘자가 작곡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겸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울러 “곡의 디테일, 무엇보다 모든 악기의 연주 기법 등 기술적인 측면에 관해 지휘자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작업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연주를 멈추게 하고, 멈춘 이유를 말해주고, 더 나은 연주로 교향악단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취재진에게 공개된 일부 리허설 장면에서 판 츠베덴은 참가자들에게 곡 해석부터 그에 맞는 지휘법, 단원들과의 소통 방법까지 꼼꼼하게 교육했다. 핀셋 맞춤 레슨을 해주었다.
26일 열린 '2025 서울시향 지휘 펠로십' 인터뷰에 참석한 펠로십 참가자들. 왼쪽부터 김리라, 김준영, 김효은, 박근태, 송민규, 신주연, 최재혁, 해리스 한. ⓒ서울시향 제공
참가자들은 ‘지휘 펠로십’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근태(34)는 “내가 원하는 음악이 100%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파고드는 건 프로페셔널한 오케스트라에서는 하기 힘든 부분이다”라며 “집요할 정도로 끝까지 파고들 수 있도록 감독님이 기회를 준 게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김리라(33)는 “모든 지휘자의 성향과 특징이 다른데 감독님이 중요한 메인 포인트를 찍어준다”며 “단순히 테크닉뿐만이 아니라 상상력, 기법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다 터치해줘 배울 것이 너무 많다”고 소감을 전했다.
최재혁은 대가에게 배우는 기쁨을 멋지게 표현했다. “서울시향 펠로십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참가비가 없다는 것이다(웃음)”라며 “판 츠베덴 감독 같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에게 배운다는 건, 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가 손흥민에게 배우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신주연(25)은 “하루하루 새로운 지식으로 머리가 채워지는 것 같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신진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뭘까. 판 츠베덴은 뼈 때리는 발언을 내놓았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페라리를 빠르게 운전하면 주변 상황을 볼 수 없다. 경력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음악에 집중하다 보면 커리어는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음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다. “무엇보다 지휘의 기쁨을 늘 간직해야 한다. 나는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연주가 끝나고 내 방에 오면 그 악보를 한 시간 더 들여다본다.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백브리핑> 송민규·박근태·해리스 한 ‘지휘 서바이벌’ 뚫고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26일 열린 '2025 서울시향 지휘 펠로십' 인터뷰에 참석한 펠로십 참가자들. 왼쪽부터 김리라, 김준영, 김효은, 박근태, 송민규, 신주연, 최재혁, 해리스 한. 이 가운데 송민규, 박근태, 해리스 한이 특별공연 무대에 오를 3명에 선정됐다. ⓒ서울시향 제공
송민규, 박근태, 해리스 한이 서울시향의 ‘지휘 서바이벌’을 뚫고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서울시향은 차세대 지휘자 양성프로그램 ‘지휘 펠로십’이 사흘(25~27일) 간의 리허설 을 마친 뒤 단원 투표를 거쳐 특별공연에 오를 지휘자 3명을 선정했고 27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최종 우수자 1명은 앞으로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활동할 기회도 얻는다.
세 명이 연주할 곡은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예술적 판단에 따라 배정했다. 송민규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을, 박근태는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해리스 한은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지휘한다.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는 서울시향 한지연 바이올린 수석과 강윤지 비올라 수석이 협연한다.
서울시향 지휘 펠로십은 가요 경연 프로그램처럼 일종의 ‘서바이벌 방식’을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지원자 59명 가운데 심사를 거쳐 참가자 8명을 선발한 뒤 서울시향의 리허설을 이끌 기회를 줬다. 특별 공연에 나설 3명은 단원들의 투표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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